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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 에필로그 & 탈고 소감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 에필로그 & 탈고 소감

건방진방랑자 2022. 2. 2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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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로역정(地路歷程)

한국의 교회여! 끊임없이 새롭게 울려퍼지는 예수의 복음을 들으라!

 

 

종교는 권유이며 강요가 아니다. 과도한 전도주의는 죄악이다. 종교가 우리사회의 합리적 소통을 방해하는 이념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성서는 인문학적 분석의 대상이다.

 

 

100회로써 중앙SUNDAY에 연재되었던 도을의 도마복음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나는 본시 중앙일보에서 2년 동안만 사회적 글쓰기의 책무를 수행하기로 약속했다. 2년이라는 세월이 짧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돕시 기나긴 인생의 시간이었다. 중앙일보 본지에 쓴 도올고함과 중앙SUNDAY에 쓴 도마복음서 주석을 모두 비슷한 분량인데, 2년 동안 무사히 연재하고 약속대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사실이 기적 같게만 느껴진다. 도마복음서 주석은 신약성서에 대한 기존의 동념을 뒤엎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있기 때문에 맹목적 신앙과 보수적 교단의 이해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물론 중앙일보에 보이지 않는 압력도 있었을 것이고, 또 이 순간 이 연재가 종료된다는 사실을 복음의 소식처럼 기뻐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도마복음 이야기가 2년이나 사회적 공론으로서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교계의 성숙한 모습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만큼 성서에 대한 합리적, 지적 이해의 갈망이 우리사회에 하나의 거대한 사상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여론의 줄타기를 하면서 버겁게 나의 연재를 지속시켜온 중앙일보 관계자들에게 우리는 모두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혹독한 신앙의 굴레 속에서 성장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쿄오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의학부까지 다닌 양의(洋醫)였으니까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번 돈의 거의 전부를 교회에 바쳤다. 그러기 때문에 나 또한 내 삶을 가계에 의존하지 않고 운영해야만 했다. 대학시절부터 유학시절에 이르기까지 나는 장학금으로 나의 학업을 지탱하였다. 내가 유족한 집에 태어나 유족하게 공부한 사람으로 아는데 실상 나는 자력으로 산 사람이다. 우리 누나도 미국유학 갔을 때 미국대학 장학금으로 공부했다. 그런데 그 박약한 장학금을 아껴 부모님 쓰시라고 송금하면, 우리 부모는 그 피땀어린 돈조차 몽땅 교회 성전헌금으로 바쳤다. 이렇게 해서 성장을 거듭해온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과연 이 민족, 이 사회에 어떠한 빛을 발하고 있는지 나는 알 바가 없다. 단지 내가 우리 부모님께서 믿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돈을 버는 족족 다 교회에 바쳤기 때문에 우리 6남매가 싸울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우리 부모는 남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의 삶에서 내가 배운 것은 초월자에게로의 헌신이 아니라 자기부정(self-negation)이다. 나의 부모의 헌신적 자세야말로 곧 축복이라고 할렐루야를 외칠 광신도들이 많겠지만, 나는 그러한 축복은 영원히 사양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도 바울을 흠모했다.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이방선교를 감행한 용기, 그의 편지에 나타나는 치열한 헬라적 논리, 목회자로서 일체 신도들의 헌금에 자신의 삶을 의존치 않고 텐트-메이커로서 살았던 떳떳한 양심, 여타 제자들과는 구별되는 학문 실력과 국제적 감각, 그리고 투병의 역정, 이 모든 것이 나의 실존적 삶의 자세와 철학에 스며들었다. 그가 태어난 고향, 다소(Tarsus)를 가보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아득한 동경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바로 바울이 걸었던 그 길을 걷고 있다. 다소의 중심부에 있는 이 길은 바울뿐 아니라, 키케로, 줄리어스 시저, 클레오파트라와 마크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하드리아누스가 걸었다. 이 유적지는 입장이 불가한 곳이었으나 특별허가를 얻어 걷는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여로는 나의 사상역정의 한 혁명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도마복음 속의 살아있는 예수가 제시한 길을 묵묵히 타협 없이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를 길 잃은 양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꾸준히 살아있는 예수(The Living Jesus)의 말씀을 전할 것이다.

