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한 것은 멸한다
a『마하박가』의 초전법륜 장면, 그러니까 부처의 최초의 설법의 장면에는, 부처의 말씀을 듣고 법안(法眼, dhamma-cakkhu)을 얻은 자들의 깨달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말로서 다음과 같은 표현이 정형구로서 계속 등장하고 있다. 콘단냐(Koṇḍañña) 장로가 깨달았을 때, 밥파(Vappa)장로와 밧디야(Bhaddiya)장로가 깨달았을 때, 마하나마(Mahānāma)장로와 앗사지(Assaji)장로가 깨달았을 때, 그리고 야사(Yasa)라는 젊은이가 법안을 얻었을 때를 마하박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생하는 법은 어느 것이나 모두 멸하는 법이다’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ṁ
‘생하는 법은 곧 멸하는 법이다.’ 이 한마디를 깨닫는 것을 곧 법안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법안이란 곧 유전연기와 환멸연기를 동시에 전관(全觀)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12지연기의 각 항목은 모두 법(法)이다. 그런데 이 법은 생(生)하는 법인 동시에 멸(滅)하는 법이다. A가 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곧 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은, A는 자기 동일성을 영원히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생과 멸의 연기선상에서만 있을 수 있는 가합(假合)적 존재라는 뜻이다. 붓다가 A라는 법(法)을 유전과 환멸의 양측면에서 동시에 관찰해야 한다고 설한 뜻은 어떠한 경우에도 A는 자기동일성을 항구하게 지속시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A라는 법에 자기동일성이 확보될 수 없다는 것은, A라는 법에는 아(我) 즉 아트만(ātman)이 없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우리는 ‘무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12지연기의 한 항목의 법(法)이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12지연기의 열두 항목 모두가 무아(無我)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우리가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부르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제법무아니 하는 모든 말들이 바로 이 연기의 순관과 역관의 조합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말들이다. 따라서 붓다는 연기를 알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나를 안다고 말했던 것이다. 삼법인(三法印)이 모두 연기에서 도출된 것이다.
▲ 델리에서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안 떠 부득불 자동차로 아그라(Agra)까지 가야 했다. 오줌이 마려워 변소 있는 주차장을 찾다가 우연히 도착한 곳이 이 거대한 성문 앞이었다. 우연하게 목도한 이 거대한 폐성의 웅장함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올드델리의 레드 포트(랄 낄라)의 조형을 나는 여기서 발견했다. 이것은 세번째 정복 왕조인 뚜글라크 왕조의 개조 터키계 기야스웃딘 뚜글라크(Ghyasuddin Tughlaq)가 지은 것이다. 1221년 인도의 서북 쪽을 강타한 징기스칸의 공포때문에 이런 어마어마한 성을 지었다고 한다. 델리에서 10km 동남쪽, 13개의 성문이 있다. 14세기초에 건립.
성안의 도시는 동네사람들이 눗고간 마른 똥으로 가득 찬 폐허였으나 왕년의 화려함을 전해주고 있었다. 여기 내 카메라가 잡은 돔의 굴은 요즘말로 하면 쇼핑 몰에 해당되는 곳이다. 양 옆으로 작은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야스웃딘은 당대의 이슬람 성자 니잠웃딘(Nizan-ud-din)의 저주를 받고, 그의 아들에게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무하마드 뚜글라크는 천하의 폭군인데 데칸고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우리는 그를 ‘또라이’라고 별명지었다. 붓다는 말한다. “지어진 것은 반드시 스러지게 마련이다.” 나는 말한다: “폐하는 아름답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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