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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은폐된 공세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은폐된 공세

건방진방랑자 2022. 3. 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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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공세

 

 

지오다르노 브루노(Giodarno Bruno, 1548~1600)는 일찌감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자신의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주란 무수히 많은 태양과 별들로 가득찬, 그러나 끝도 중심도 없이 운동만을 지속하고 있는 영원한 전체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신이란 일체의 만물을 지배하며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며, 우주의 각 개체 속에 있는 것인 동시에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신과 자연(우주)을 하나로 보는 이런 입장을 범신론(汎神論)이라고 합니다. 이는 중세적인 신의 개념,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교회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견해였습니다. 이런 입장은 과학의 이름으로도 철학의 이름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불경을 뜻하는 것이었지요. 달리 말하면 브루노는 신학의 시녀이기를 명시적으로 거부한 셈입니다.

 

원래 도미니크 수도회에 가입해 있던 브루노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 지식에 대한 진지함, 세속적인 지식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수도원을 떠나고 맙니다. 신이, 교회가 제공하는 안정을 포기하고는 항상 쫓기는 방랑생활을 했는데, 유럽 전역을 돌며 강의 등을 하다가 어떤 베니스인의 초청으로 귀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가 브루노를 밀고함으로써 종교재판소의 법정에 서게 되지요.

 

그러나 갈릴레이의 경우와는 달리 브루노는 종교재판에서도 끝끝내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교황청과 성직자들의 분노를 사서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는, 16002월 로마의 한 광장에 끌려가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한마디의 신음도 없이, 누군가가 던져준 십자가는 비웃음으로 내던지면서 그는 의연히 죽어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브루노는 너무나도 일찍이 중세가 허용할 수 있는 철학의 한계를 넘어가 버렸던 것입니다.

 

중세철학의 한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세에는 신학이 곧 철학의 한계였고, 신학의 허용범위 안에서만 철학이 존재할 수 있었으며, 신 안에서만 철학적 사고가 허용되었습니다.

 

과학 또한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중세의 과학은 일종의 자연철학이었습니다. 즉 자연현상을 나름의 원리에 따라 해석하는 학문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피지카(Physica, 과학)와 메타피지카(Meta-physica, 형이상학, 철학)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와 달리, 중세의 과학은 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의 운행법칙, 그 오묘하고 조화로운 세계의 운행법칙을 인식하는 학문으로 존재했습니다.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신학의 그늘 아래 있어야 했으며, 그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신학의 전제를 거부하거나 뒤흔들면 안 되는, 그렇게 해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세를 암흑의 세계라고도 합니다. 갈릴레이의 유명한 사례는 중세라는 세계 속에서 과학자가 어떻게 해서는 안 되는가 를 보여주는 모범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를 근본에서부터 억압하고 제한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나 반역하는 인간, 가공할만한 공포와 위협 혹은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사고를 감행하는 인간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쨌든 앞서 화형당했던 브루노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투덜거렸던 갈릴레이 같은 사람은 꼭 있게 마련입니다. 나아가서 중세가 지속되는 동안 사람들의 지식이 성서와 교회의 벽에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사태를 막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사고의 발전과 지식의 증가에 따라 성서를 이탈하는 이 모험적이고 반역적인 사람들의 말은 점점 설득의 기초를 확장해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세적 사고의 중심을 향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은폐된 공격이 중세의 이면에서 지속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러한 공세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실 갈릴레이나 브루노는 이러한 은폐된 공세 중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공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러한 공세는 중세를 전복하는 효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브루노의 비극, 혹은 르네상스 사유의 한계

브루노는 우직하고 고지식한 르네상스인이었다. 그는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니 무한한 우주에 하나의 중심이 있다고 대체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그는 우주가 무한하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르네상스인은 누구도 무한이란 말과 중심을 갖는다는 말이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교황청은 우주가 무한한지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생각에는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브루노는 교회라는 중심이 확고하게 통치하는 공간에 들어선 순간, 자신의 견해와 더불어 우주를 태우는 불길 속에 던져져야 했다. 하지만 다음 세기 사람들처럼 소실점 하나로 무한한 공간이 통합될 수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브루노는 굴종도 화형도 모두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정말 우주는 하나의 중심을 갖는 것일까? 단 하나의 점으로 무한한 공간이 통일되는 게 정말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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