 

 

나는 도마복음을 공적인 자리에 연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명감 속에서 주석했다. 첫째, 기독교신자가 이토록 많은 나라, 그리고 신학자들이 이토록 많은 나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첨단에 서있는 성서관련 정보가 차단되고 있는 것은 좀 부끄러운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학자들이 교권에 눌려 소신껏 자기 목소리를 낼 수가 없게 되면 신학은 생명력을 잃는다. 신학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상실하면 교권이 타락하고 결국은 교회 자체도 몰락하게 마련이다. 현재 도마복음서의 연구는 구미신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첨단사조이다. 이 시대 이 땅에도 구미신학의 한계를 초월하는 자유로운 신학적 논의가 있었다는 이정표를 나는 세계사에 남기고 싶었다. 그것은 비단 신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상사의 개방성에 관한 문제였다.

 

둘째, 모든 경전은 성서이며 성경이다. 성경(聖經)이라는 말 자체가 유교경전에 대해 썼던 말을 기독교가 차용한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모두 성경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이라는 말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성령에 의하여 쓰여진 특수한 문헌이며 인간의 지혜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이러한 황당한 거짓말로부터 우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모든 성경은, 지구상의 문명의 문자의 산물인 이상 철저히 인간의 창작물에 속하는 것이다. 비록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손을 빌린 이상, 그것은 인간의 창작물에 속하는 것이다. 성경을 집필한 손의 신성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신성(holiness)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인간의 지혜의 소산으로서 철저히 분석되어야 한다. 그 통시적ㆍ공시적 측면이 언어학ㆍ역사학ㆍ신화학·철학·문학 등 제반 학문의 성과 위에서 유감없이 분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분석으로써 깨져나가는 신앙은 신앙의 자격이 없다.

 

 

사도 바울의 집 뜨락에 있었던 우물, 바울 그는 신화 아닌 역사였다. 지금도 바울이 먹었던 그 샘물을 떠먹을 수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 다소는 바울의 해축제로 들떠 있었다. 다소를 둘러치며 내륙과 해안으로 뻗은 타우루스 산맥에서 유프라테스ㆍ티그리스강이 발원한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셋째, 신을 믿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것도 자유이다. 인간이 신을 믿어야 한다면, 신 또한 인간을 믿어야 할 것이다. 신과 인간은 호상적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나의 생각과 무관하게, 혹자가 어떠한 형태의 신관이나 신앙형태를 유지하든지간에 그것은 개인의 자율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자율권을 벗어나 사회적·집단적 행위로 표출될 때 최소한의 합리적 규제의 제약을 벗어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곤히 잠들고 있는 새벽 주택가에서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소리로 범종이나 차임벨을 울리는 것은 인권의 침해에 속하는 일이다. 정적한 산사에서 돼지 멱따는 듯한 염불소리를 확성기로 틀어놓는 것도 분명한 폭력이다. 이런 사소한 문제를 포함하여 인간의 내면세계에까지 마구 간섭하면서 배타적 권력을 휘두르는 종교적 폭력은 사람들이 지적하기를 두려워한다. 광신도들의 광란이나 정치적 세력화의 협박 때문에. 나는 종교가 우리사회의 합리적 소통을 방해하는 광신의 형태가 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한때 가톨릭 신부들이 자기들도 세금을 내야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는데, 종교적 단체의 재정이 투명하게 공개될 수 있는 새로운 세제(稅制)를 입법화하는 것은 너무도 정당한 일이다. 왜 기독교인이면 무조건 빨갱이를 증오해야 하는가? 도대체 기독교와 반공(反共)이 무슨 상관인가? 왜 기독교인이라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 서야만 하는가? 이 모든 것이 종교 자체를 도그마로서만 규정하는 사유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종교는 더 이상 도그마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넷째, 도마복음서에 대하여 나는 고전주석의 일반적 논리를 따랐다. 도마복음은 분명 예수가 그리스도나 묵시론적 메시아로 둔갑하기 이전의 살아있는 역사적 인간의 모습을 담고있다. 그리고 이 문헌의 핵심적 층대는 4복음서의 성립보다 빠르다. 나는 AD 50년경으로까지 소급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물론 어느 로기온 파편은 그보다 후대에 성립한 것이 삽입되었을 수도 있다. 도마복음은 영지주의와도 무관하다. 영지주의 문헌이 보여주는 신화적 세계관으로부터 탈피되어 있다. 도마복음의 문헌적 정밀함은 그것을 외경으로 몰아붙이려는 어떠한 시도도 무색하게 만든다. 이미 도마복음은 외경으로서 소외될 수 있는 문헌이 아니며, 4복음서의 전승의 갈래를 파악케 만드는 원자료로서 큐복음서와 함께 이미 4복음서에 내재하는 문헌으로 융합되어가고 있다. 도마복음서의 이해가 없이 4복음서를 이해하는 것이 이미 문헌비평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도마복음서는 4복음서와 병립되는 제5복음서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 신학계에서는 이미 5복음서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새로운 종교혁명이 일어난다면 신약성서의 재편집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5복음서로서 도마복음서가 들어가고 요한계시록이 탈락되는 27서를 구상할 수도 있다. 인도불교가 선불교에로의 격의(格義) 과정을 거쳤다면 로마중심의 서구기독교가 동방의 선기독교에로 트랜스포메이션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필연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나의 신념이요 사명이다. 종교는 권유이지 강요가 아니다. 25장까지 주석을 마쳤다. 나머지 26장부터 114장까지의 부분은 보다 학구적인 주석으로서 단행본(3)으로 상재될 것이다.

