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의 재해석
그리고 요한 시대의 그리스도 공동체를 괴롭힌 가장 큰 문제는 파루시아(Parousia) 즉 재림의 지연이었다. 곧 온다고 믿었던 예수의 재림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바울부터 ‘곧’ ‘곧’하던 그 ‘곧’이 벌써 반세기가 지나가버린 것이다. 재림의 지연에 대하여 ‘조금만 더 기다려라! 기다려라!’하던 초기교회 지도자들의 간증도 이제 맥이 풀리기 시작했다. 막연히 ‘곧’ ‘곧’ 하면서 기다리는 데 이제 신도들은 지쳐버린 것이다.
따라서 요한에게는 이러한 재림대망 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다. 요한은 암암리 로고스 기독론을 통해 예수의 지상에서의 사역(ministry) 그 자체가 이미 재림이고 재림의 의미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한의 관심 속에서는 중요한 것은 예수의 역사가 아니라 예수의 역사에 대한 해석의 지평이었다. 그 해석의 지평에 펼쳐진 예수의 생애, 그 역사는 전혀 공관복음의 직선적 구도를 따를 의무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요한이 성전정화라는 사건을 초장의 한 에피소드로서 제시한 것은 전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뒤엎음’이 예수의 반역의 결정적 죄목이 될 수도 없었고 또 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예수의 지상에서의 존재 그 자체가 이미 반역이었고 불화였고 혁명이었다. 그는 세상(코스모스)이라는 어둠으로 던져진 빛이었다. 빛은 어둠과 상극이다. 빛이 어둠을 비친다는 것은, 그 자체로써 이미 어둠의 파괴를 의미하는 사건이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가 자신의 땅으로 왔으나, 그곳 자신의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요 1:10~11)
마가, 마태, 누가가 모두 예수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Jesus entered the temple. 막 11:15, 마 21:12, 눅 19:45) 돈 바꾸는 자들의 탁자와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예수는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제사장 클라스가 아니기 때문에 성전에는 범접할 수 없는 갈릴리 촌사람일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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