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피히테 : 근대철학과 자아
‘자아’의 복권
피히테는 오직 12개의 범주만을 가지고 있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가 확실한 만큼이나 공허하다고 생각하며, 주체(피히테 용어로는 자아)의 활동과 무관하게 정의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판단의 범주나 원리는 자아(주체)의 활동과정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특히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칸트철학의 인식론적 문제점입니다. 그것은 ‘사물 자체’와 ‘선험적 주체’라는 칸트의 개념에 관련된 것입니다.
피히테는 일단 ‘사물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봅니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 자체는 ‘있기는 있으되 인식되지 않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사물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무엇이라면 사물 자체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고 피히테는 반문합니다.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을 인식할 수는 없다는 말은, “맛이 있긴 있는데 맛을 알 수는 없어”라는 말처럼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말을 할 수도 없을 거라는 겁니다.
이로 인해 칸트 체계의 부정합성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체계를 만들어가는 논리는 서로 배타적인 것을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법인데 칸트의 경우에는 사물 자체와 현상이라는, 서로 배타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합성과 모순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나아가 이론적으로도 칸트가 해결하려고 했던 진리의 문제를, 다시 말해 대상과 주체의 동일성이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물 자체와 현상 간의 심연은 결코 메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선험적 주체의 개념 역시 근본적이지 못하며 불철저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험적 주체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다는 건, 선험적 주체에 대해서 인식하고 판단하며 말하는 또 다른 주체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선험적 주체에 대해 인식하고 말하는 칸트는 선험적 주체보다 앞선 주체인 셈이 됩니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설명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피히테로선 두 가지 문제를 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사물 자체와 현상, 대상과 주체를 어떻게 하면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피히테 자신의 용어를 쓰면 자아와 비아(非我)를 어떻게 통일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험적 주체보다 더 근본적인 것, 다시 말해 경험적인 조건에 전혀 제약되지 않기에 (무제약적이기에) 설명될 수 없는 ‘자아’를 어떻게 얘기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피히테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매우 간단합니다. 자아와 비아를,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우고 통일시키는 원리를 ‘자아’로서 정립하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론 경험되지도 않고 인식되지도 않으나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워 주는 활동, 그리고 그 활동의 결과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낼 뿐인 이 원리를 피히테는 ‘자아’라고 합니다(이때 ‘지아’는 비아와 함께 짝을 이루는 자아와 다릅니다. 이는 일종의 절대자입니다. 이 ‘자아’를 절대적 자아라고 합시다), 그리고 바로 이 자아의 활동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지식의 연구에서 핵심이며, 이런 점에서 ‘지식학’이란 “자신의 본질적인 통일성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서술하는 지(知)”라고 합니다. 피히테에게 철학이란 바로 이 ‘지식학’을 말합니다.
피히테의 철학적 테제
피히테의 철학 전체를 특징짓는 세 가지 테제가 있습니다. 그 각각은 테제, 안티-테제, 진테제란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는 흔히 변증법을 요약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이지요. 이 세 개의 테제를 통해 피히테는 지식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첫째 테제 ― “경험 등 모든 사실의 설명에 근거가 되는 이 자아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 자신 안에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자아의 정립(定立)’이라고 요약됩니다.
피히테에게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근거입니다. 경험이나 인식의 절대적인 출발점이자 근거를 이룬다는 점에서 절대적 자아인 거지요. 이러한 절대적 자아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인식도 경험도 불가능합니다. 마치 인식하는 내가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듯이 말입니다. 이 자아를 존재하게 하는 다른 근거(예를 들면 ‘나는 생각한다’와 같은)는 필요없습니다. A가 A인 것에 다른 이유가 필요 없듯이 말입니다. 단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자아는 존재한다. 그리고 자아는 자신의 단순한 ‘존재함’에 의하여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이 절대적 자아는 연관들을 정립하는 판단작용이며 정신의 활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히테는 말합니다. “나는 활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둘째 테제 ― “자아는 비아를 반정립한다. 나아가 자아는 비아를 자기 안에서 반정립한다.”
