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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 3. 니체 : 계보학과 근대철학, 반(反)근대적 비판철학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 3. 니체 : 계보학과 근대철학, 반(反)근대적 비판철학

건방진방랑자 2022. 3. 2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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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비판철학

 

 

다른 한편 자명하고 확실한 것에 대해 퍼붓는 니체의 공격에는 진리라는 목적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 이래 진리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명한 주체뿐만 아니라 자명한 판단, 자명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면 대체 진리란 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도 그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계보학적인 방법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예컨대 어째서 진리가 필요한가?” “어째서 진리를 가지려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왜 지식은 꼭 진리여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의 의미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니체는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욕망하게 하고, 진리를 추구하게 하는 의지가 바로 진리의지입니다. 더불어 그는 이러한 진리의지가 어떤 가공할 효과를 야기할 것인지도 분석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유혹입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진리라는 환상으로의 유혹이고, 내가 추구하고 있는 진리에 다른 거짓된 지식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의지로의 유혹이며, 거짓으로부터 사수되어야 한다는 착각으로의 유혹이고, 이걸 사수하기 위해선 다른 거짓을 전파하는 자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신념으로의 유혹입니다.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 그것은 호르케 수도사의 진리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빚어낸 것입니다. 그가 보기엔 코미디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거짓이었습니다. 그런데 난감한 것은 중세철학이 의존하고 있는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코미디에 대한 철학적 문헌을 남겼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더 나쁜 것은 감추어 둔 그 문헌을 찾아서 읽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 호르케 수도사는 진리의 이름으로, 또한 신의 이름으로 죽음이라는 저주를 내렸던 것입니다. 윌리엄 수도사(앞에서 보았던 중세 후기의 대표적인 유명론오컴의 이름이 바로 윌리엄이었지요)가 그 사건의 주범이 호르케임을 찾아냈을 때, 호르케는 수도원과 함께 그 책을 불살라 버립니다. 자신의 죄많은 육신도 함께 말입니다.

 

또한 니체는 진리란 반박되지 않는 그러한 종류의 오류라고 말합니다.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판단은 그것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진리의지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윌리엄 수도사가 아무리 설득한들 호르케 수도사가 결연히 지키려고 하는 신념을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것이 거짓임을 믿게 할 수도 없으리란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렇다면 진리만큼이나 많은 거짓이 우리들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지식에 대한 질문 자체가 바뀝니다. 근대철학은 오직 진리일 때만 지식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진리(과학)가 아니라면, 더군다나 진리(과학)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어떤 지식도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선 어떤 지식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니체 말처럼 진리란 반박되지 않는 종류의 거짓이라면 대체 이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니체처럼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지만 존재한다고 하면, 그래서 지식이나 판단을 진리의지란 차원에서 파악하게 되면,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지식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가, 어떤 효과를 의지하고(willing)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해집니다. 결국 이 질문을 통해 지식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어떠한 효과를 야기하는가 하는 문제로도 전환됩니다.

 

그리고 니체는 칸트에 의해 완성된 근대적 윤리학, 계몽주의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비판의 망치를 휘두릅니다. 칸트는 우리가 더 이상 누군가를 따르기를 원치 않을 때, 신이나 국가나 아버지를 따르려 하지 않을 때, 우리 자신을 따르도록 요구한다고 합니다. (실천)이성이 바로 이 새로운 복종을 지휘하는 새로운 군주인 셈이지요. 즉 칸트가 말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은 외부의 어떤 강력한 권위들이 무너지게 되자 새로이 권위를 내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이는 결국 우리를 유순하게 복종하도록 설득하는 작용을 할 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복종 속에서만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나타나게 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권력의지를 표현하는 것인 셈입니다.

 

 

섹스의 도덕과 윤리

영어의 good은 두 가지 반대말을 갖는다. 하나는 bad, 다른 하나는 evil. 앞의 경우 좋음’/‘나쁨이라고 번역된다면, 뒤의 경우는 ’/‘으로 번역된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의사가 보기에 몸에 나쁘지만, 그렇다고 은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보기에 그것은 악이다. 계율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섹스도 그렇다. 기독교는 성욕과 섹스를 악으로 간주했다. 즉 그것은 도덕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섹스를 얼마나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심지어 어떤 욕망과 느낌을 느꼈는지 자세하게 고해하도록 신도들에게 요구했다. 반면 소녀경의 중국인에게 섹스는 결코 악이 아니며, 단지 몸의 건강을 위해 적절히 조절해야 할 것이었다. 탄트라 요가를 하던 인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위 그림은 인도 카쥬라호 사원의 미투나 조각상), 그들은 수행을 위해, 득도를 위해 섹스와 성적 에너지를 이용하려 했고, 그래서 저렇게 치밀하고 정교한 기술로 만들어냈다.

니체에 따르면 선/악에서는 하지 말라라는 부정적인 금지로 정의되는 계율이 먼저 있고, 그 금지를 어기지 않는 것이 이 된다. 따라서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하지 마라는 부정적인 권력의지가 작동하며, 항상 힘빼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좋음/나쁨은 다르다. 도덕의 계보학, 니체처럼 스피노자도 이 두 가지를 구별한다. 스피노자는 선/악에서 도덕(moral)이 발생한다면, 좋음/나쁨에서는 윤리(ethic)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좋음이란 어떤 것과의 만남이 나에게 능력의 증가를 야기하는 것인데, 이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윤리학의 목표는 좋은관계에서 야기되는 기쁨을 극대화하고, 나쁜 관계에서 야기되는 슬픔을 극소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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