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우스의 아타나시우스 탄압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를 지원하는 로마의 콘스탄스 황제가 암살되고(350), 그의 형 콘스탄티우스가 독존의 황제가 되면서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보복이 시작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콘스탄티우스는 선제가 내렸던 니케아 종교회의의 삼위일체에 관한 결정을 취소해버리고 동방교회의 대다수 주류파인 아리우스의 이념에 따라 새로운 가톨릭 통일정책을 세우려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동방교회의 일반정서를 존중하여 동방교회를 주축으로 가톨릭의 서방로마중심축을 전환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이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아리아니즘을 이단으로 휘몰면서 목숨걸고 투쟁해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러나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아타나시우스의 주교직을 박탈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하기 위해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시켜야 했는지는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 너무도 상세히 보고되어 있다. 아타나시우스를 파멸시키기 위한 예비조치로서 그를 지원하던 서방의 정통파 주교들이 모두 불명예스럽게 추방되었다. 이집트의 행정당국은 도저히 자체의 힘으로써는 아타나시우스가 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설득하거나 강요할 힘이 없었다.
콘스탄티우스는 급기야 북부이집트와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5,000명의 로마군단을 동원할 것을 이집트의 대공(大公) 시리아누스(Syrianus, duke of Egypt)에게 비밀리에 명한다. 356년 2월 어느날 밤, 지중해에 상륙한 5,000명의 군대는 완전무장한 채 알렉산드리아 시내 중심가로 신속히 입성한다. 아타나시우스가 성직자와 일반민중과 함께 야간미사를 행하고 있던 성 테오나스 교회(the church of St. Theonas)를 습격한다. 맹렬한 공격으로 성당 문이 열리고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주교와 사제들은 잔인한 모욕을 당했고, 봉헌된 성(聖)처녀들이 발가벗겨져 채찍질 당했고, 또 욕정에 굶주린 우악스러운 병사들은 여린 처녀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해버렸다. 부유한 시민들의 집이 약탈되었다. 종교적 열정이라는 가면 아래,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고 심지어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온갖 탐욕과 욕정, 그리고 사적인 원한을 마음껏 충족하였던 것이다(The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 423).
성 테오나스 교회가 시리아누스의 군대에게 습격받던 바로 그 긴 밤, 아타나시우스는 대주교의 의자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침착, 담대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노의 함성과 공포의 절규로 예배를 계속 진행할 수 없게 되자, 아타나시우스는 벌벌 떨고 있는 회중에게, 거만하고 믿음 없는 이집트의 폭군을 징벌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는 다윗의 시편 하나(아마도 136편: ‘에집트 사람들의 맏아들을 치셨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셨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를 암송케 하여, 그들의 종교적 확신을 표현케 함으로써 그들을 북돋았다. 마침내 문이 깨져 열리고 시편을 암송하던 회중들에게 화살이 구름처럼 쏟아졌다. 로마 병정들이 칼을 뽑아들고, 성소로 몰려갔고, 제단 주변에서 타고 있던 성스러운 촛불에 반사되어 군인들의 갑옷이 공포스럽게 번쩍거렸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를 에워싸고 있는 사제들과 장로들의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는 경건한 간구를 아직도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중의 최후 1인까지 안전하게 대피할 때까지 그의 교구의 책임있는 자리를 떠날 수는 없다고 버티었다. 밤의 어둠과 소란이 그의 탈출을 도왔다. 그러나 그는 허둥대는 인파에 밀려 땅바닥에 넘어진 채 의식과 행동력을 잃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불굴의 용기를 되찾아, 자신의 짤린 대가리를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가장 좋아하는 선물로서 바치고 싶어하는, 아리우스파 앞잡이들에 의하여 사주되고 있는 군인들의 맹렬한 수색을 용케 피해나갔다. 이 순간부터 이집트의 대주교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적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사막의 꿰뚫어볼 수 없는 안개 속에 감추어진 채 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The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 424~ 5).
나는 60년대 대학시절에 데모한다고 도바리치는 생활을 해본 적도 있고, 80년대 교수시절에 도바리치며 도망 다니는 학생들을 도와준 적도 있지만, 향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의 6년간의 삶은 박정희ㆍ전두환 아래서의 민주투사들의 ‘도바리’ 역정과 비슷했다. 황제의 칙령에 따라 전 군ㆍ민이 그를 추적했고 산 채로나 죽은 채로 그를 잡아오는 사람에게는 후한 보상금이 약속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국가의 적이었으며 그를 숨겨주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발표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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