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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45. 단장취의로 한시의 시풍이 바뀌다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45. 단장취의로 한시의 시풍이 바뀌다

건방진방랑자 2021. 10. 29.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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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취의로 한시의 시풍이 바뀌다

 

 

한문에는 관습적으로 한 부분만을 인용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풀어내는 단장취의(斷章取義)’의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어느 한 부분만을 인용하여 그 의미를 풀어내고 거기에 자신의 주제를 강화하는 용도로 쓰곤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할 때의 문제점은 전체내용이 아닌 부분의 내용으로 전체내용을 왜곡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글이란 게 쓰다 보면 여러 예시도 들어가고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반대되는 말도 하게 마련이다. 나의 글에도 여러 부분에 빨갱이란 단어들이 들어 있는데 누군가 그 부분만 딱 떼어내어 건빵은 빨갱이를 싫어하는 반공주의자다라고 한다면 엄청나게 억울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 맹자는 단장취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만장4에서 글자로 본문의 내용을 손상시켜서는 안 되고, 본문의 내용으로 맥락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독자의 생각으로 저자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이에 올바른 뜻을 얻게 된다[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以意逆志, 是爲得之].’고 강도 높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본래의 취지는 생각지도 않은 채 자신이 말하고자 의도에 무작정 갖다 붙이고 멋대로 해석하며, 마치 그걸 그 사람인 양 떠벌리고 다니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봤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도 언론에선 인터뷰한 내용을 맘대로 왜곡하여 자기 멋대로 부분 부분만 인용하여 사실을 반대로 전한 사례가 있었다. 목포에서 여러 채의 집을 사들이고 투기를 했다던 의혹을 받던 손혜원 의원을 비난하기 위해 그와 함께 일한 나전칠기 장인의 인터뷰를 왜곡한 것이다. 부분만 인용하여 마치 손혜원 의원과 함께 일하며 호되게 당한 것처럼 보도되었지만, 실상 그건 단장취의했기 때문에 생긴 왜곡에 불과했다.

 

 

 

 

 

一犬吠二犬吠 첫째 개가 짖으니 둘째 개도 짖고
三犬亦隨吠 셋째 개 또한 따라 짖네.
人乎虎乎風聲乎 사람 때문인가? 범 때문인가? 바람 소리 때문인가?
童言山月正如燭 아이가 말하네. “산달이 마치 촛불 같은데
半庭唯有鳴寒梧 뜨락에는 울어대는 찬 오동뿐이예요.”

 

소화시평권하 45을 읽으면서 왜 단장취의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냐면 바로 석루의 견폐(犬吠)라는 시를 인용하는 홍만종의 방식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 위의 시 전체를 인용하지 않고 전반부만 인용했다.

 

솔직히 나처럼 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전반부나 후반부나 별 다른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 ‘전반부만 인용했어도 내용이 확 와 닿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소화시평 전체엔 이런 식으로 시 전체를 인용하지 않고 부분만 인용한 사례들이 넘치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현종이는 당당하게 교수님에게 홍만종은 왜 전반부만 인용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현종이가 이 질문을 던지기까지 교수님도 이것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계기로 교수님도 이 시를 더 깊이 있게 보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재밌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건 바로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이며 홍만종이 어느 시풍에 더 관심이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시 송시
가슴으로 정을 느끼게 하는 스타일 머리로 뜻을 따지게 하는 스타일
그림을 지향하고 소리의 울림을 중시함 인위적인 것이 중심에 있음
감정이 자연스럽게 유로하는 것을 중시 생각이나 감정을 구도에 의해 안배하고 한 글자라도 안배에 힘씀

 

당시와 송시를 간단하게 도표화하면 위와 같은 차이점이 있다. 즉 심미적이고 감상적이며 풍경을 그려내는 시풍을 당시라 하고, 이지적이고 철학적이며 삶의 깨달음 같은 것을 담은 시를 송시라 한다. 그래서 당시는 마치 그림을 그려내듯 주변 환경을 묘사해내는데 반해 송시는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시로 써낸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見非常有理宜驚 비상한 걸 보고 이치가 있어 마땅히 놀라는데,
犬乎何事無爲吠 개야, 무슨 일로 하릴없이 짓는가?
吠固有意人不識 짖음엔 본래 의도가 있는데 사람이 알지 못하고서
說與兒童門速閉 아이에게 문 빨리 닫아라라고 말하는 구나. 石樓遺稿卷之一

 

이런 기본적인 지식으로 위의 시를 보면 분명해진다. 전반부는 누가 뭐라 해도 심미적이고 감상이며 절로 그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말은 곧 당시풍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여기에 인용되지 않은 후반부에 가면 개가 왜 짖는가?’에 대한 본질을 따져 들어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질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하릴없어 짖는 구나라고 폄하하며 겨우 한다는 소리가 얘야 문이나 빨리 닫아라!”라는 말이나 한다는 것이다. 즉 본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정황 속에 갇힌 채 주변만 나무라는 사람의 무지를 꾸짖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러니 후반부까지 가면 당시풍은 사라지고 송시풍의 철리(哲理)적인 내용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시풍을 좋아하는 홍만종의 관점에선 이 시는 분명히 좋은 시지만, 전반부만 인용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작용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게 바로 단장취의가 갖게 되는 한계라는 것이다. 전체 내용이 지닌 주제는 상관없이 내가 보고자 하는 방향대로, 또는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잘라내어 싣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게 되니 시 한 편에도 어느 곳을 어떻게 잘라 인용하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지 알게 되어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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