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읽기와 ‘문제설정’
그렇다면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 경계선의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자 자신이 자기 사상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경우는 결코 없으며, 철학책 어디를 봐도 경계선을 보여주는 표시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경계선 같은 건 애시당초 없는 건지도 모릅니다.
원뿔을 밑에서 보면 원으로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는 것처럼, 모든 것은 보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마찬가집니다. 데카르트를 로크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찾으려 할 때와 칸트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찾으려 할 때, 혹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그으려 할 때, 경계선은 모두 다 달라질 것입니다. 또 철학사를 반복의 역사일 뿐이라고 볼 때와 하나의 진화적 발전과정이라고 볼 때, 혹은 상이한 사상의 대체과정이라고 볼 때, 데카르트 철학의 경계나 그것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철학에서 경계선을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경계선을 그어서 철학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경계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의 사상이나 철학적 흐름에 깔려 있는 사고방식 등을 파악할 개념적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저는 문제설정(problématique, 이는 원래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에서 사용했던 것입니다)이란 개념을 사용하려 합니다.
일단 생소한 말일 테니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집 대문 앞에 아무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며칠 동안 계속 주차해 놓은 자동차 때문에 불편을 겪다가 화가 나서 그 얄미운 자동차의 바퀴에 펑크를 내버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마침 차 주인이 그걸 보고 달려왔습니다. 제게 당연히 항의하겠죠. “아니, 차 좀 잠시 주차시켰다고 이렇게 펑크를 낼 수가 있소? 이건 명백히 불법행위요. 책임지고 배상해 주시오.”
그러나 그 자동차로 인해 숱하게 불편을 겪은 저로선 그 말에 순순히 응할 리 없을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불법행위’란 명목으로 고소하려하겠지요. 그럼 저는 그 자동차 주인을 ‘불법 주차’로 맞고소해야겠지요? 그럼 이제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낸 게 불법행위인가 아닌가”를 문제삼게 될 것입니다. 자, 얘기는 이만 줄이고 다시 철학으로 돌아갑시다.
여기서 문제가 어떻게 설정되었나를 봅시다.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를 낸 행위가 불법인가 적법인가?”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그 대답 역시 그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에 크게 좌우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제 행위가 법에 맞는가 아닌가만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봅시다. 자동차와 나, 자동차 주인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그밖에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컨대 그 사람은 왜 주차장이 아닌 남의 집 앞에 불편하게 주차해 두었나? 그건 주차장이 모자라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는 도시 교통정책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측면에서 접근한 거죠. 혹은 이럴 수도 있습니다. 왜 나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자동차에 펑크를 냈나? 자동차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의 차 때문에 하루종일 고생을 했으니 화가 나서 그랬다. 이는 심리적 측면에서 접근한 거죠.
그러나 이런 대답은 “불법인가 적법인가”를 따지는 문제에선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그 같은 문제에선, 불법 주차한 차에 손해를 입힌 게 불법인가 아닌가라는 법적 문제만이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어떤 종류의 대답은 대답이 될 수 없게 되고, 아예 생각하기도 힘들게 됩니다. 대답뿐만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해결은 교통정책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불법이니 아니니 하는 건 이 경우에는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심리적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그 해결 역시 심리적 차원에서만 가능합니다. 반면 법적인 차원에서 제기하면, 불법행위를 한 사람이 배상을 해주어야 해결이 됩니다. 이 경우 법 자체가 정당한지 아닌지는 결코 문제되지 않으며, 이렇게 문제설정을 하면 기존 법의 올바름은 당연시됩니다. 즉 법 자체를 다시 사고할 수 없는 문제설정인 셈이지요.
이처럼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문제를 사고하고 처리하며 대답하는 방식은 전혀 달라집니다. 이런 이유에서 “문제가 제대로 제기되기만 하면 이미 반은 풀린 것이다”라는 말도 하는 겁니다.
이건 과학에서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이론이 나온 뒤에 다른 행성의 궤도는 다 그 이론에 따라 계산한 게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은 안 맞았습니다. 이 경우 ‘이론을 반박하는 사례가 나오면 그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실증주의나 반증주의(포퍼)의 입장에선 “이론과 사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사실에 안 맞는 이론은 버려야 한다”는 문제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왕성 궤도를 잘못 계산한 뉴턴 이론은 거짓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 거지요.
반면 뉴턴 이론의 지지자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건 다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는다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요인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일 거야. 그 요인은 대체 무얼까?”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이젠 다른 요인들을 찾아나서게 될 겁니다. 망원경이 부실해서 그런가? 아니면 70여 년마다 그 근처에 접근하는 헬리혜성 때문인가? 아니면 혹시 다른 별이 천왕성 근처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등등. 그리고 결국엔 천왕성과 명왕성 사이에 해왕성이란 행성이 하나 있기 때문이란 걸 발견하게 됩니다.
상이한 문제설정은 이처럼 상이한 대답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철학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예컨대 “참된 인식은 무엇인가?”라고 문제를 설정하면, 당연히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은 “참된 인식은 어떤 것이다”라는 식으로 됩니다. 거기에는 참된 인식/거짓된 인식이란 대비가 깔려 있으며, 참된 인식이 중요하고 그것이 철학이 추구해야 할 목표다, 등과 같은 사고방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대보름날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행동이나, “저 마지막 잎새가 지면 나도 죽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오 헨리 소설의 주인공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단지 어떤 중요성도 없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든간에 말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데서 분명하듯이,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은 그 문제를 가지고 사고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제한합니다. 그 안에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치도 포함되어 있고, 그 중요한 것을 사고하는 데 기초가 되는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설정을 통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설정’이란 도구를 통해 철학의 경계를 찾아내고, 그 경계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인용
'책 > 철학(哲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은폐된 공세 (0) | 2022.03.22 |
---|---|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중세의 철학 (0) | 2022.03.22 |
철학과 굴뚝청소부, 서론 - 철학의 경계 (0) | 2022.03.22 |
철학과 굴뚝청소부, 서론 - 포스트모던 ‘시대정신’ (0) | 2022.03.22 |
철학과 굴뚝청소부, 서문 - 제2증보판에 부쳐 (0) | 2022.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