 

이상 1·2권에 실린 100편의 글은 200756일부터 2009329일에 걸쳐 약 2년간 매주 일요일 중앙SUNDAY에 연재되었던 것이다. 그 연재 양식을 그대로 존중하여 실었다. 중앙SUNDAY에서 디자인을 담당했던 방진환 팀장, 교정을 담당했던 최성우, 김승욱 부장에게 감사한다. 사진은 중앙일보 임진권 기자가 찍은 것이고 자료정리는 당시 기자였던 김인혜 부장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중앙SUNDAY 1대 편집국장 오병상, 2대 편집국장 전영기, 이 두 사람은 이 글이 연재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온 몸으로 막아주고 필자를 격려하였다. 이 두 사람에게 이 자리를 빌어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우리 문명의 케릭스[전령관]들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다소 한가운데 있는 바울과 관계있는 초기교회, 축성 연대는 AD 300년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1415년 모스크로 전환되어 지금에 이르는데 전형적 바실리카 양식이 남아있다. 나는 여기서 바울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동안 나의 글을 읽어준 여러분을 위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탈고소감(脫稿所感)

기존의 복음서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말씀의 황금광맥

 

 

AD 367 아타나시우스 27서 정경체제 발표, 외경소장 금지.
그즈음 파코미우스 수도원 도서관에 있던 도마복음서를, 의식있는 수도승들이 항아리에 담아 밀봉, 소중하게 게벨 알 타리프에 매장.
194512 엘 카스르의 무함마드 알리와 그의 친구들이 사바크를 캐다가 발견.
19479 불란서 성서고고학자 쟝 도레쓰(Jean Doresse), 카이로 도착, 문서 발견사실을 처음 알게되어 세상에 알림(1948223일자 르몽드).
1966 미국신학자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 발견현장 방문.
1975년 가을 제임스 로빈슨 이 지역 탐색.
1977 제임스 로빈슨 주편하에 나그함마디 라이브러리 전체 영역, 출판.
1983년 겨울 도올 김용옥, 세계의 문학30호에 나그함마디 문서 발표.
2007421 도올 김용옥, 나그함마디 게벨 알 타리프 탐방,
20104 도올 김용옥, 도마복음한글역주3권 출간.