자아는 비아를 자기에 대립되는 것으로 세운다[反定立]는 말입니다. 이는 흔히 ‘자아의 부정-비아의 정립’으로 요약됩니다.
자아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활동도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먹는다는 활동은 음식이란 대상이 있어야 하고, 땅을 파는 활동은 팔 땅이 있어야 하며, 대화라는 활동은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인식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어떤 대상을 정립하려면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게 음식이 되는지 아닌지, 이게 파야 될 땅인지 아닌지, 이 사람이 내가 말하려는 상대인지 아닌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피히테는 “대상이 자아 안에 이미 놓여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아의 부정이라는 성격을 갖기에 비아’라고 합니다. 즉 자아가 비아를 정립하는 겁니다.
셋째 테제 ― “자아는 자아 안에서 가분적(可分的) 자아에 대해 가분적 비아를 반정립한다.”
좀 어려워 보이지요? 하지만 겁낼 건 없습니다.
애초에 자아는 스스로를 정립했지요? 그리고 자아는 활동이기 때문에 비아를 자기 안에 정립해야 했고요. 그럼 이제 절대적 자아는 자아와 비아로 나뉘게 되겠지요? 애초의 자아는 자아만으로 있었는데, 이제는 자아와 비아로 나뉘어 존재하게 된 겁니다. 셋째 테제는 이처럼 나뉠 수 있는 자아(가분적 자아)와 나뉠 수 있는 비아가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먹는 자아와 먹을 음식인 비아가, 말할 자아와 말상대인 비아가 서로 마주 서 있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경험하는 의식을 얘기할 수 있는 건 바로 여기서부터지요. 경험이란 경험하는 자아와 그 대상이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이 세 번째 테제는 마주 서 있는(반정립된) 자아와 비아의 종합(Synthese)을 표현합니다. 이 대립에 의해 자아도 비아도 구별을 획득합니다. 자아도 대상(비아)도 이 구별을 통해 내용을 획득합니다. 활동하는 자아가 먹는 나인지, 땅을 파는 나인지, 아니면 대화하는 나인지는 이 대립을 통해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비아는 대상이 갖는 다양성을 대변합니다. 반대로 자아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나와 관계지우기에 통일성을 대변합니다.
결국 피히테가 출발점이라고 생각한 절대적 자아란, 활동을 통해 자아와 비아를 동시에 정립하는 ‘자아’입니다. 이런 뜻에서 피히테는 자아와 비아의 종합만이 절대적이라고 하지요.
요약하면, 피히테는 칸트처럼 선험적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선험적 주체가 아닌 ‘자아’에서 출발합니다. 이 자아는 자기 안에 자아를 정립하고, 또한 비아를 정립합니다. 피히테에게 인식의 ‘대상’이란 비아일 뿐입니다. 자아 외부에 있는 어떤 것도 그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사물 자체’ 역시 마찬가집니다. 모든 대상은 ‘자아’ 안에 있고, 자아와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통일만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요. 자아는 비아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것이기에, 비아에 의해 제약됩니다. 따라서 자아가 사용하는 범주나 원리는 칸트 생각처럼 초역사적이고 추상적인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됩니다.
이런 철학적 관점에서 피히테는 자아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강조합니다. ‘자아는 무한을 향한 행동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극도로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도덕적 질서는 완전성을 추구하는 자아의 노력 속에 있으며, 이 도덕적인 질서야말로 신적인 질서라고 합니다. 칸트가 신적 질서를 도덕적 질서로 환원했다면, 피히테는 도덕적 질서를 다시 자아의 노력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바로 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즉 무한한 자아들이 서로 부딪치고 상충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거죠.
이에 대해 그는 국가주의적인, 혹은 ‘사회’주의 ― 오늘날 말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에 의한 통제의 이념 ― 적인 견해를 제출합니다. 요컨대 자아들의 상충과 충돌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전체가 조화로울 수 있도록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심지어 ‘개체의 소멸’까지 주장합니다.
