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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부록 5.1. 순관과 역관의 왜곡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부록 5.1. 순관과 역관의 왜곡

건방진방랑자 2022. 3. 1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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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5.1. 순관과 역관의 왜곡

 

 

여기 논의되고 있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에 관하여서는 불교학계의 상이한 이해방식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정확하게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이라고 독립술어로서 규정되고 있는 개념은 한역(漢譯)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며 원시불교경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원시불교경전에는 순()ㆍ역()이라는 말이 형용사나 부사적 용법으로서 맥락적으로 주어지고는 있을지언정,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이라고 하는 술어가 명사적 독립개념으로서 잇슈화 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선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의 문제를 싯달타가 12지연기를 추론해 들어간 사고의 방향성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논의들이 있다. 대승의장(大乘義章)제사(第四)인연법(因緣法) 가운데는 두 개의 차제(次第)가 있다. 그 하나는 순()이요 그 하나는 역()이다. ()로부터 종()에 이르는 것을 순()의 차제(次第)라 하고, ()으로부터 시()에 이르는 것을 역()의 차제(次第)라 한다. 관법(觀法)은 다도(多途)하여 일정(一定)할 수 없다라 했는데 이것은 바로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을 사고추리과정의 방향성으로 규정한 좋은 예이다. 그렇게 되면, 무명(無明)에서 순차적(順次的)으로 노사(老死)에 이르는 사고의 과정을 순관(順觀)이라 규정케 되고, 노사(老死)에서 무명(無明)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을 역관(逆觀)이라 규정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에서 중요한 사실은 순()ㆍ역관(逆觀)의 문제는 유전연기(流轉緣起, 생성연기) ㆍ환멸연기(還滅緣起, 소멸연기)의 문제와는 별도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따르게 되면 유전연기에도 순관ㆍ역관이 성립하며, 소멸연기에도 순관ㆍ역관이 또한 성립하게 될 것이다.

 

고익진선생은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을 이러한 사고의 방향성으로 이해하고 원시불교의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즉 싯달타의 사고의 엄밀성과 과학성은 구체적인 노사(老死)의 현실로부터 역관(逆觀)으로 거슬러 추론해가면서, 나중에 무명에서부터 순관(順觀)으로 설명해 내려온 데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무명에서 연역적으로 추론해 내려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순관으로만 추론한다면 그것은 너무 독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붓다의 순관은 깨달음에 입각해서 생사의 발생과정을 밝혀주는 설명적 교설일 뿐이라는 것이다. 교양교재 편찬위원회, 佛敎學槪論(서울 : 동국대학교출판부, 1986), p.74. 이중표 교수는 이러한 논의에 입각하여 고제와 집제를 유전문의 역관과 순관으로 규정하고, 멸제와 도제를 환멸문의 역관과 순관으로 규정한다. 이중표, 근본불교(서울 : 민족사, 2002), pp.256~7.

 

그런데 고익진선생이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잡아함경12, 15, 그리고 증일아함경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에는 순관과 역관의 용어는 전무하며 그러한 문제의식조차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순관과 역관을 싯달타의 사고추리의 방향성으로 해석한 것은 단지 후대 교설의 한역술어에서 잘못 유추된 의미상의 와전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때 순관(順觀)따라 본다의 의미가 될 것이고 역관(逆觀)거슬러 본다의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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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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