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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부록 8.2. 미륵하생의 신앙이 박힌 익산 미륵사지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부록 8.2. 미륵하생의 신앙이 박힌 익산 미륵사지

건방진방랑자 2022. 3. 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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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8.2. 미륵하생의 신앙이 박힌 익산 미륵사지

 

 

이러한 종교적 사상의 근원을 떠나 순수하게 건축학적으로 미륵사를 고찰하면, 황룡사의 일목탑삼금당(一木塔三金堂)의 체계를 일목탑이석탑삼금당(一木塔二石塔三金堂)의 체계로 변조시키면서 생기는 파격성을 회랑을 둘러침으로써 완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일원(一院)의 구조는 탑일금당(塔一金堂)의 가장 보편적인 백제가람전통을 계승한 것이 된다(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금강사지, 서복사지, 정림사지가 모두 일탑일금당의 기본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일목탑이석탑(一木塔二石塔)의 삼탑(三塔)체제는 매우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목탑이 석탑화되는 최초의 계기를 형성함으로써 향후의 탑의 새로운 운명을 결정지었다. 목탑의 의제(擬製)로서의 석탑의 출현은 곧 탑이 싯달타의 무덤이라는 오리지날한 의미에서 건축조형상의 한 디자인적 양식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중국이라는 이역에서 탑이 갖는 의미의 한계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즉 인도를 떠나게 되면 이미 탑의 가장 핵심부분인 석가모니의 뼉다귀 원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래적 의미는 점차 소실되어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중심자리를 불상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륵하생의 신앙은 삼시(三時)의 말법(末法)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무왕은 백제왕국의 말세적 상황을 미륵하생의 구원, 즉 종교적 메시아니즘을 통해 극복하여 보려고 발버둥쳤던 것이다. 고려말기에 몽골의 침입을 팔만대장경의 조판으로 물리치려고 한 것이나 백제말기에 미륵하생의 삼회삼소(三會三所)의 거대한 사찰을 창건한 것이나 모두 우리에게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을지는 모르나 보다 근원적인 정치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을 도외시함으로써 패망의 골을 더욱 깊게 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동요의 주인공 맛똥 무왕과 선화공주는 민중의 사랑을 받은 로맨스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미륵사 근처 고도리(古都里)에 남아있는, 논이랑 한가운데 정겨웁게 마주보고 있는 한 쌍의 민불(民佛) 석상의 모습이나, 소조한 송림사이로 말없이 잠들고 있는 쌍릉의 고적감은 무엇인가 그러한 흥망의 비애로움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전라북도 익산지구 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 미륵사지유물전시관 학술총서 제1, 미륵사지석탑(2001)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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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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