 

 

영혼의 사투라고 해야 것이다. 한 줄기의 빛도 아니 보이는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죽도록 달렸다. 여기 도마복음이 말하는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결코 종말론적인 것들이 아니지만 이것을 기술하는 나의 심정, 그 심정을 전하는 붓끝 한 순간 한 순간의 움직임이 모두 종말론적이었다. 우리의 생애의 모든 순간이 종말론적이라는 불트만의 명제를 털끝으로 느끼며 붓을 움직여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동방고전한글역주대전이라는 방대한 한문고전의 주석작업에 매달려있다. 치열한 그 시간표 속에서 희랍어ㆍ콥트어ㆍ독일어ㆍ영어의 방대한 문헌의 세계를 따로 더듬어야 하는 도마역주작업은 나에게는 감내하기 어려운 하중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는 지난 연말에 탈장수술을 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또 극심한 치통을 겪어야만 했다. 내 생애에서 거의 최악의 건강상태에서 약 두 달 반 동안 1,500매의 원고를 긁어대는 이 붓의 질주는 지구 종말의 벼랑끝에 서있는 어느 광인의 난무(亂舞)와도 같았다. 지금 쓰지 않고 이 붓길을 포기하고 만다면 나의 생애에서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는 삶의 자리가 되리라는 예감은 너무도 역력했다. 미완의 원고를 세업(世業)으로 쌓아 온 나의 죄목에 하나의 미완고가 더 붙게 되면, 스틱스 강의 뱃사공 카론에게 아무리 두둑한 금화를 건네주어도 나를 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그런 불명예가 집필의 동기는 아니다. 중단하기에는 너무도 찬란한 진주들이 도마의 밭 속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빛은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양심의 호소였다. 정밀한 카운트방식이 다시 필요하겠지만, 도마복음서 114개의 파편 중에서 47개가 마가복음에 병행하며, 40개가 큐복음서에 병행하며, 17개가 마태복음에, 4개가 누가복음에, 5개가 요한복음에 병행하는 것으로 카운트되고 있다(Funk & The Jesus Seminar, The Five Gospels 15). 그러나 실상 114개 어느 하나도 기존의 복음서와 관련 아니 되는 것은 없다. 더구나 큐복음서의 핵심이 다 포섭되어 있다. 그러니까 도마복음의 주석은 단순히 도마라는 새로운 자료의 주석이 아니다. 기존의 복음서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지식의 풍요로운 황금광맥의 집결체가 바로 도마복음인 것이다.

 

이 도마의 로기온자료가 기존의 정경 4복음서 (대략 AD 70년부터 AD 100년 사이에 집필됨)보다 앞선 자료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그 크로놀로지는 전도될 길이 없다. 사계의 거장들이 이 도마는 AD 50년 전후에 성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Helmut Koester, Stephen Patterson, Stevan Davies, John Dominic Crossan, and the Fellows of the Jesus Seminar). 그러나 서구신학계에서는 아직 이 도마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기존의 복음서를 분석하는 일을 감행하지 않는다. 왜냐? 도마라는 새로운 잣대를 들이대면 기존의 수치가 모두 달라져서 거대한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이다. 실상 도마는 아직도 이집트 나일강 상류 절벽 항아리 속에서 잠자고 있다.