자아철학의 봉쇄장치
지금까지 본 것처럼 피히테는 선험적 주체를 발견하려는 칸트의 기획을 좀더 근원으로 밀고 가려고 했습니다. 즉 선험적 기획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는 칸트의 선험적 자아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무규정적 자아에서 출발합니다. 칸트적인 선험적 주체조차 거기에 의존해야 하는 자아의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피히테는 근대철학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있음 그 자체가 ‘자명한’, 존재로서의 자아로 말입니다. 이 자아가 활동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아는 존재하고 있음이 자명하다고 합니다. 비록 이 자아를, 데카르트처럼 사유한다는 사실에서 도출하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자아’는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어주는 활동입니다. 즉 주체와 대상을 자기 안에 포괄하고 있는 전체입니다. 이런 점에서 ‘절대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피히테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나’(자아)를 절대화하여 절대자의 자리를 부여합니다. 예전에 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이젠 ‘자아’가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피히테는 이 근대적 자아를 신의 자리로 밀어올림으로써 칸트에 의해 재건된 근대철학이 이젠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음을 선언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근대적 주체철학은 새로이 ‘자아의 신학’을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자아라는 절대자를 신의 자리에 옮겨놓은 학문을 말입니다. 이 ‘신학’ 안에서 모든 것은 자아의 소산이며, 자아활동의 결과물입니다. ‘자아’라는 이름의 주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래서 피히테의 철학을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다른 한편 모든 대상은 자아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자아’ 내부에 있습니다. 이 ‘자아’를 벗어나 있는 사물 자체는 따로 없다고 합니다. 나아가 주체와 대상 모두가 자아 안에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예 생겨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건 항상-이미 ‘자아’ 안에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히테에게 이 통일성은 ‘절대적’입니다.
이로써 사물 자체가 일으키는 난점은 물론, 근대철학이 언제나 부딪혀야 했던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어떻게 확인하고 보증할 수 있는가라는 난문은 해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일치는 자아에 의해 처음부터 항상-이미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아’ 안에서 자아에 의해 비아가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이, 그 비아(대상)를 자아가 올바로 인식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먹는 활동으로서 ‘자아’가 먹는 자아와 먹히는 비아(음식)를 자기 내부에서 반정립시킨다 하더라도, 자신이 무얼 먹는지 모르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걸 아무리 ‘음식’으로서 이미 판단하고 먹기 시작한다 해도 말입니다. 광인이 똥을 쨈(음식)으로 ‘자기 안에 정립하고’ 먹는다 해서 그게 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할 순 없는 일일 테니 말입니다.
나아가 그걸 똥이란 대상으로 정립하는 자아와 쨈이란 대상으로 정립하는 자아가 있다면, 이 두 자아가 모두 옳은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피히테에 따르면 그렇다, 인정될 수 있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걸 똥이란 대상으로 반정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걸 쨈이란 대상으로 반정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많은 자아들이 모두 자기의 대상을 반정립하고 그걸 진리라고 부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구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하고, 누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 게 모두 다 진리가 될 수 있는 ‘혁명적’ 방법인 셈입니다. 이는 진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피히테가 진리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해결하는 데서 뚫고 나가야 할 근원적인 장애는 차라리 ‘차이’와 ‘불일치’를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피히테가 보기에 주체와 대상은 ‘자아’ 안에서 절대적으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와 불일치는 사고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일치를 사고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사고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판단과 ‘다른’(불일치하는) 사실이나 대상을 주목함으로써 비로소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피히테의 철학으로는 다수 지식의 대립과 충돌, 그것을 통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 그 결과로서 새로운 지식의 출현이라는 중요한 사태를 이해하기 곤란해집니다. 즉 진리를 아예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보장하려다 보니 실제로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지식의 변화와 발전을 이해할 여지를 스스로 봉쇄해 버린 것입니다. 딜레마가 ‘해결’된 대신 사상적인 봉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인용
'책 > 철학(哲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4부,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0) | 2022.03.25 |
---|---|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3부, 3. 헤겔 : 정점에 선 근대철학 (0) | 2022.03.25 |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3부, 1. 칸트 : 근대철학의 재건 (0) | 2022.03.24 |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2부, 4. 흄 : 근대철학의 극한 & 5. 근대철학의 위기 (0) | 2022.03.24 |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2부, 3. 버클리 :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0) | 2022.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