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와 크리스챤
우선 해외동포 유대인들은 당연히 바울이 선포하는 십자가 예수의 복음 그 자체를 보수적 유대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즉 예수는 유대교가 대망하던 메시아니즘의 한 성취일 뿐이므로 기독교는 유대교내의 새로운 운동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독교를 유대교화하려고 했다. 이들을 교회사에서는 유대화파(Judaizers, Judaizing Christians)라고 편의상 부른다. 이 유대화파의 주장이 추상적 논변에 머물면 그 나름대로 참아줄 수도 있겠지만, 유대교 자체가 율법종교이기 때문에 이들은 구약의 토라(Torah)나 미쉬나(Mishnah, משנה)가 요구하는 모든 율법을 누구나 일상적 삶 속에서 엄숙하게 지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가 유대인 커뮤니티에 한정된다면 모르겠지만 새로운 기독교의 복음을 듣고 교회로 찾아오는 이방인들에게 강요된다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다. 한국교회에 찾아오는 미국의 서양인들에게 한번도 안 먹어본 김치를 퍼멕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악랄한 인권침해였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율법이란 전혀 낯선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인 엑클레시아(골 1:18, 24, 엡 1:23, 5:23)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네의 전통적인 시나고그(Synagogue, 회당) 정도로 생각했다. 따라서 자기네 시나고그에 이방인이 신자랍시고 끼웃거리거나 설치는 꼴을 눈꼴 사납게 바라보거나 경멸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 할례였다. 그 외로도 안식일의 고수와 그에 따르는 유대교 제식의 엄수, 요즈음에도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코셔음식(kosher foods)의 선별적 식음방법, 그리고 유대인 명절의 지킴 등등이 요구되었지만 가장 상징적인 것은 ‘할례’(Circumcision)였다. 할례란 남성의 성기의 표피를 돌칼로 으깨거나 칼로 도려내어 귀두를 노출시키는 수술인데 이방인들에게는 아프기 그지없고 수치스럽기도 하고, 또 항생제가 없었고 위생시설이 형편없었던 과거시절에는 감염의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에 죽거나 한참을 고생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아브라함이 신과의 약속으로 실행한 것이며 모세의 율법인 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들의 커뮤니티의 멤버십을 획득할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 할례라는 ‘이니시에이션 세리모니’(initiation ceremony,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으면 ‘크리스챤 아이덴티티’(Christian identity)가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입장에서 보면 크리스챤 아이덴티티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 할례를 내세울 수는 없었다. 더구나 할례를 이방인에게 필수 통과의례로서 강요한다면 기독교의 선교는 불가능했다. 바울의 서신에서 그토록 ‘할례’ 문제가 집요하게 주요논제로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체적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이러한 문제는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유대화파 사람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그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바로 이방선교가 유지되고 있는 그 토대를 근원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이 되고 만다. 바울은 현실적으로는 이럴 수도 없었고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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