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마가복음과 도마복음
예수의 비유가 과연 천국의 비밀일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서의 대표적인 비유이다. 마태·누가의 비유는 마가의 비유를 원자료로 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의 비유보다 더 오리지날한 한 조형이 도마복음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사실이 밝혀져 신학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예수의 비유에 예수가 직접 주석을 달 수는 없는 것이다.❞
제9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보라! 씨 뿌리는 자는 나갔다. 한 줌의 씨를 손에 가득 쥐고 그것을 뿌렸다. 2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3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이삭을 내지 못했고, 4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기운을 막았고 벌레가 삼켜버렸다. 5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육십 배, 그리고 백이십 배의 결실이 되었느니라.”
1Jesus said, “Look, the sower went out, took a handful of seeds, and scattered them. 2Some fell on the road, and the birds came and pecked them up. 3Others fell on rock, did not take root in the soil, and did not produce heads of grain. 4Others fell on thorns, and they chocked the seeds and worms devoured them. 5And others fell on good soil, and it brought forth a good crop. It yields sixty per measure and one hundred twenty per measure.”
감격이다! 도마복음에서 그 유명한, 공관복음서의 대표적인 비유로 꼽히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The Parable of the Sower)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감격이 아니고 무엇이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가(4:3~8), 마태(13:3~8), 누가(8:5~8)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공관자료(synoptic materials)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에만 공통으로 나타나는 큐복음자료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중에서는 물론 마가자료가 조형(祖型)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은 도마와 마가가 된다. 마가복음과 도마복음을 같이 펼쳐놓고 비교해보면 도마복음이 마가복음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도마 → 마가 → 마태ㆍ누가), 이것은 나 도올의 사견이 아니라 예수의 비유를 연구하는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마가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예수의 말씀을 도마에서 발견한다는 이 사실! 도마에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라는 구절이 있으나, 마가에는 이 구절이 ‘흙이 얇은 돌밭’으로 변형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는 도마의 원문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마가의 설명부분【막 4:5~6.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을 생략해 버렸는데, 이 설명부분은 도마에도 없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누가가 도마의 원형을 더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도마와 마가, 양자를 비교해보면 우선 도마자료에는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었다(Jesus taught them many things in parables)’는 설명조의 도입부분이 없다(막 4:2). 다시 말해서 예수의 말씀이 ‘비유’라고 객관화되어 규정되는 개념적 소외가 없다. 곧바로 예수는 말했을 뿐이다. 그것이 ‘비유’라고도 규정되지 않는다. 마가는 왜 애초에 이것을 ‘비유’라고 규정했을까? 그 해답은 예수의 말씀이 끝난 후에 부가된 설명에서 명백해진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막 4:11~12).
남이 쉽게 알아들어 깨닫지 못하게 하고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비유로 말하는 이유라고 하는, 좀 야비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런 말을 예수 입으로부터 듣는다는 것은 도무지 껄끄럽다. 여기 이미 특수집단의 폐쇄성이 전제되어 있다. 즉 제자집단과 외인집단의 이원성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비유는 전자에게는 열려있지만 후자에게는 닫혀있다. 그러므로 특수한 예수의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
▲ 천정의 한 부분인데 클레오파트라의 최후의 순간을 조각해 놓았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당하자 삶을 구걸하지 않고 독사에게 물려 생애를 마감한다. 클레오파트라는 한때 이 땅의 주인이었다.
예수는 원래 비유로 말하기를 좋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비유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왜냐? 그것은 어린아이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너무도 명백하고 단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알아들으라고 말한 것이지 알아듣지 말라고 비유로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비유는 예수의 많은 로기온자료 중에서도 가장 예수의 생생한 육성을 전하는 오리지날한 자료로서 정평이 있다. 예수의 비유는 어떠한 유대교 전통의 지혜문학이나 어떤 랍비의 교설에 비교해보아도 그 단순명료한 강렬함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예수의 비유는 그 비유를 통하여 딴 말을 하고자 하는 알레고리가 아닌 것이다. 비유의 전승은 우리를 역사적 예수에게로 가깝게 데려간다. 너무도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라도 ‘네, 바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휘몰아간다.
