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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히란냐바티강의 사라나무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히란냐바티강의 사라나무

건방진방랑자 2022. 3. 1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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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란냐바티강의 사라나무

붓다의 육신과 진리

 

 

남전 대반열반경5송품(第五誦品)에 보면, 붓다는 히란냐바티강(凞連禪河) 맞은편 언덕 쿠시나가르 외곽의 사라나무숲으로 가서 침상을 준비하고 죽음의 채비를 차린다. 이때 한쌍의 사라(沙羅)나무가 아직 꽃필 때가 아닌데도 갑작스럽게 온통 꽃을 피워 여래의 전신 위로 하늘하늘 흩날리며 내려와 여래를 공양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호곡하는 아난다. 쿠시나가르 열반상 하단 조각.

 

 

이때 아난다가 슬픈 눈빛으로 숨을 거두려하는 붓다를 쳐다본다. 그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아난다여! 절대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이런 일만이 여래를 경애하는 일은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색과 우바이 이들은 반드시 진리를 몸에 지니고 진리에 따라 진리에 바르게 이르고,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여래를 깊게 경애하는 것이 되느니라!”

 

붓다의 이 유명한 설법은 제자들에게 인간 싯달타라고 하는 육신의 유무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가 설법한 진리에 따라 행동하며 또 그 진리를 구현하는 길만이 싯달타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일임을 역설한 것이다. 스러져가는 자신의 육신에 집착치 말라는 하나의 위로의 말이었다.

 

 

나는 히란냐바티 강가에서 죽음의 침상을 마련하는 싯달타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여기 히란냐바티 강을 건너는 두 어린남매의 머리 위로 사라나무의 꽃잎이 흩날리고 있는 듯하다. 내가 카메라를 대니까 공포스러운 듯 도망가고 있었다. 아가야! 나는 너희를 아난이 싯달타를 사랑하듯이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단다!

 

 

그러나 아난다는 세존께서 어이하여 이리도 급히 열반(涅槃, nirvāṇa)에 드시나이까, 원만한 분께서 무슨 까닭에 이리도 빨리 모습을 감추려하시나이까, 하고 비탄해 한다. 그러면서 세존께서 입멸하시면 배울 스승이 없어지고 또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지기에 너무도 허무해진다고 말한다. 그러한 것이 너무도 서글프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에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타이른다【『남전(南傳)7-1205. 강기희 역, 대반열반경(서울 : 민족사, 1994), pp.121~7. 최봉수 옮김, 팔리경전이 들려주는 고타마 붓다(서울 : 불광출판부, 1996), pp.228~233. 강기희의 번역은 일역 남전(南傳)본에서 중역한 것이고, 최봉수의 번역은 팔리어장경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최봉수의 번역을 기초로 해서 강기희역본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최봉수의 상기서에도 대반열반경의 완역이 포함되어 있다..

 

 

아난다여! 그다지 슬퍼할 것 없느니라. 나의 사후에도 신앙심이 두터운 양가의 자제들은 다음과 같이 여래를 기념할 만한 네 곳을 보면서,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면서 종교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라. 그것은 어떤 장소이겠는가?

아난다여! 여래의 탄생지에서……… 여래께서 정각을 얻은 땅에서……… 여래의 최초의 설법지에서 ……… 그리고 여래의 입멸지에서…… 신앙심이 돈독한 양가의 아들들은 이곳을 보면서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면서 깊은 종교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아난다여! 이미 불제자가 된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색ㆍ우바이들도 또한 이곳에서 여래께서 태어나셨다.’ ‘이곳에서 여래께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셨다.’ ‘이곳에서 여래께서 위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이곳에서 여래는 남김없는 완전한 열반의 세계에 드셨다등등으로 말하면서 이들 지방을 찾아올 것이니라.

 

 

뒤에서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승과 대승을 미술사적으로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이 되는 것은 등신불(等身佛)의 존재유무이다.

 

 

히란냐바티 강에서 싯달타의 육신은 이렇게 스러져 갔다. 바로 싯달타의 육신이 스러진 그 자리에 서있는 대반열반사(Mahaparinirvana Temple)! 그 속에 안치되어 있는 이 열반상은 참으로 평온하게 영원한 잠자리에 드는 한 인간의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한 걸작품이었다. ‘만들어진 것은 모두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오직 게으름 없이 살았기에 나는 여기에 이르렀다. 열심히 정진해다오.’ 이것이 그의 최후의 말이었다.

 

 

여기서 등신불이라는 것은 붓다를 인간의 형상으로서 시각화하는 것을 말한다. 소승불교에는 이러한 등신불의 시각성(anthropomorphic visualization)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아이콘적인 구체형상이 없다. 즉 사람의 형상으로서 붓다를 기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붓다를 사람의 형상으로서 시각화할 때 그것은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의 근본취지에 어긋날 뿐 아니라, 붓다를 하나의 실체로서 신격화하고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크다. 그러기 때문에 붓다는 그의 제자들이 진리만에 의거하여 살 것이며, 자기라는 인간의 형상에는 집착치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따라서 원시불교에는 일체의 등신불의 형상이 허용되질 않았다. 불상이라고 하는 것은 AD 1세기 말경부터, 대승운동이 태동되면서부터 생겨나게 된 것이며 불교운동사에 있어서 그것은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붓다의 열반을 그토록 슬퍼했던 아난다의 무덤, 이렇게 생긴 것이 스투파다. 그는 싯달타와 같은 고향의 사람이었다. 쿠시나가르 부처님 무덤 곁에 묻혀있다. 25년 동안 붓다를 가까이서 모셨던 그는 죽어서도 그를 시봉하고 있는 것이다. 왕사성 제1결집 때 아난다의 암송이 부처님 말씀의 전승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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