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언어학과 철학 ‘혁명’ : 근대와 탈근대 사이
1. 언어학과 철학
언어라는 주체
서구의 현대철학은 언어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나 라캉 등을 위시한 프랑스의 현대철학자들은 물론, 비트겐슈타인이나 러셀, 프레게(G. Frege), 오스틴(J. Austin) 등 분석철학으로 묶이는, 하지만 다소 이질적임은 분명한 다수의 철학자들도 그렇고, 하이데거와 그의 사상에 의존하는 해석학도 언어에 대한 분석과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철학에 대한 강의에서 언어학을 언급하는 것은 심정적으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적 동조’만으로 충분히 정당화할 만큼 철학은 너그럽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명하다고 생각한 것조차 결코 그대로 놔두는 법이 없는 게 철학이고 보면 말입니다. 또한 언어학과 철학이 이처럼 밀접한 이유는 단지 정당화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 언어학을 통해 철학이 새로이 사고하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따로 언급할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고등학교 시절, 특히 봄날 점심 먹고 난 직후인 5교시에 꾸벅꾸벅 졸다 야단맞은 경험이 있는 분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학이나 국민윤리처럼 건조하거나 재미없는 시간이라면 더 그렇지요. 수업을 하던 선생님은 학생을 불러 묻습니다. “너 왜 잤어?”
하지만 제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자고 싶어 잔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재미없는 강의나 식곤증 때문에 잠이 든 거겠지요. 그래서 이런 사정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잔 게 아닙니다. 저는 자진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백이면 백 한결같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변명도 말이 좀 되게 해라! 자지긴 뭘 자져. 넌 한글도 몰라?”
맞는 말입니다. 우리 말에는 ‘자다’의 수동형이 없습니다. 즉 ‘자지다’란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다 불려나간 친구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려고 해서 잔 게 아니라, 오는 잠을 어쩔 수 없어서 자게 된 거라는 거지요.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는 ‘잤다’는 말을 써야만 합니다. 마치 자기가 선택해서 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내가 선택해서 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선택해서 자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는 내가 잔 거죠”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 말에 ‘자지다’란 말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저는 가끔 내 삶을 내가 사는 건지 아닌 지구별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매일매일 해야 할 일들이 숨돌릴 틈 없이 꽉 짜여 있고, 그걸 제때 하지 못하면 당장에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거나 욕을 먹지요. 또 나는 좋으나 싫으나 맡겨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저는 “이건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비슷한 사태가 발생합니다. 우리 말에서 ‘산다’는 말은 자동사지요. 따라서 ‘살아진다’ ‘살아졌다’라는 식의 수동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끔 ‘살아진다’ ‘살아졌다’라는 말이 눈에 띄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이는 일본식 표현을 잘못 번역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즉 ‘문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죠.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 am lived’라고는 쓰지 않지요.
우리는 남과 이야기를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혼자 생각할 때조차도 언어를 통해야만 합니다. 언어 없인 사고하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그 언어 자체에 ‘살아지다’ ‘자지다’라는 말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항상 ‘내가 산다’ ‘내가 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산다’는 것이나, ‘내가 잔다’는 것이나 모두 나라는 주체가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즉 잠의 주체, 삶의 주체는 ‘나’라는 말입니다. 내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자고 누가 사는 것이냐는 질문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마치 ‘내’가 없는데 ‘생각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데카르트처럼 ‘내가 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언어 자체에 “내가 그 삶의 주체요. 주인이다”라는 내용이 내장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선 ‘말하다’ ‘생각하다’란 말도 마찬가집니다. 말은 내가 하는 것이고, 생각 역시 내가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려면 지켜야만 하는 문법에 이미 내장되어 있어서, 거기에 따라야만 하는 규칙입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원칙이 확실한 것은 사실 문법적인 규칙 때문이란 말도 가능합니다. 다른 식으로 말할 수 없고, 바로 그래서 다른 식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겁니다. 확실한 것은 다른 식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이니 말입니다. 주어 없는 문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주체’의 존재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여기서 언어와 철학의 관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입장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니체나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듯이, 철학적 확실성이란 문법의 환상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나아가 분석철학자들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이, 모든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문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적 문제란 바로 확실한 것을 찾는 문제거나,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 등에 대한 문제인데, 이는 모두 언어가 제공하는 것(일종의 환상)이며, 따라서 언어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문제가 모두 언어에서 야기되는 것이라면 언어상의 혼란을 제거하고 일관되게 만들면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죠. 심지어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일상 언어가 구제불능이라면, 어떤 편견도 배제된 일관되고 명확한 언어를 만들자고 합니다. 수학적인 기호들로 말입니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의 그림인데, 파이프 밑에 써 있는 문장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맞는 말일까? 왜냐하면 그 위에 있는 건 분명히 파이프 그림이지 파이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이프라는 기호는 실제 파이프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실제 파이프를 지시하는 ‘파이프’라는 기호는 무얼 지시하는 것일까? 지시체와 만날 수 없는 기호는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언어 연구의 이유
다른 한편 언어가 내장하고 있는 이런 특징은, 각각의 언어마다 상이합니다. 다시 말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할 수 있는 것도 달라지고, ‘확실한 것’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번역을 할 때 뚜렷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의사 지바고」로 유명한 파스테르나크의 작품 가운데 My sister life라는 시집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말로 직역하면 나의 누이인 생이 되고, 약간 멋을 부려 번역하면 ‘삶이여, 나의 누이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시집을 체코어로 번역을 하려 하자마자 문제가 생깁니다. 러시아어에서 life의 성은 여성입니다. 그러니 ‘My sister’와 동격이 될 수 있었죠. 그러나 체코어에서는 life가 남성명사랍니다. 그러니 My siste와 동격이 되는 건 문법상 불가능합니다. 굳이 옮기려면 My brother life로 번역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애초의 시집 분위기와는 전혀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여성으로 표현되는 삶에 대한 글과 남성으로 표현되는 삶에 대한 글은 최소한 누이와 형제가 다른 만큼은 다를 게 틀림없으니 말입니다.
