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히테의 철학적 테제
피히테의 철학 전체를 특징짓는 세 가지 테제가 있습니다. 그 각각은 테제, 안티-테제, 진테제란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는 흔히 변증법을 요약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이지요. 이 세 개의 테제를 통해 피히테는 지식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첫째 테제 ― “경험 등 모든 사실의 설명에 근거가 되는 이 자아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 자신 안에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자아의 정립(定立)’이라고 요약됩니다.
피히테에게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근거입니다. 경험이나 인식의 절대적인 출발점이자 근거를 이룬다는 점에서 절대적 자아인 거지요. 이러한 절대적 자아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인식도 경험도 불가능합니다. 마치 인식하는 내가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듯이 말입니다. 이 자아를 존재하게 하는 다른 근거(예를 들면 ‘나는 생각한다’와 같은)는 필요없습니다. A가 A인 것에 다른 이유가 필요 없듯이 말입니다. 단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자아는 존재한다. 그리고 자아는 자신의 단순한 ‘존재함’에 의하여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이 절대적 자아는 연관들을 정립하는 판단작용이며 정신의 활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히테는 말합니다. “나는 활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둘째 테제 ― “자아는 비아를 반정립한다. 나아가 자아는 비아를 자기 안에서 반정립한다.”
자아는 비아를 자기에 대립되는 것으로 세운다[反定立]는 말입니다. 이는 흔히 ‘자아의 부정-비아의 정립’으로 요약됩니다.
자아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활동도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먹는다는 활동은 음식이란 대상이 있어야 하고, 땅을 파는 활동은 팔 땅이 있어야 하며, 대화라는 활동은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인식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어떤 대상을 정립하려면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게 음식이 되는지 아닌지, 이게 파야 될 땅인지 아닌지, 이 사람이 내가 말하려는 상대인지 아닌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피히테는 “대상이 자아 안에 이미 놓여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아의 부정이라는 성격을 갖기에 비아’라고 합니다. 즉 자아가 비아를 정립하는 겁니다.
셋째 테제 ― “자아는 자아 안에서 가분적(可分的) 자아에 대해 가분적 비아를 반정립한다.”
좀 어려워 보이지요? 하지만 겁낼 건 없습니다.
애초에 자아는 스스로를 정립했지요? 그리고 자아는 활동이기 때문에 비아를 자기 안에 정립해야 했고요. 그럼 이제 절대적 자아는 자아와 비아로 나뉘게 되겠지요? 애초의 자아는 자아만으로 있었는데, 이제는 자아와 비아로 나뉘어 존재하게 된 겁니다. 셋째 테제는 이처럼 나뉠 수 있는 자아(가분적 자아)와 나뉠 수 있는 비아가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먹는 자아와 먹을 음식인 비아가, 말할 자아와 말상대인 비아가 서로 마주 서 있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경험하는 의식을 얘기할 수 있는 건 바로 여기서부터지요. 경험이란 경험하는 자아와 그 대상이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이 세 번째 테제는 마주 서 있는(반정립된) 자아와 비아의 종합(Synthese)을 표현합니다. 이 대립에 의해 자아도 비아도 구별을 획득합니다. 자아도 대상(비아)도 이 구별을 통해 내용을 획득합니다. 활동하는 자아가 먹는 나인지, 땅을 파는 나인지, 아니면 대화하는 나인지는 이 대립을 통해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비아는 대상이 갖는 다양성을 대변합니다. 반대로 자아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나와 관계지우기에 통일성을 대변합니다.
결국 피히테가 출발점이라고 생각한 절대적 자아란, 활동을 통해 자아와 비아를 동시에 정립하는 ‘자아’입니다. 이런 뜻에서 피히테는 자아와 비아의 종합만이 절대적이라고 하지요.
요약하면, 피히테는 칸트처럼 선험적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선험적 주체가 아닌 ‘자아’에서 출발합니다. 이 자아는 자기 안에 자아를 정립하고, 또한 비아를 정립합니다. 피히테에게 인식의 ‘대상’이란 비아일 뿐입니다. 자아 외부에 있는 어떤 것도 그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사물 자체’ 역시 마찬가집니다. 모든 대상은 ‘자아’ 안에 있고, 자아와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통일만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요. 자아는 비아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것이기에, 비아에 의해 제약됩니다. 따라서 자아가 사용하는 범주나 원리는 칸트 생각처럼 초역사적이고 추상적인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됩니다.
이런 철학적 관점에서 피히테는 자아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강조합니다. ‘자아는 무한을 향한 행동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극도로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도덕적 질서는 완전성을 추구하는 자아의 노력 속에 있으며, 이 도덕적인 질서야말로 신적인 질서라고 합니다. 칸트가 신적 질서를 도덕적 질서로 환원했다면, 피히테는 도덕적 질서를 다시 자아의 노력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바로 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즉 무한한 자아들이 서로 부딪치고 상충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거죠.
이에 대해 그는 국가주의적인, 혹은 ‘사회’주의 ― 오늘날 말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에 의한 통제의 이념 ― 적인 견해를 제출합니다. 요컨대 자아들의 상충과 충돌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전체가 조화로울 수 있도록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심지어 ‘개체의 소멸’까지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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