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디스페이스와의 추억, 그리고 ‘나의 살던 고향은’
8시부터 시작되는 『나의 살던 고향은』을 보기 위해서는 인디스페이스에 가야 한다. 2014년엔 돌베개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책씨(책+Cine, 영화도 보고 영화 내용과 관련된 돌베개 책도 읽는 행사)’라는 프로그램에 동참하여 『탐욕의 제국』과 『다이빙벨』을 인디스페이스에서 볼 수 있었다. 무언가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사회 문제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닌 내 문제처럼 느껴질 때 책씨에 참여했던 것 같다. 그 당시만 해도 인디스페이스는 서울역사박물관 옆 건물에 있었다.
▲ 2014년엔 책씨에 두 번이나 참여했다. 그 덕에 좋은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다.
『귀향』을 보러 인디스페이스에 갔으나, 인디스페이스는 없었다
2014년엔 두 번이나 참여했던 ‘책씨’를 2015년엔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까진 확 땡기는 영화를 제안했을 때 참여했었는데, 그렇다면 2015년엔 그런 영화가 없었다는 것일까? 그건 아니었을 거다. 2015년엔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행사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여튼 그땐 그랬다. 그렇게 한 해가 얼렁뚱땅 흘러 2016년의 해가 밝았다. 올핸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지금 한국은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기까지 하다. 아마도 그 시발점은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이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난제로 여겨지며 묵혀 있던 ‘위안부’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정부 입장에선 케케묵은 문제를 마침내 해결했다고 좋아했을지는 모르지만(그래서 엄마부대는 아예 “아베 수상의 사과를 받아드려 더 강한 대한미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줍시다”라는 말로 ‘엄마’라는 단어를 모욕하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91년부터 25년째 싸워오고 있는 할머니들은 그런 협상이 어이가 없었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도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한 협상’에 화가 났다.
▲ 엄마부대는 엄마라는 말이 무색하게, 엄마를 모독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공분이 일어나던 이 때 시기적절하게도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인 『귀향』이 상영되었고, 졸속으로 진행된 협상에 이의를 제기하던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때 돌베개 책씨에서 『귀향』을 선정해서 함께 보자고 하니, 어찌 이런 기회를 날려버릴 수가 있으랴. 모처럼 가슴 뛰는 기쁨을 느끼며 1년이란 시간의 간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7시 30분이 시작이었기에 일찍 학교에서 나와 역사박물관을 느긋하게 돌아보고 7시 10분이 넘어서야 역사박물관 옆 건물로 들어갔다. 보통 때였으면 극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돌베개 관계자가 서있고 이름을 확인한 후에 영화 티켓과 책을 주는데, 이땐 특이하게도 관계자도 보이지 않았고 책상에 놓여 있는 책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뭐지? 뭐가 좀 이상한데??(단재 영화팀 5번째 작품 『DREAM』 버전으로)’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직 확인된 건 없었기에 좀 더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글쎄 인디스페이스는 서울극장으로 이전했다고 하더라. 영화 시간은 겨우 1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든 간다 해도 늦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이제 찾아보니, 5월에 이전했더라. 하도 안 가봤더니, 이전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 때 우리처럼 이곳을 인디스페이스인 줄 알고 온 두 사람이 있었고, 그분들 또한 우리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분들이 먼저 “서울극장으로 가실 거죠? 그러면 택시타고 같이 가는 건 어때요?”라고 제안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멍하니 있었는데 이런 제안을 들으니, 어찌나 반갑던지. 그래서 우린 함께 택시를 타고, 서울극장으로 왔다. 다행인 점은 이전한 인디스페이스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아 많이 늦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역시나 극장에 들어서니 돌베개 관계가자 있더라. 그 순간 어찌나 반갑게 느껴지던지. 소등된 극장 안으로 부랴부랴 들어가 이미 시작된 『귀향』을 봤던 아찔했던 추억이 있다.
▲ '귀향'은 정말 시기적절하게 개봉을 하여, 300만이 넘는 관객수를 기록했다. 이 또한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응원의 의미다.