만약 작문 시험에서 주어진 제목이 ‘삶이여, 나의 누이여’라면, 당연히 ‘삶이여, 나의 형제여’란 제목이 나왔을 때와 글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첫 번째 것에서는 삶이 가지고 있는 여성적인 이미지, 여성적인 메타포를 주로 사용하겠지만, 두 번째 것에서는 삶이 가진 역동적이고 박력있는 남성적인 이미지를 사용해 써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일상적으로 삶을 남성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체코인)과 여성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러시아인)이 다르게 사고하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마다 사고를 제한하는 나름의 규칙이 서로 다르게 내장되어 있다면, 각각의 언어는 세상을 나름대로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고방법은 이전의 사람들이 세상을 보던 사고방식이 언어에 새겨진 채 남아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어차피 언어에 새겨진 규칙과 사고법에 따라 우리가 사고할 수밖에 없다면, 오히려 언어가 확실한 것을 제공해 주니 주지 못하니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하는지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파악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서 언어와 사고, 언어와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입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 속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이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혹은 사람들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소쉬르나 촘스키의 언어학이 이런 방향에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 아래서 형성된 구조주의자들은 언어를 통해 인간에 대해 다시 사고하려고 합니다. 이와는 다른 흐름으로,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실천에 기초한 새로운 문제설정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오스틴과 같이 의미를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으로 환원해서 파악하려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로 주목할 것은 이 두 번째 입장과 연관된 견해들입니다. 이는 언어와 의미뿐만 아니라, ‘주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근대철학을 해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 코끼리
웨그먼(William Wegman)의 사진이다. 이것은 앞의 마그리트 그림(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과 반대되는 사진처럼 보인다. “이것은 코끼리가 아니다”라고 했다면 이 사진은 그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웨그먼은 개의 신체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 놓곤, 밑에다 ‘코끼리’라고 써 놓았다. 우리는 그게 코끼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양말을 쓴 개일 뿐이다. 그러나 「코끼리」라는 제목은 사태를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 버린다. 마치 변기를 전시해 놓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뒤샹의 작품에서처럼, 대상과 분리된 기호는 거꾸로 대상에 스며들어가 대상을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 ‘코끼리’라는 기호는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가 된다. 지시체가 기호와 만날 수 없다면, 대체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2. 훔볼트 : 언어학적 칸트주의
선험적 주체의 언어학
언어학과 철학이, 언어와 사고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가장 먼저 체계화한 사람은 훔볼트입니다. 외교관이었던 그는 언어에 대한 관심에 덧붙여 직업적인 이유로 다수의 외국어를 비교 연구할 수 있었고, 그걸 통해 민족마다 고유한 사고방식이 각각의 언어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이 개인들의 사고를 제약한다는 사실에 일찍 주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이론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언어는 통일적인 유기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단어를 전제로 하며, 또한 단어를 결합시켜 문장을 만드는 규칙 전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아까 말했던 ‘삶’이란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러시아어에서는 그 단어를 남성명사와 함께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남성적인 이미지를 갖는 다른 단어들과도 함께 사용할 수 없지요. 혹은 ‘자다’ ‘먹다’ 같은 단어와도, ‘길쭉한’ ‘모자’ 같은 단어와도 결합될 수 없습니다. ‘살다’ ‘고통스럽다’ ‘아름답다’ 등 특정한 단어와만 결합될 수 있지요. 즉 그것은 다른 단어들과 이미 하나의 유기적인 그물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이 의미망 속에서만 가능하지요.
