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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부록 5.3. 연기는 시간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부록 5.3. 연기는 시간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

건방진방랑자 2022. 3. 1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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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5.3. 연기는 시간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

 

 

그러나 아누로마의 원래 의미는 그러한 사고의 방향성을 말한다기보다는 12지연기의 성격을 규정하는 말로서 해석되는 것이다. 즉 아누로마는 생하는 것을 따르는 순서라는 의미일 뿐이며, 파티로마는 그러한 아누로마의 생성의 순서에 대하여 역으로 소멸하는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역이라는 의미는 사고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순서에 대한 소멸의 순서라는 역전(逆轉)의 논리를 내포하는 것이다. AB를 생성시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A가 소멸되면 B도 또한 소멸될 수 있다고 하는 소멸의 역전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역()은 역설의 역이다. 아누로마의 아누는 오직 팟차야(paccayā, 연하여, 기대어)의 맥락에서, 파티로마의 파티는 오직 니로다(nirodha, 사라지므로, 소멸하므로)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三枝充悳, 佛敎入門(東京 : 岩派新書, 1999), pp.108~9. 전재성은 아예 아누로마의 아누를 인간의 욕망을 따라서로 파티로마의 파티를 인간의 욕망에 거슬리어로 해석하여, 아누는 생성의 연기를 파티는 소멸의 연기를 나타낸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아누로마는 집제(集諦), 파티로마는 도제(道諦)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전재성은 집제(集諦)를 약생차즉생피(若生此卽生彼)의 원리로, 도제를 약멸차즉멸피(若滅此卽滅彼)의 원리로 규정하는 맥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이하쿠쥬(宇井伯壽)선생이 말하는 바대로, 12지연기를 말할 때는 순관(順觀)은 곧 유전연기(流轉緣起), 역관(逆觀)은 곧 환멸연기(還滅緣起)를 말하는 것으로 등식화 되며, 또 순관(順觀)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역관(逆觀)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간주되는 것이다宇井伯壽, 佛敎汎論(東京 : 岩派書店, 1962), pp.1064~5.. 나는 이러한 가장 일반적인 논리에 따라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의 의미를 평이하게 서술하였다.

 

그리고 또 연기를 말하는 데 있어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이 항상 짝지어 나오기 때문에 는 존재(Being)의 세계를, ‘()은 생성(生成, Becoming)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분별하여 세밀한 논의를 일삼는 학설이 많지만 나는 그러한 논의에 크나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싯달타의 12연기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까르마()에 관한 추론이며 그것은 구체적인 행위의 국소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생성의 시간선상에서 분명한 전후의 인과개념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대전제를 무시하고 인과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적 담론까지를 포괄해서 과학철학의 제문제를 논의하듯이 논의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예를 들면, 김동화(金東華)의 논의’(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일체사물(一切事物)의 동시병존적(同時竝存的) 연관성(聯關性)을 도파(道破)한 것이요, ‘의 논의’(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는 일체사물(一切事物)의 이시계기적(異時繼起的) 연관성(聯關性)을 표시(表示)한 것으로 보아, 전자를 공간적ㆍ실상론적ㆍ제법무아(諸法無我)적 논의로, 후자를 시간적ㆍ연기론적ㆍ제행무상(諸行無常)적 논의로 규정한다金東華, 佛敎學槪論(서울 :白映社, 1967), pp.104~5..

 

그리고 전재성은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는 고제(苦諦),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는 집제(集諦),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는 멸제(滅諦),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은 도제(道諦)를 나타낸 것으로 각기 배속하여 정교한 논의를 편다전재성, 初期佛敎緣起思想,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김동화의 논의는 너무 도식적인 이원론에 빠져있고, 전재성의 논의는 너무 인과의 개념을 확대해석하고 있다. 인과의 개념에는 반드시 시간적 선ㆍ후 관계가 전제될 수밖에 없으며(상대성이론에서조차도), 동시적 인과개념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가 없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넌로칼(non-local)한 동시적 영향 같은 것은 얽힘(entanglement)이지 인과(causation)가 아니다. ‘때문에라는 접속사로 연결되는 모든 관계가 인과인 것처럼 전제하고 펼치는 논의는, 12연기설에 관한 한, 별 의미가 없다. 삼파(三把)의 속로(束蘆)가 호상의지(互相依持)하는 것은 결구상의 상호의존관계이지 그것을 인과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과라는 것은 로칼한 두 사태 사이에서 정보의 전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라 했을 때, 구태여 전자를 무시간적 시각에서 후자를 유시간적 시각에서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전자는 인간의 행위의 체계로서 서로 의존적 관계에 있는 어떤 내재적 실상을 말한 것이라면 후자는 실제 행위체계로서의 시간적 선후의 증장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모두 궁극적으로 시간적 연기의 관계항목을 설하고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전자를 의존하고 있음으로, 후자를 함께 나타남으로 보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타날 때 저것이 나타난다라고 해석하는 이중표의 논의는 일고의 가치가 있다이중표, 근본불교(서울 : 민족사, 2002), pp.260~1..

 

연기에 있어서 무시간적 차원은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의 사유 그 자체가 이미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공간적 관계도 연기에 관한 한 시간을 매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론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위의 소박한 윤리적 차원을 떠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물의 우주론적ㆍ존재론적 해명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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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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