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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아쇼카와 진시황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아쇼카와 진시황

건방진방랑자 2022. 3. 17.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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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와 진시황

 

 

아쇼카가 지배한 인도는 현실적으로 당대의 세계에 있어서 가장 강성한 군주국가였다. 그리고 인도역사에 있어서 최초이자 최후의 완벽한 통일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담마(팔리어, dhamma)의 정치는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담마의 이상을 통해 다양한 인도대륙의 이질적 요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새로운 정신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진보적 생각은 브라흐만(Brahman) 사제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인도대륙의 지배자일 뿐 아니라, 전 인류를 포용하는 정신적 담마제국의 수장으로서 자신을 인식했다. 아쇼카에 대하여 엇갈리는 기술도 적지 않지만 그가 참다운 사랑과 자비에 헌신한 성군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쇼카는 중국의 진시황에 비유될 수 있다. 둘 다 인도와 중국이라는 대륙에 통일적 아이덴티티를 최초로 형성시킨 제국의 수장들이었으며, 공교롭게도, 한 세대 정도의 시간차이는 있으나, 동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너무도 다르다. 이 양자를 가름짓는 결정적 사건은 만리장성의 유무다. 아쇼카는 만리장성을 세우지 않았고 추상적 담마의 가치만을 전파했다. 진시황은 레알 폴리티크(Realpolitik)의 상징이라면, 아쇼카는 이데알 폴리티크(Idealpolitik)의 상징이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이라는 물리적 사실을 통해 중국이라는 한민족의 하나됨을 후세에 물려주었다.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도량형의 통일문자의 통일이었다. 즉 중국문명에 불변하는 어법의 확실한 우선체계를 확립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아쇼카는 진시황이 수립한 그러한 구체적 통일성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아쇼카의 추상적 담마는 인도문명을 또 다시 공백상태로 방치시켰다. 그의 사후 50년이 지나자 마우리야왕조는 거품처럼 사라졌다. 마우리야를 대체한 승가왕조(The Śuṅga dynasty)의 창시자, 푸샤미트라(Puṣyamitra)는 정통 브라흐만(Brahman)이었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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