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호적조사
누가복음 제2장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이러한 언급은 매우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 집안의 불가피했던 행보를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가이사 아우구스도’(Caesar Augustus, BC 63~AD 14)는 바로 줄리어스 시이저(가이사)가 죽은 후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년경~기원전 30)와 로마를 양분해가졌던 옥타비아누스를 말한다. 안토니우스는 세기의 여인, 28세의 만개한 미모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 BC 69~30)를 바로 바울의 고향 다소(Tarsus)에서 만났고 그 순간부터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사로잡혀 결국 옥타비아누스에게 무릎을 꿇게 되는 끊임없는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덤으로 보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전체를 장악했고 그의 치세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옥타비아누스의 젊고(클레오파트라보다도 6살 연하) 강력하고도 유능한 리더십 아래서 점점 공화정체제에서 황제의 제국으로 변모해간다. BC 27년 1월 16일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만인을 초월한 존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BC 23년 호민관(tribunus) 특권을 장악하면서 그는 명실공히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태어난 시대가 가이사 아구스도 즉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전성시대였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로마 역사기록은 매우 자세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제국 전체에 호구조사(worldwide census)를 명한 사례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로마는 공화정의 전통을 가진 나라였기 때문에 그러한 발상이나 유례가 있을 수가 없었다. 단지 과세(taxation)를 목적으로 지방총독 명으로 해당 관할구에서 호구조사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탄생한 BC 4년경에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러한 호구조사가 행하여진 사례가 없다. 뿐만 아니라, BC 4년경에는 시리아(수리아)의 총독으로 구레뇨(퀴리니우스, Quirinius)라는 인물은 있지도 않았다. 사가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Jewish Antiquities)』 속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최초의 로마식 호구조사가 이루어진 사례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AD 6년의 사건이다.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라우스(Archelaus)를 골(Gaul) 지방으로 축출해버리면서 그가 지배하고 있던 영역인 유대(Judea), 사마리아(Samaria), 이두매(Idumea)를 시리아로 병합시켰을 때 과세를 목적으로 호구조사를 행하였던 것이다.
이때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퀴리니우스(Publius Sulpicius Quirinius)가 재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의 머리에선 이런 사건들을 ‘혼동했다’ 하기보다는 상상력 속에서 적당히 짜맞춘 것이다. 누가는 호구조사를 아주 평화스럽게 진행된 당연한 역사적 사건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실제로 호구조사는 유대인들에게는 엄청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사건이었으며 이 호구조사로 인해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5:37에 언급되고 있는 유다가 그 리더였는데 갈릴리 사람이 아니라 가말라(Judas of Gamala) 사람이었다. 그의 반란은 아주 강력한 대규모의 반란이었는데 로마 당국은 아주 가혹하게 철저히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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