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원주민 부족과 싸우다 전사하고 동료들만 귀환했지만, 같은 시기 에스파냐 탐험대가 아메리카를 다루는 과정은 포르투갈의 경우와 현저히 달랐다. 1511년 쿠바를 정복하고 이곳에 근거지를 차린 에스파냐는 본국에서 아예 대규모의 군대를 데려다놓았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탐험가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아메리카에는 제법 힘깨나 쓰는 원주민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스파냐는 탐험대라는 간판을 내리고 대신 ‘원정대’의 깃발을 세우기로 했다. 이제 에스파냐는 원주민들에 대한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섰다. 포르투갈이 탐험대 → 상선의 세련된 코스를 밟았다면, 에스파냐는 탐험대 → 원정대라는 무식한 코스를 택한 셈이다. 에스파냐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향료 무역의 이득을 노리고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의 섬들과 접촉한 포르투갈과 달리, 에스파냐는 대륙을 상대로 장기적이고 잠재적인 이득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정복의 과정은 포르투갈의 경우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야만적이었다.
당시 멕시코의 고원지대에는 아스테카인들이 200년 전부터 테노치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에 터를 잡고 주변의 작은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이외에는 문명의 개념을 부여하지 않았던 에스파냐인들은 아스테카 제국을 문명국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나, 아스테카인들은 찬란한 고대 문명인 마야를 계승한 데다 문명의 가장 명확한 증거인 문자와 달력도 사용하고 있었다【마야인과 아스테카인은 왜 북아메리카의 넓은 평원 지대를 두고 좁은 멕시코 고원에서 문명의 꽃을 피웠을까? 이 점은 인류학의 주제로 아직도 연구 대상이지만 큰 윤곽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북아메리카, 그러니까 지금 미국 동부의 넓은 평원은 기후도 좋고 사냥할 짐승도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인구가 너무 적었다. 더구나 베링 해협으로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갈라지면서부터는 더 이상 구세계로부터의 이주도 없었다. 문명이 발달하려면 어느 정도의 인구밀도가 필요하다. 여기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구세계보다 훨씬 문명의 발생과 발달이 늦었으며, 오히려 더 남쪽으로 간 무리들이 좁은 고원지대에 모여 살게 되면서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평원에 그대로 남은 무리는 오늘날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되었다)】. 에스파냐인들이 군대를 끌고 간 이유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아스테카 문명의 제례 의식을 야만적이라고 단정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문명의 수준에 비해 군사력이 취약하다는 아스테카인들의 단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아스테카는 정복한 전쟁 포로를 제물로 사용한 탓에 주변 민족들의 많은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 주변 민족들은 나중에 에스파냐가 공격해왔을 때 오히려 에스파냐 측으로 붙어 아스테카와 싸웠다).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시작한 1519년에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1485~1547)는 11척의 함대와 14문의 대포, 660명의 병력으로 쿠바의 기지를 떠났다. 그들이 닿은 곳은 오늘날 멕시코시티의 외항이라 할 베라크루스였다. 이곳에서 에스파냐군은 무려 4만 명의 원주민 군대와 싸워 이겼다. 아스테카의 결정적인 약점과 에스파냐의 우수한 화력이 한 데 어울려 낳은 ‘어처구니없는’ 전과였다【당시 아스테카인들은 말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다. 고산지대에서는 말이 필요 없었으므로 그들은 말을 키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을 타고 다니는 에스파냐 병사들을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짐승(말)인 괴물이라고 여기면서 카바호라고 불렀다(이를테면 반인반수, 그리스 신화의 켄타우로스에 해당한다). 카바호는 ‘말’이라는 뜻의 에스파냐어인 카바요(caballo)에서 나온 이름이었는데, 말이라는 단어가 없으니까 아스테카인들이 에스파냐어를 빌려 만든 단어다】. 여기에 코르테스는 베라크루스를 세워 테노치티틀란을 공략하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그는 비록 하급 귀족 출신이었으나 열여덟 살에 청운의 꿈을 안고 신세계로 찾아온 두둑한 배짱을 가진 사나이였다.
