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탑, 목탑, 석탑
우리에게 친근한 예로써 이 스투파의 원형에 가장 가깝게 오는 것이 바로 경주 분황사(芬皇寺)탑이다. 우선 분황사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의 일반형태와는 달리 모전석(模塼石)이긴 하지만 작은 벽돌들을 쌓아올렸다는 것과, 그 형태가 중국에서 발전된 누각의 형태가 아닌 돌무덤 스투파의 원형에 가깝게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황사의 발굴터를 보면 그 전체 가람의 배치가 1탑중심이라는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되어야할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흔히 탑이라고 하는 것은 석탑이지만, 그것은 실상 순수한 석탑이 아니고 목탑의 형태를 돌로 옮겨놓은 것이다. 목탑이 석탑화되는 가장 초기의 장중한 실례가 바로 익산의 백제 미륵사지의 석탑이며, 이 석탑의 발전적 형태로서의 단촐한 아키타입을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의 5층석탑, 경북 월성의 감은사지(感恩寺址)의 동ㆍ서 3층석탑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원래 스투파와 다른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투파에 해당되는 부분이 완전히 퇴행된 장식으로서 우리 눈에 잘 안보이는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산치대탑의 모델을 가지고 설명하면 그 후로 이미 인도에서 기단부분이 확장, 자꾸 계단식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기단부분이 2계, 3계, 4계로 점점 확장되고 그 위에 봉분에 해당되는 복발이 상대적으로 작게 얹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단부분의 계단식 확장이 중국에 오면 아예 고층 누각의 형태로 바뀌면서 목조 건물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목조누각식탑(木造樓閣式塔)이 남북조시대의 사원건축의 중심에 배치되게 되었는데, 이러한 목조누각식탑의 가장 장중한 우리나라의 예가, 현존하지 않지만 황룡사(皇龍寺)의 9층탑이다. 그리고 익산의 미륵사 중앙의 9층목탑도 이 황룡사 9층탑을 계승한 비슷한 규모의 탑이다. 그 정확한 유지(遺址)의 주춧돌 모습의 정황에 미루어 그 원형을 상상속에 복원할 수가 있다. 그리고 출토된 치미의 거대함으로 보아 부속건물들의 장쾌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연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捌相殿)이며, 이것은 비록 후대에 재건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호오류우지(法隆寺)의 5중탑(五重塔)의 조형을 이루는 형태를 계승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호오류우지(法隆寺)는 쇼오토쿠 타이시(聖德太子, 574~622)와 스이코 텐노오(推古天皇, r, 592~628)의 발원으로 607년에 완성되었고, 법주사(法住寺)는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팔상전 5층목탑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8년(1605)에 사명당ㆍ벽암 등에 의하여 중창이 시도되었다. 전후 폐허의 열악한 상황에서 스님 목수들의 22년간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1626년에 완공을 보았던 것이다. 황룡사(皇龍寺) 역시 553년에서부터 645년에 이르기까지 약 1세기에 걸쳐 3금당1탑식의 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황룡사, 법주사, 호오류우지가 모두 일목탑구조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원형은 같은 시대축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장중한 분황사 모습. 인도 스투파 개념에 가장 가깝게 오는 우리나라의 벽돌 탑이다. 634년 창건. 현장이 인도를 여행할 즈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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