 

나는 성북동 한양성곽에 맞대어 자리잡고 있던 보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키가 삐죽 크고 희멀건한 얼굴에 흐릿한 눈동자의 미소를 머금은 특이한 모습을 하신 분이 독일어 선생님으로 부임하셨다. 독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분이라는 것이다. 그때 보성학교는 서원출 교장이라는 걸출한 교육자가 기틀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훌륭한 교사들이 많았다. 이 독일어 선생님이 바로 불트만과 예레미야스의 제자인 허혁 선생님이었다. 20세기 대한민국에서 허혁처럼 독일신학을 치열하게 흡수한 사람은 없다. 그와 동급의 큰 인물로서 우리가 안병무 선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안병무 선생은 독창적 사유가 풍요롭고, 학문하는 스타일이 한국의 억압받는 민중의 현실에 촛점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매우 포섭적이었다. 그러나 허혁 선생은 독일신학의 본류에 정통하고자 하는 치열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독일신학계의 학문 수준을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다면 그 학문의 실상을 정확히 흡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학자들의 일차적 소임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독일신학의 대표적 저작들을 고증학적으로 접근하였다. 내 인생에 번역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 분도 바로 허혁 선생님이었다.

 

번역에 기초하지 않는 편린적(片鱗的) 날림발언은 모두 개구라에 불과하다고 일갈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의 석학이 일개 고등학교 독일어선생님으로 부임한 데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다. 사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회피하겠으나, 허혁의 학문은 당대 한국의 신학계에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이 이단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그의 개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고등한 비쎈샤프트(Wissenschaft)의 선진적 방법론이 신앙에 적용되는 것을 한국의 교계는 두려워했던 것이다. 허혁 선생께서 매달린 불트만만 해도 실상인즉슨,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옹호하는 사람인데, 아직까지도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서 그는 마치 이단처럼 취급되고 있다. 허혁은 신학대학의 교수로서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결국 보성학교에서 주는 교직이라도 감사히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허혁과 도올의 인연이 싹트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허혁 선생이 독일어 수업을 하러 들어오셨는데 불쑥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선생님은 그래 겨우 고작 우리 독일어 가르쳐 주려고 그 어려운 독일유학을 하셨습니까?”

 

나도 참 어처구니없이 당돌한 학생이었다. 이런 나의 질문에 허혁 선생께서 무어라 답했겠는가? 허혁 선생은 그냥 미소만 짓고 말았다. 교외별전(敎外別傳)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나 할까?

 

그 뒤로 나는 신학대학을 가려고 했다.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사람이 허혁 선생님이었다. 그때 허혁 선생님은 신학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신 후였다. 그로부터 나와 허혁 선생 사이에 약 6개월 동안 많은 편지가 오갔다. 나의 편지는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나는 신학대학에 가서 정말 위대한 신학자가 되려고 하는데 우리 부모는 내가 돌팔이 목사가 되고 말 것을 걱정하시오니, 우리 부모를 좀 설득시켜 주시옵소서.” 나의 편지로 인하여 허혁 선생은 나의 장형 김용준을 알게 되었고 그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허혁은 실제로 나의 신학대학행()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서울에 올라가서 그를 만나뵈었을 때 그 분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용옥아! 학자가 된다는 건 말이지, 정말 수도승이 될 각오가 없으면 안돼. 정말 하루하루 딴 생각 말고 지독하게 책 보고 글 쓰고 해야 한단다.

 

 