원주민 군대의 실력을 알 만큼 알았다고 판단한 코르테스는 즉각 공세에 나서 1521년에 마침내 테노치티틀란을 점령했다. 이교도의 문명은 문명이 아니라는 그의 생각은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지극히 야만적인 행위로 실현되었다. 수천 년간 이어진 멕시코의 고대 문화를 군홧발로 짓밟고, 아스테카 원주민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아스테카 궁전을 장식하던 수많은 황금 장식물은 순전히 본국으로 수송하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현지의 가마에서 녹여졌으며, 피라미드를 비롯한 테노치티틀란의 많은 신전은 최우선적인 파괴 대상이 되었다(이렇게 이교도 문명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긴 것은 본국에서 파견되어 정복 전쟁 때마다 따라다닌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또 하나의 아메리카 토착 문명인 잉카 문명은 더 보잘것없는 동기에서, 더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통해 무너졌다. 아메리카가 발견된 이후 에스파냐에서는 탐험가를 자처하는 수많은 건달이 신세계로 건너왔다【그런 건달 중 하나로 발보아가 있었다. 그는 원주민들에게서 황금의 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기 위해 파나마 지협을 횡단한 끝에 1513년 태평양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는 최초로 태평양을 본 유럽인이다(태평양이라는 이름은 7년 뒤에 마젤란이 지었다). 그러나 그가 찾던 황금의 나라, 잉카 제국은 더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 그는 결국 황금을 보지 못하고 동료들을 배신한 죄로 본국에서 온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가 태평양과 대서양이 가장 가까이 맞닿은 파나마에 간 것은 엉뚱한 결과를 빚었다. 발보아 때문에 신대륙의 동서 폭이 의외로 좁다고 여긴 탐험가들은 서쪽으로 약간만 더 가면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마젤란의 세계일주도 거기서 자극을 받았을 터이다】. 그들 대부분은 남아메리카 어딘가에 있다는 엘도라도라는 황금의 땅을 찾으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년경~1541)라는 자였다. 그는 한동안 수색과 탐험을 거듭한 끝에 페루의 잉카제국이 바로 엘도라도라고 확신했다.
10세기 이후 안데스 고원지대 쿠스코에 자리 잡은 잉카 제국은 에스파냐가 침략해올 무렵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더욱이 잉카는 아스테카와 달리 군사력도 강한 국가였다. 수백년 동안 인근 민족들을 차례차례 정복했을 뿐 아니라 15세기부터는 멀리 북쪽의 에콰도르까지 손에 넣은 정복 국가였다. 배고플 때는 뭉치다가도 배부를 때는 갈라서는 게 인지상정일까? 국력이 크게 일어나자 잉카의 지배층은 쿠스코파와 에콰도르파로 양분 되어 다툼을 시작했다. 1531년부터 2년간 두 세력은 치열한 내전을 벌여 에콰도르파가 승리했으나 대외적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내분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조개와 새의 싸움에서 이득을 본 어부는 피사로였다.
자칭 탐험가, 타칭 건달이었던 피사로는 그간의 탐험 공로로 1531년 180명의 병력을 인솔하게 되어 지휘관이라는 명함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는 새 명함을 에콰도르의 실력자인 아타우알파에게 내밀었다. 쿠스코 세력과 한창 전쟁 중이던 아타우알파로서는 누구의 도움이라도 아쉬운 판에 강력한 무기를 가진 에스파냐군이 지원을 약속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내전에서 승리하고 황제가 된 아타우알파에게 피사로는 명함이 아닌 성서를 내밀었다(물론 그 자리에는 에스파냐 사제가 있었다), 태양신을 비롯한 자연의 신들을 믿는 잉카인들에게 성서가 웬 말, 아타우알파는 성서를 내던지고 개종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180명의 ‘카바호’들에게 제국을 송두리째 내주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1533년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는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인들의 손에 처형되었고, 그 반인반수의 야만인들은 쿠스코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태평양 연안 산기슭에 오늘날 페루의 수도가 된 리마라는 새 도시를 세워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에 나섰다.
▲ 잉카 유적 아스테카처럼 잉카 제국도 에스파냐 병사들의 군홧발에 짓밟혀 남은 유적이 많지 않다. 이 마추픽추의 유적은 에스파냐의 침략을 피해 달아난 잉카인들이 도피 생활을 하던 곳인데, 에스파냐 병사들이 이곳을 발견하지 못한 덕분에 멀쩡한 상태로 20세기에 발견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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