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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오규 소라이 - 신유학의 수양론을 해체하다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오규 소라이 - 신유학의 수양론을 해체하다

건방진방랑자 2022. 3. 8.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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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학의 수양론을 해체하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는 주희가 제안한 성인이 되는 방법, 즉 그의 수양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지요. 외부 사물들에 내재하는 이()를 계속 탐구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 그것들이 단지 하나의 초월적인 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통찰하게 됩니다. 주희는 이러한 과정을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 강물 속에 있는 달그림자를 보면, 강물이 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강물들을 계속 관찰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그러한 달그림자들이 결국은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희가 활연관통(豁然貫通)’이라고 표현했던 정신 상태이지요.

 

그런데 주희를 포함한 신유학자들은 모두 인간만이 가장 빼어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가장 잔잔하고 많은 강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러한 관점은 기질이 탁한 외부 사물들을 계속 탐구하기보다 기질이 맑은 인간 자신의 심성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빨리 초월적 이()를 파악하는 방법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주희는 미발의 함양 공부를 그렇게 중시했던 것이지요.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고요하고 맑게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속의 달그림자를 언제든 환히 비출 수 있을 테니까요. 주희가 말한 미발의 함양 공부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내성(introspection)의 공부 방법이었지요. 그러나 이런 내성의 방법이야말로 소라이가 가장 비판했던 부분입니다. 그가 내성의 방법을 어떻게 비판했는지 들어보도록 하지요.

 

 

마음은 형체가 없으니 그것을 잡아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선왕의 도()는 예()로써 마음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를 도외시하고서 마음을 다스리는 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사사로운 지혜의 망령된 수직일 뿐이다. 왜 그런가? 다스리는 주체도 마음이고, 다스려지는 대상도 마음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으로 내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미친 사람이 자신의 미친 상태를 스스로 고치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그것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후세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도를 모르는 것이다. - 변도14

心無形也, 不可得而制之矣. 故先王之道, 以禮制心. 外乎禮而語治心之道, 皆私智妄作也. 何也? 治之者心也, 所治者心也. 以我心治我心, 譬如狂者自治其狂焉, 安能治之? 故後世治心之說, 皆不知道者也.

심무형야, 불가득이제지의. 고선왕지도, 이례제심. 외호예이어치심지도, 개사지망작야. 하야? 친지자심야, 소치자심야. 이아심치아심, 비여광자자치기광언, 안능치지? 고후세치심지설, 개부지도자야.

 

 

주희의 말대로 함양 공부를 하려면 우리는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잡을 수 없는 또 다른 곳으로 도망간 것은 아닐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나는 누군가를 미워했던 마음을 반성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성할 때 다른 사람을 미워했던 그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이미 미워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소라이가 보았을 때, 주희의 함양 공부는 바로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정작 마음을 함양하려고 할 때, 이미 우리 마음은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중일 겁니다.

 

소라이의 말처럼 다스려지는 대상도 마음이고, 다스리는 주체도 마음이라면 우리는 자기 분열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여전히 다스리는 주체로서의 마음은 통제 영역 바깥으로 벗어나 있는 셈이지요. 만약 다스리는 마음 자체가 좋지 않다면, 이 마음이 다른 마음을 통제한다고 한들 무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소라이는 내성적인 공부란 미친 사람이 자신의 미친 상태를 스스로 고치려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무릇 마음이란 것은 잡아서 통제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차라리 그는 예()라는 객관적 규범에 의해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내면에 잠재해 있는 본성을 응시하는 것보다 예라는 객관적 규범을 학습하는 것이 더 현명한 전략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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