허혁은 정말 지독하게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번역한 독일신학의 대저들은 지금 어느 누구도 번역의 엄두를 못내는, 희랍어가 빽빽하게 들어가 있는 치열한 저작물들이다. 당대 그 많은 헤비급 신학서들이 허혁 선생에 의하여 번역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나는 수유리 한국신학대학에 있을 때 이미 도마를 접했다. 접했다고 해야 이름만 접한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하바드 디비니티 스쿨에서 청강할 때, 헌 책방에서 더 래핑 세이비어(The Laughing Savior)(웃는 구세주)라는 책을 한 권 사두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도마복음에 관한 책들이 희귀했다. 이 책은 존 다트(John Dart)라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신문사의 종교기자가 나그함마디문서의 발견 경위와 그 의의를 서술한 책이다. 매우 드라마틱한 르포인데 모든 이야기가 아주 흥미진진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돌아와 절차탁마대기만성이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나그함마디문서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1983년 겨울의 일이었다. 그 후 내가 중앙일보사의 후원으로 나그함마디 지역을 세밀히 탐사하고 팔레스타인·레바논ㆍ시리아·터키ㆍ요르단 지역을 모두 두발로 다니면서 관계된 자료를 수집하고 그 결과를 일요판 신문인 중앙선데이에 연재한 그간의 사정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도마에 얽힌 나의 사연은 십대로부터 육십대에 걸치는 기나긴 생의 여로이다. 장자에 보면 인간이 천지간에 태어나서 유한한 몸뚱아리를 기탁하는 시간은 천리마가 문풍지 사이로 휙 달려 지나가버리는 홀연한 순간과도 같다는 기막힌 표현이 있다[託於无窮之間, 忽然无異騏驥之馳過隙也]. 기독교가 2천 년 동안 인간세에 화려한 족적을 남겼다고 하지만 그 역사는 어쩌면 문풍지 틈 사이로 지나가버리는 천리마의 모습과도 같을지 모른다. 무궁한 천지의 시간에서 본다면 찰나의 영화요, 순간의 기쁜 소식이다. 예수의 천국운동도, 바울의 부활 케리그마, 황제숭배교화 되어버린 가톨릭의 성세도, 루터ㆍ츠빙글리ㆍ칼빈의 종교개혁도, 정약용의 매부인 베드로 이승훈 이래의 한국가톨릭의 역사나, 언더우드ㆍ아펜젤러의 선교사업으로 시작된 한국개신교의 역사가 모두 문풍지 사이를 스쳐가는 천리마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순간의 허상과 허세에 그다지도 확고한 영원성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동포들의 문제의식 속에는 안타깝게도 진리에 대한 역사성의 성찰이 부재한 것이다. 모세오경을 초라하게 만드는 피라미드의 위용도 지금은 저열한 관광상품이 되어있을 뿐이라는 인간세의 성쇠를 그들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지금 저 피라미드보다도 더 높은 반석 위에 우뚝 솟아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인류의 20세기에서 가장 화려한 선교의 역사를 과시할지라도, 그 절정의 위세는 조선역사의 기나긴 역정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필연적 진로를 가능케 한 힘이 숨겨져 있다. 기독교인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役事, 에네르게오)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다. 사람의 역사야말로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사역이 항상 절정에 이르면 벌하시게 되어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많은 측면에서 조선민중에게 긍정적인 역사를 과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류사의 모든 종교형태의 죄악이 집결된 최악의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광신, 독선, 배타, 강압적 전도, 권력과의 결탁, 세속적 부의 축적, 관용의 부재, 성직의 세습, 오만, 약자에 대한 저주, 빨갱이 타도 선동, 분열조장, 우상타파, 광열적 선교로 인한 타 문명의 파괴 등등 인류가 종교를 통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업과 만행을 다 포용하고 있다. 사찰에 휘발유를 끼얹거나 단군상을 불태우는 것쯤은 다반사이며, 도올의 고등한 학문적 표현인 요한복음 강해가 EBS에서 탈락되게 만들고, 도마복음 주석이 중앙SUNDAY 연재에서 중단되도록 압력을 넣는 일쯤은 식은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나는 길거리를 다니면 누구보다도 불특정의 대중으로부터 인사를 많이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요일 동네의 교회에서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인파가 나를 스치게 되면, 몇 년을 수군거리면서도 단 한 명도 나와 눈을 마주치거나 인사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사는 집 근처에도 무슨 대학선교단체가 있는데 성경을 끼고 우리집 앞을 지나다니는 젊은이들이 나에게 부드럽게 인사 한번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인사를 건넬 눈길조차 주질 않는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일까? 나도 한때 신학대학을 다닌 사람이요, 목사 후보가 되었던 사람이요, 가산을 탕진해서 다 교회에 바친 집안의 자식이다. 그리고 그들이 신주처럼 모시는 성경에 관하여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지식이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도대체 내가 언제 이토록 회피와 기피의 대상이 되는 왕마귀가 되었는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나를 아무리 질타의 눈으로 바라본다 할지라도, 나는 니체처럼 불행해질 일은 없다. 기독교가 아무리 광란의 춤을 추어본들 그것은 본격적으로는 100여 년의 역사밖에 지니지 못하는 이방문화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기독교라는 문제를 내 생애에서 방관하기만 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이미 우리화되어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미 이방종교가 아니라 자방종교가 되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부활사건이 아니라 조선금수강산의 부활사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의 내재적 문제로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나를 열렬한 기독교신앙인으로부터 동방의 초탈한 예지의 추구자로서 변모시킨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서물이 20대 초반에 접한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이라는 책이다. 노자의 충격은 진실로 컸다. 그런데 이것과 똑같은, 아니 그 강도가 더 강렬하면 강렬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충격을 나는 도마로부터 받았다. 내가 신학대학을 떠나면서 풀지 못한 숙제들, 그 산적한 인생의 과제들이 이 도마를 계기로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니체는 발악을 해야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도마는 기독교의 심장 속에 들어있다. 그리고 도마는 기독교를 그 심장부로부터 서서히 해체시킨다. 바울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도마는 기독교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문풍지 사이로 지나가는 그 양천 년의 기독교, 그 전체를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만든다. 기독교야말로 이제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칼하게도 바울의 부활과 재림케리그마를 포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초자연적 모든 사태를 내면화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한 대부정이 없이는 대긍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많은 자들이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깔깔대고 웃을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은 훗날 그들이 외칠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선지자였소!”

