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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4장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 콘스탄티누스의 교활한 삶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4장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 콘스탄티누스의 교활한 삶

건방진방랑자 2022. 2. 28.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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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교활한 삶

 

 

콘스탄티누스310년 자기 아내의 아버지였던 선제(先帝)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를 죽였다. 2년 뒤인 312년에는 아내의 오빠인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밀비우스 다리에서 무찔러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다리밑 테베레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한 시체를 다시 참수하여 그 대가리를 창끝에 꽂고 로마에 입성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결정적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밤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현몽하여 승리와 그 모든 것을 예시하였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325년에는 자기 이복누이의 남편인 정제(正帝) 리키니우스(Licinius)를 전투에서 무찔렀다. 리키니우스는 제위의 상징인 보라색 망토를 벗고 콘스탄티누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일개 야인으로 은퇴하여 누이동생과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는 선심 쓰는 척 처음에는 리키니우스에게 데살로니카에서 은퇴생활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1년도 못 되어 반란음모를 구실삼아 그를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시켜버렸다.

 

뿐만 아니다. 기독교를 공인하고 예수의 복음을 온 천하에 선포한 그가, 자기를 황제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탁월한 장수였던 친아들, 부제(副帝) 크리스푸스(Crispus)를 어느날 갑자기 체포하여 이스트라반도 끝에 있는 풀라의 감옥으로 극비리에 호송해버렸다. 그리고 가혹하기 그지없는 고문과 심문을 되풀이했다. 그는 로마제국의 제2인자인 황제였다. 로마에서는 노예가 아니면 자백을 끌어내는 수단으로 시민을 고문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크리스푸스는 믿고 따르고 충성을 다 바쳤던 아버지에게 무죄를 주장했지만 가혹한 고문으로 처참하게 죽어갔다. 29세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뒤주간에 갇힌 사도세자보다도 더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다. 어차피 피장파장이겠지만 영조는 그래도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경모궁(景慕宮)을 지어주었다. 노론 소론 싸움의 제물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들을 악랄하게 죽였고 입다시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무엇을 자백받으려 했을까?

 

바로 자기 둘째 부인 파우스타(Fausta)와의 불륜이었다. 크리스푸스는 첫째 부인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크리스푸스에게는 파우스타는 계모였다. 파우스타는 선제 막시미아누스의 딸이며, 남편이 자기 아버지와 오빠를 죽이는 권력투쟁의 가슴아픈 세월을 20년이나 견디며 아들을 셋이나 낳아주었다. 현숙한 여인이었다. 열 살 정도 아래의 전처 소생, 크리스푸스와 정말 정을 통했을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가슴을 조이며 권력의 뒤안길에서 현숙하게 살아가는 중년부인 계모에 대한 애처로운 가슴은 크리스푸스에게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죄를 절규하는 크리스푸스의 마지막 항변이 어두운 감옥의 돌벽에 메아리쳤을 때 황후 파우스타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파우스타가 무심코 황궁 안의 가족전용의 김이 자욱한 욕실에 들어갔을 때 문이 철커덩 닫혔다. 그리고 끓는 물은 계속 퍼부어졌다. 황후 파우스타는 목욕하다가 사망했다고 공표되었다. 이 악랄한 살인의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친아들이지만 스물두 살밖에 차이지지 않는 크리스푸스는 황위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우스타가 낳은 세 아들이 이미 유아기를 지나 황통의 확고한 계승자로서 엄존했기 때문에 두 사람을 싹 쓸어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것이 제13 사도, 교회사에서 최고의 성자로 추앙받는 콘스탄티누스의 교활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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