그러나 예수의 사후, 이미 10년 안에 벌써 이 비유들은 어떤 천국의 비밀을 간직한 비의적인 사태로서 신비화되기 시작하였고 교회 내부의 사람들과 외부의 사람들을 이원화시키는 열쇠처럼 추상화되어 갔다. 마가복음의 기술만 해도 이미 완벽하게 기독론적인 해석(Christological interpretation)을 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종말론적인 톤(eschatological tone)도 같이 깔려 있다. 마가복음에 수록된 예수 자신의 해설을 들어보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막 4:14). 씨와 말씀이 개념적으로 대응된다.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사탄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교회라는 공동체를 수용한 사람과 그 수용자를 박해하는 사탄(Satan)이 이원적으로 대립되고 있다. 결국 예수의 씨 뿌리는 자의 평화로운 비유가 사탄과의 대결이라는 긴박한 사태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를 비유한 것이다.” 이것도 이미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묵시적 경고와 별 차이가 없다. 기독교공동체의 사람들에게는 환난과 핍박이 있게 마련이며, 이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뿌리가 뽑히는 자들의 모습이 이러하다는 것이다. 즉 초기교회공동체에 대한 변절이나 배반에 대한 경고가 들어있는 것이다.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망이 들어와 말씀이 가리워 결실치 못하는 자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인욕(人欲)의 대립관계를 설정하는 바울신학적 해석이 들어와 있다.
예수의 비유가 과연 마가가 제시하는 이러한 해설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 도마는 ‘해석’은 읽는 자들이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라 했다(Th.1). 그러나 벌써 마가복음만 해도 예수의 비유의 해석이 마가복음서 기자에 의하여 독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브레데의 ‘메시아비밀’과는 또 다른 차원의 마가복음의 문제점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이러한 문제를 ‘알레고리화(allegorization)’라고 부른다【『도마복음한글역주』 제3권 제65장 역주에서 상설함】, 도마복음서에 일체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도마복음서의 오리지날리티를 확보하는 것이다.
▲ 북만주의 흑룡강성은 비옥하다. 흑룡강의 흑룡을 닮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땅이 검다. 북만주 산시(山市)에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순국지를 가는 길에 내가 찍은 사진이다. 김을동 의원이 산시에 김좌진 장군의 유적지를 보존해놓은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한 조선족 여인이 풍요로운 옛 발해 땅에 씨를 뿌리고 있다 (2005년 4월 촬영).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씨처럼 자라나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자신의 비유를 직접 해석하는데, 그 해석은 기독론적, 종말론적 상황에 이미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에는 그러한 선ㆍ악의 이원론적 전제가 없다. 길에 떨어진 씨를 새가 쪼아먹는다고 새가 악마일 수는 없다. 그것은 자연이다. 그것도 우리의 천국체험의 중요한 요소이다. 천국은 자연의 과정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밖에 없는 기다림 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제9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보라! 씨 뿌리는 자는 나갔다. 한 줌의 씨를 손에 가득 쥐고 그것을 뿌렸다. 2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3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이삭을 내지 못했고, 4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기운을 막았고 벌레가 삼켜버렸다. 5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육십 배, 그리고 백이십 배의 결실이 되었느니라.”
1Jesus said, “Look, the sower went out, took a handful of seeds, and scattered them. 2Some fell on the road, and the birds came and pecked them up. 3Others fell on rock, did not take root in the soil, and did not produce heads of grain. 4Others fell on thorns, and they chocked the seeds and worms devoured them. 5And others fell on good soil, and it brought forth a good crop. It yields sixty per measure and one hundred twenty per measure.”
우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궁금한 것이 많이 있다. 농부가 어떻게 씨를 뿌리길래 씨가 사람이 다니는 길에도 떨어지고 바위 위에도 떨어지고 가시덤불에도 떨어진단 말인가? 비행기로 씨를 뿌리거나 대형선풍기로 산 위에서 흩날린다면 모르되, 우리의 농경상식으로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귀한 씨를 받을 갈아엎은 후 이랑을 파서 그곳에 살살 뿌리고 덮을 것이지 왜 그토록 아무데나 막 뿌리는가? 『예수의 비유』라는 희대의 걸작 신학서를 남긴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상세한 답변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보고 예수의 비유의 현실성을 확인했다.
▲ 예수가 돌항아리 여섯 개의 물을 다 포도주로 만든 혼인잔치의 현장 가나(Cana)의 모습이다. 저 돌밭을 보면 예수의 비유의 리얼리티가 느껴질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름진 로마의 빵바구니 베카벨리. 바알베크신전의 하부구조를 이룬다. 이곳에 떨어진 씨는 120배가 아닌 천배 만배의 수확을 얻을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사람이다. 그리고 젊었을 때 목수생활을 했다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갈릴리는 화산지역이라서 제주도 같은 현무암지대이다. 대부분의 땅이 척박한 돌밭이다. 우리나라 황토흙밭의 농사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감각으로 말하자면 화전민농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팔레스타인 농사법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방식이 아니라 씨를 먼저 대충 뿌리고 난 뒤에 밭을 갈아엎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길과 가시덤불과 돌과 밭이 구분이 안되는 야전에 대충 씨를 뿌리고 쇠스랑으로 대충 덮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비유의 정당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팔레스타인 농사법에 기초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비유로서 매우 중요한 인간의 상황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만약 요즈음의 우리 농사법과 같이 정밀하게 어떠한 예기되는 목적을 위하여 농부의 관심이 집중되고 행동되고 있다고 한다면, 다양한 인간의 상황을 포괄할 수 있는 비유도 생겨나지 않을 뿐 아니라, 비교적 가치의 강렬함이 돋보일 수가 없다. 획일적 원인에 대한 획일적 결과만 수반되는 농사는 결코 우리 삶의 과정일 수가 없다.