 

많은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나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할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뜻있는 신학자들이 나의 편에 서있다. 그들은 나의 작업이 불편한 진실이지만 한국기독교의 명운(命運)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필요한 사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집필과정에서 두 번씩이나 서대문 감리교신학대학 대강당에서 성대한 신학토론회를 열어주신 이정배 교수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정배 교수 주변에 있는 많은 신학자들의 격려에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내가 한국기독교의 루터와 칼뱅역할을 톡톡히 해내리라고 믿으시면서 항상 정신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김경재 교수님, 그리고 나의 독창적인 사유를 마음놓고 더 자신있게 내어 놓으라고 권유하시는 유동식 선생님, 그리고 감리교신학대학 대강당을 메웠던 많은 진지한 신학대학 학생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나의 이 한 권의 주석서가 오로지 나의 작품으로서 기억되기보다는, 이 시대의 세계지성들의 연구성과라는 것과 그리고 이 연구성과야말로 한국의 기독교를 만들어가는 미래 조선신학도들의 자산이라는 사실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도마복음의 내용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이토록 명료하게, 모든 가능한 출전을 밝혀가면서 해설한 사례는 현재 세계학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는 젊다. 예수는 끊임없이 방랑한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예수(The Living Jesus)’의 평화와 사랑과 건강의 복음을 전한다.

 

 

2010221

일요일 오전 1153

낙송암에서 탈고

 

 

2007511일 감신대 신학대토론회의 열띤 현장. 한국조직신학회 주최로 열린 이 토론회의 주제는 한국교회와 성서였다. 참석자는 도올 김용옥 이외로 김광식(전 연세대, 전 협성대 총장),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김준우(감신대 교수), 김은규(성공회대 교수), 이정배(사회자, 감신대 교수), 유동식(연세대 명예교수), 2차 신학대토론회는 같은 장소인 감리교신학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중강당에서 2008527일에 열렸다.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연구소와 한국신학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가 공동주최했는데 토론주제는 큐복음서와 한국교회였다. 참석자는 도올 이외로 이정배(감신대 교수), 김명수(경성대 교수), 유태엽(감신대 교수), 채수일(한신대 총장), 두 번 토론회가 모두 3시간씩 진행되었는데 천여 명의 관중이 좌석을 뜨지 않고 토론에 집중하였다. 누구든지 참석할 수 있는 공개된 자리였다는 의미에서 모두가 한국교계 지성인들의 높은 수준을 과시하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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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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