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5.2. 순관과 아누로마, 역관과 파티로마
그러나 원시불교의 연구가들, 특히 팔리어장경의 원전에 입각하여 사고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순(順)ㆍ역관(逆觀)의 문제를 싯달타의 사고의 방향성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지를 않다. 사실 인간의 사유추리과정에 있어서의 방향성이란 그렇게 근원적인 문제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순(順)ㆍ역(逆)의 문제는 그러한 부차적인 사고의 방향성의 의미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어떤 사고의 내용성과 관계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12지연기설의 가장 프로토타입으로 꼽는 『마하박가』 초송품(初誦品) 첫머리에서 순(順)ㆍ역(逆)의 문제는 ‘연기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시었다’라는 구절 속에서만 규정될 수 있는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 인용된 최봉수의 번역에 해당되는 일역 『남전』의 구문은 ‘緣起を順逆に作意したへり’라고 되어 있다. 여기 ‘발생하는 대로’(順に)와 ‘소멸하는 대로(逆に)에 해당되는 팔리어는 아누로마(anuloma)와 파티로마(paṭiloma)라는, 형용사가 부사적으로 어미변화를 일으킨 형태이다.
그러니까 순관(順觀)ㆍ역관(逆觀)의 문제는 ‘아누로마’와 ‘파티로마’의 해석의 문제,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누로마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무명으로부터 노사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생하는 12연기가 기술되어 있고, 파티로마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무명으로부터 노사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멸하는 12연기가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소부(小部)니까야의 세 번째 경전(『法句經』 다음에 오고 있다)인 ‘우다나’(Udāna, 優陀那)라는 이름의 『자설경(自說經)』(붓다 자신이 감흥에 따라 발한 게송이라는 뜻)의 제일품(第一品) 보리품(菩提品)에 아누로마는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에 해당되는 유전연기로서 명료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각칠일후야(大覺七日後夜) 초분(初分)의 사고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티로마는 야중분(夜中分)의 사고였으며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에 해당되는 환멸연기가 그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누로마(順次)는 유전연기, 파티로마(逆次)는 환멸연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명료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그것은 각기 대각칠일후야(大覺七日後夜) 초분(初分)과 중분(中分)의 사고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나뉘어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아누로마의 ‘아누’(anu)는 ‘따라서’의 의미이며 ‘로마’(loma)는 ‘순서,’ ‘틀’ 등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파티로마의 ‘파티’(paṭi)는 ‘거슬러,’ ‘대하여’의 의미가 있다. 즉 아누와 파티에는 ‘for’와 ‘against’의 대칭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아누로마와 파티로마는 순차(順次)와 역차(逆次)로 번역되는데 큰 무리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것을 확대해석하여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으로 개념화하면 마치 어떠한 순서의 방향의 순(順)ㆍ역(逆)을 의미하는 것처럼 해석될 소지가 항상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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