농부는 무심코 씨를 뿌린다. 길에도, 바위 위에도, 가시덤불 위에도, 좋은 땅에도, 이 네 가지 상황은 모두 인간의 상황이다. 물론 앞의 세 상황은 좌절의 상황이고 마지막 한 번만이 성공의 상황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의 고뇌가 없이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 ‘아버지의 나라’는 좌절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성공만 보장되는 그러한 인간상황이 아닌 것이다. 첫 번째 길의 상황에는 새가 쪼아먹는다. 두 번째 돌의 상황에는 뿌리를 못 내린다. 세 번째 가시덤불의 상황에는 성장이 방해되며 벌레가 먹어버린다. 네 번째 좋은 땅의 상황에는 60배, 120배의 풍요로운 결실이 보장된다.
이 언어를 분석하면 1) 씨 2) 행위자 3) 자연적 인과라는 세 요소의 복합적인 교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의 상황에는 새라는 행위자, 제2의 상황에는 단순한 자연적 인과, 제3의 상황에는 자연적 인과와 벌레라는 행위자가 복합되어 있다. 그리고 제4의 상황도 완벽한 자연적 인과이다.
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평심(平心)하게 분석해보면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사탄이라든가, 핍박과 환난이라든가, 유혹과 욕망이라는 부정적이고 인위적인 요소의 개입이 없다. 땅에 떨어진 씨를 새가 쪼아먹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적인 사태이며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 새가 악마일 수는 없다. 벌레가 먹든, 뿌리를 못 내리든, 모든 것이 자연적 과정(natural process)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행위의 주체자는 역시 씨 뿌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씨 뿌리는 사람은 씨를 하나의 전일한 목적을 위해서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 다른 상황에 씨를 뿌리고, 네 가지의 다른 반응을 체험한다. 그런데 이 반응은 중립적(natural)이며 자연적 인과에 의한 것이다. 새가 먹는다든가 뿌리를 못 내린다든가 벌레가 먹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든가 사악할 건덕지는 아무 것도 없다. 바위에 떨어진 씨가 결실을 못 맺는 것도,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풍요로운 수백 개의 결실을 맺는 것도 모두 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늘 나라는 결국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삶의 과정이다. 바위에 내린 씨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좌절을 체험함으로써, 좋은 땅에서 결실을 얻는 기쁨을 맛보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비유의 표현구조는 여지없이 기대의 구조를 뒤엎고 묵시론적 세계를 파기한다. 예수운동의 좌절이나 배척받음의 쓰라린 경험은 사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실패와 좌절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풍요로운 수확을 기다려야 한다.
여기에서는 선ㆍ악의 이원론이나 천당과 지옥의 대결이 없다. 결국 씨 뿌림에는 풍요로운 결실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자연론적 낙관주의가 숨어있는 것이다. 삼중의 실패는 삼중의 성공을 보장한다. 예수의 비유는 상상력이 넘치고 기지가 뛰어나며 통찰로 가득하다. 그것은 피안에 있는 초월적 세계의 선포가 아니라 자연의 인과 속에 있는 혁명이다.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 즉 아버지의 나라는 묵시나 계시를 통하여 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일상적 체험의 관찰을 통해서 획득되는 시적 메타포이다. 신앙이란 피안의 세계에 있는 초월적 존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씨 뿌림의 체험을 통하여 성취되어가는 연속적 과정이며 기다림이다. 여기 모든 악조건 위에 뿌려지고 있는 씨야말로 ‘천국의 임재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 모든 씨가 바로 천국인 것이다. 모든 씨가 결국 자라나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다림의 인내가 우리 신앙의 본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예수는 이 세계를 불사르고 싶었던 혁명가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이전에 이미 이 세계를 혁명코자 했던 역사적 인물이 있었다. 예수는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바로 세례요한이었다. 내가 서있는 이 곳은 바로 세례요한의 목이 잘린 마캐루스 성채이다. 사해위로 석양의 태양이 이글이글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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