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지도를 뒤집어본다는 것의 의미
그런데 도올 선생이 제시한 지도를 뒤집어보라는 방법, 어디선가 본 듯한 방법이다. 그러고 보니 이미 2014년에 반영된 『미생』이란 드라마에서도 나왔던 장면이다.
▲ 지도를 똑바로 본다는 것은 계림에서 시작되어 한양으로 수렴되는 역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미생에 나온 지도를 뒤집어 본다는 것의 의미
12화에선 요르단 중고자동차 수출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실제로 이 사업은 자원2팀 과장이었던 박과장이 추진했던 사업으로 리베이트를 받은 게 걸려 사업은 흐지부지 됐다. 이렇게 안 좋게 끝난 사업의 경우엔 회사의 불문율처럼 아무리 사업성이 있다 해도 치부라 생각하여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그래는 그게 못내 아쉬운지 다시 시작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고민하던 오차장은 그걸 받아들인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임원진들을 설득할 수 있느냐다. 자칫 잘못하면 남의 불행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임원들을 설득할 PT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도를 거꾸로 보는 이야기’가 나온다.
장그래: 저는 이상하게 뭔가 찜찜한대요.
김대리: 찜찜? 이런 상황에서 안 찜찜한 사람이 어딨어?
장그래: 근데 상황도 상황이지만, PT 내용이요?
김대리: PT 내용이 뭐?
장그래: 뭐랄까? 하면 할수록 우리 사업의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부각되는 것 같아서요.
오차장: (엿듣고 있다가 발끈하며)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마이너스적인 요소만 부각된다고 생각해?
장그래: (머뭇거리며) 그건 우리 PT자료가 매뉴얼보다 더 매뉴얼 같아서요.
천과장: 완벽하단 거잖아. 그게 문제야?
장그래: 네! PT라는 게 보통 사업의 개요부터 시작하잖아요. 그걸 따르다 보니 우리 사업은 어쩔 수 없이 변명과 해명으로 시작하는 PT가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기존 룰을 따르기보다, 판을 흔드는 게....
김대리: 장그래, 그건 아니지!
오차장: (알쏭달쏭하다는 듯) 판을 흔들어?
장그래: 그러니까 지도를 볼 때 북쪽을 위쪽으로 생각하는 게 관습이 아닐까 싶어서요. 실제로 우주에 떠있는 지구는 위아래 구분이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아래에 호주가 있잖아요. 여기 있던 호주가 이렇게 하면(지도를 뒤집으면) 지도 한 가운데 있어 보이게 됩니다.
임원을 설득하기 위한 PT일수록 더욱 더 기존 틀을 따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존 틀에 익숙한 임원들이 쉽게 이해하여, 사업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의 틀을 따라 이미 한 차례 불미스런 문제가 불거졌던 이 사업으로 설득하려다 보니, ‘왜 그럼에도 굳이 이 사업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구질구질한 변명들로만 가득 차게 됐던 것이다. 그건 누가 봐도 장그래의 말마따나 ‘우리 사업은 문제가 많은 사업입니다’만 부각시키는 꼴이다.
▲ 지도를 거꾸러 보려 이상한 자세를 하고 있는 장그래.
그러면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그래서 장그래가 묘수라고 생각하여 제안한 말이 바로 ‘아예 새로운 판을 만들어 거기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기존의 틀은 자잘한 변명으로 가득 찼다면, 새로운 틀에선 이번 사업의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낯선 틀과 방식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역시나 새로운 틀은 여러 사람을 혼란에 빠뜨렸고, 심지어 그런 제안을 했던 자기 자신도 궁지로 밀어 넣어 ‘오차장님의 최종리허설을 들은 후, 나는 입을 다물었다. OJT 때 배운 룰이 흔들리는 모습을 실전으로 처음 봤다. 기존의 판이 흔들리는 모습을 본 후, 나 역시 판 위에 있었음을 새삼 자각했다’고 자책하기에 이른다.
기존의 틀을 깬다는 게, 그리고 그걸 적용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지도를 뒤집어 본다는 말의 의미가 더욱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뒤집는다는 건 관점이 바뀐다는 말이다. 관점이 바뀌면 그에 따라 행동의 변화도 따라오게 마련이다. 그럴 때 흔들리지 않으려면 충분한 고민과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 판을 흔든 PT에 모두 당황한 표정,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다. 새로운 판은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장그래는 문제의식은 있었기에 제안은 할 수 있었지만, 그걸 끌고 갈만한 사유의 깊이는 없었기에 ‘나 역시 판 위에 있었음을 새삼 자각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제안을 받아들인 오차장은 그걸 받아들일 만한 관점이 있었고, 그걸 깊이 끌고 갈만한 사유의 깊이가 있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날선 비난을 퍼붓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PT를 성공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보던 장그래는 ‘밀어붙이고 쏟아붓는다. 확신이다! 마음속에서 몇 번의 전쟁을 치러야 저런 확신과 신념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일까?’라고 말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사유의 깊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지도를 뒤집어 본다는 것은 이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지도를 뒤집어 ‘고구려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려 맘을 먹었다면, 의구심의 눈초리가 아닌,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도올 선생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에게 광활한 의식의 지평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 역사와 조상에 대해 자부심을 갖길, 각성이 되길 바란다”고 고구려 패러다임의 의의를 설명했다. 고구려 패러다임은 이처럼 지금껏 우리를 억눌렀던, 협소하게 만들었던 온갖 상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 판을 흔드니 처음엔 모두 불쾌해 했지만, 결국 그걸 이해하게 되면서 모두 얼굴엔 미소가 어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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