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의예지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이 네 가지 단서야말로 내가 처음 깨닫게 되는 윤리적 욕구라고 이해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네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삼아 조금씩 확충해가면, 마침내 언젠가는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 덕목들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곧 그 순서가 사단에서부터 사덕으로 나아간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정약용은 이런 관점에 따라 인의예지 덕목들은 구체적인 행동, 즉 행사(行事) 이후에 성립될 수 있는 명칭이라고 주장합니다.
인의예지의 명칭은 반드시 행사 이후에 성립된다. 어린애가 우물에 빠질 때 측은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살펴 ‘인(仁)’이라고 말할 수 없다.
若其仁義禮智之名 必成於行事之後 赤子入井 惻隱而不往救則不可原其心而曰仁也
약기인의예지지명 필성어행사지후 적자입정 측은이불왕구즉불가원기심이왈인야
한 그릇의 밥을 성내거나 발로 차면서 줄 때 수오(羞惡)의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 음식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살펴 ‘의(義)’라고 말할 수 없다.
簞食嘑蹴 羞惡而不棄去則不可原其心而曰義也
단식호축 수오이불기거즉불가원기심이왈의야
큰 손님이 문에 이르렀는데 공경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맞이하여 절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살펴 ‘예(禮)’라고 말할 수 없다.
大賓臨門 恭敬而不迎拜則不可原其心而曰禮也
대빈림문 공경이불영배즉불가원기심이왈예야
선한 사람이 무고를 당했을 때 시비(是非)의 마음이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분별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을 살펴 ‘지(智)’라고 말할 수 없다.
善人被讒 是非而不辨明則不可原其心而曰智也
선인피참 시비이불변명즉불가원기심이왈지야
이에 네 가지 마음[四心]이란 인성이 본래 가진 것이며, 네 가지 덕[四德]이란 네 가지 마음을 확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직 확충하지 못했다면, 인의예지라는 명칭은 끝내 성립될 수 없다. 『맹자요의(孟子要義)』 2: 23
是知四心者 人性之所固有也 四德者四心之所擴充也 未及擴充則仁義禮智之名 終不可立矣
시지사심자 인성지소고유야 사덕자사심지소확충야 미급확충즉인의예지지명 종불가립의
정약용은 인의예지 사덕이 가장 마지막에 실현되는 도덕적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와 달리 사심으로서의 네 가지 마음, 즉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은 바로 앞에서 네 가지 단서라고 말한 사단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것이 인간 마음에서 처음으로 작동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반드시 이 사심을 구체적인 실천의 영역인 행사(行事) 차원에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구체적 현장에서 그 마음을 확충하고 더 강하게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떤 아이가 몹쓸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현장을 내가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오로지 나 혼자입니다. 이런 상황에 아이 편을 들다가는 괜히 나까지 큰 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붙잡힌 아이가 측은하고 불쌍하긴 했지만, 나는 재빨리 등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길을 바꿉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좀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 정약용이 이런 상황을 보았다면 분명 나를 인(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아무리 아이에게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느꼈다 할지라도 결국 그 아이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정약용은 주희와 같은 성리학자들이 자기 마음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에게 인의 본성이 있다고 감탄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성리학자들은 자기 내면에 사로잡혀 본성의 아름다움만 동경했다고 비아냥거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측은지심을 느꼈을 때 당장 달려가 아이를 구하는 행동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측은지심을 크게 확충하여 실제로 아이를 구해야만 비로소 그 사람이 인(仁)하다고 평가한 것이지요. 정약용이 인의예지의 명칭은 구체적인 행동 이후에 성립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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