인디스페이스를 다시 찾아 왔수다
이미 그런 추억 아닌 추억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살던 고향』을 보러 인디스페이스에 가는 것도 반가웠고, 한편으론 ‘저번 같이 황당한 경험을 하진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은 8시에 상영한다.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저녁밥을 챙겨먹고 여유 있게 나와 서울극장에 들어섰다. 『귀향』을 볼 때만해도 늦는 바람에 극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같이 온 사람들을 따라가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곳이 인디스페이스 전용 매표소가 있기도 했고, 도올 선생이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느라 멈춰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늘 TV로만 보던 분을 직접 보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더라. 저번 후기에서도 말했다시피 도올 선생의 강연과 책, 그리고 그의 활동들에 감화를 받은 ‘제자인 듯 제자 아닌, 제자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도올 선생은 치파오를 입고 관객을 맞이했으며,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라는 사람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고 계셨다. 나는 매표소에서 표를 받고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인디스페이스는 3층에 있다. 사람들도 거의 상영시간이 되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더라. 그래서 나도 그 뒤를 따라 함께 올라갔다. 아직 입장 시간은 안 되었는지 3층에는 1층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더라.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부터, 나이가 지긋이 드신 분들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그분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영화 포스터 앞에서 그 순간을 담고 있기도 했는데, 흡사 축제처럼 약간의 흥분과 기대가 묘하게 교차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영화관은 예매할 때 앉을 자리를 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요샌 앉는 자리에 따라 돈을 더 내야 하는 ‘좌석차등제’ 같은 영화비를 인상하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앉을 자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디스페이스는 예매할 때 자리를 선택할 수 없고, 결제 순서에 따라 자동으로 자리가 배정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내가 배정받은 자리는 ‘J열 11번’이었다. A부터 좌석이 시작되니, 거의 뒤편에 앉아야 했던 것이다. 앞자리에 앉아 도올 선생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말씀을 좀 더 생생하게 듣고 싶었는데, 너무 먼 곳에 배정되어 아쉬운 마음이 들더라.
▲ 로비엔 한참 사진 찍기에 바쁘다. 여긴 좌석이 자동 배정되니 뒷자리가 정해졌다.
『나의 살던 고향은』 첫 장면이 핵심이다
접때 왔을 때는 이미 소등이 된 상태에서 들어왔고, 그날엔 감독과의 GV도 계획되어 있지 않다 보니, 극장의 크기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극장이 큰지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이날은 상영 10분 전에 들어가 극장 전체를 둘러보니, 예전의 극장은 미니 극장 같았고 어둑침침한 분위기였다면 이곳은 극장도 매우 커졌으며 내부도 훨씬 환한 빛깔이 감돌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겼다. 극장을 이전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더 나은 환경으로 옮겼고 접근성도 훨씬 좋아졌다는 점에서 지금이 훨씬 맘에 든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도올 선생이 스크린 앞에 서서 “이 영화는 여기서 첫 개봉을 시작으로 80여개 극장에서 상영됩니다. 잘 만들어진 영화이니만치 재밌게 봐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당부 말씀을 하신다. 이제야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책으로만 읽었던, 피상적인 텍스트로만 읽었던 『중국일기』의 내용이 어떻게 영상으로 드러날 것이며, 우리에게 어떤 상상imagination 거리들을 제공할 것인가?
▲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도올 선생이 한 마디를 하신다.
첫 장면에서 어느 고구려의 성을 따라 올라가는 도올 선생의 모습이 나온다. 성 정상에 도착하니 도올 선생이 너무나 힘들던지 정상에 놓여 있는 넓적한 돌에 그대로 벌러덩 누워버린다. 영화에 한껏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고구려란 주제를 담은 영화이니만치 장엄하고 근엄하며 진지할 거라고만 생각했을 텐데, 첫 장면부터 긴장을 풀게 만든다. 이건 혹 올림픽공원의 몽촌토성이 유적지의 동떨어진 느낌이 아닌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느낌인 것처럼, 고구려 유적도 그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든 것이다. 바로 이런 접근이야말로 고구려를 우리에게서 외부화시켜 완벽한 상으로, 이질적인 과거의 모습으로만 보지 않도록 하려는 도올 선생의 배려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우리 속에 살아 있고 그걸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럼 다음 후기부턴 본격적으로 『나의 살던 고향은』을 본 소감을 써보도록 하겠다.
▲ 고구려의 돌을 침대 삼아 누우신 도올 선생.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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