둘째, 그는 “언어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즉 언어는 활동의 결과물(Ergon)이 아니라 “분절된 음으로서 인간의 사상을 표현하는 영원한 활동(Energeia)”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이 하는 활동 없인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전체적으로 언어가 사유활동에서 독립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유하는 인간의 활동 없이도 언어가 존재할 수 있는 실체라는 (그 당시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즉 언어는 사유로부터 독립해 있지만, 동시에 사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활동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는 소쉬르나 구조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라틴어를 예로 들어 봅시다. 라틴어는 지금 사어(死語)지요. 즉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여기서 실체론자나 구조주의자들은 말할 겁니다. “그래도 라틴어는 의연히, 그리고 예전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라고 말입니다. 이에 대해 훔볼트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전대로 남아 있는 건 분명하다. 그건 언어가 사유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의연히 남아 있는 것은 고문서나 라틴어로 쓴 예전 문헌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라틴어를 읽을 필요마저 사라진다면 누가 라틴어를 배우겠는가? 더 이상 아무도 그걸 배우지 않는다면 라틴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셋째, 그는 “모든 언어는 하나의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모든 언어는 현실세계를 사고로 전환시키는 각각의 고유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세계를 고유한 범주의 망으로 포섭하며, 판단을 만들어 주는 고유한 문장 형식을 제공한다. 누구나 모국어라는 자신의 안경을 통해 일정한 색조 속에서 세계를 바라본다”고 말합니다(『카비語 연구 서설』), 쉽게 말해 모국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봅시다. 무지개를 보면 우리는 보통 일곱 가지 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지개의 색깔은 진짜 일곱 개일까요? 사실 정확히 보면 색과 색 사이의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약 주황과 빨간색 사이를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빨강과 주황 사이에 주홍이라는 색을 더 넣어서 무지개의 색깔은 여덟 개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무지개의 색깔이 더 적은 경우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쇼나족의 언어에서는 무지개의 색을 네 가지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무지개의 색이 4개라는 말이죠. 또 라이베리아의 바사족은 무지개의 색을 딱 두 가지로 본다고 합니다. 아프리카가 아니더라도 19세기까지 독일에서는 주황색과 보라색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독일어란 안경을 통해서 독일인이 본 무지개는 분명 다섯 가지 색깔이었던 것입니다.
넷째, 동일한 국민의 언어, 혹은 한 민족의 언어에는 비슷한 종류의 주관성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각각의 언어는 나름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뜻이죠. 쉽게 말하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나 국민은 각각 고유한 색깔의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국어라는 안경의 색깔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눈에 들어오는 세상도 국민 민족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은 상이한 세계관을 흡수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우리말에서 ‘결혼하다’라는 말은 목적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어에서 marry라는 말은 목적어를 가지지요. “He married me” 란 문장을 직역하면 “그는 나를 결혼시켰다”입니다. 우리 말에선, 그 가 강제로 나를 결혼시킨 아버지를 지칭한다면 모를까, 이런 문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나와 결혼했다”가 정상적인 말이지요. 이처럼 다른 언어는 결혼에 대한 다른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각각의 모국어에 새겨져 있는 사고구조는 각 민족정신에 따라 고유한 개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언어는 ‘민족정신의 외적인 표현’이라는 거죠. 그의 말에 따르면 “민족언어는 민족정신이며, 민족정신은 민족언어”라고 합니다. 이런 얘기는 일제 시대의 조선어정책을 두고 종종 들어본 말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일본어에서 ‘~(ら)れる’는 ‘~함을 당하다’란 의미를 갖는 수동의 조동사입니다. 그런데 일본어에는 이 수동의 조동사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오다’ ‘가다’ ‘되다’ 같은 자동사에도 수동을 붙여 사용하고, ‘(전화를) 걸다’같은 동사에도 붙여 (전화가 걸려와) 귀찮거나 불리한 경우를 표현하며, 심지어 사역동사에도 붙여서 사용합니다. 우리 같으면 했다고 할 것도 ‘하도록 함을 당했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지요.
반면 우리말의 ‘하게 하다’나 ‘시키다’라는 말에는 수동의 의미를 갖는 어미를 붙일 수 없습니다. 즉 ‘하도록 함을 당했다’나 ‘시켜지다’라는 표현은 한국어 어법에는 맞지 않습니다. 물론 한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일어책을 번역하면 이런 문장을 그대로 직역하지요. ‘되어지다’도 마찬가집니다. ‘시켜진다’라는 말에는 내가 누구를 시킨다는 것 자체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강제해서 할 수 없이 하게 된 것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이는 내가 시키는 행위조차도 다른 요인에 귀속시키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키는 건 시키는 것일 뿐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새겨진 언어와 크게 대조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그는 “주체(subject)의 활동은 사유 속에서 대상을 형성한다”고 합니다. 나아가 “이 사유는 언어를 통해서 행해지기 때문에 결국 대상이란 언어를 통해서만 형성된다”는 것을 추가합니다.
일례로 치즈의 종류를 들어 봅시다. 요리를 즐기는 프랑스에서는 치즈의 종류가 700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용도와 맛, 만드는 방법 등에 따라 극도로 자세한 치즈의 이름이 다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 치즈의 맛을 즐기는 그들의 생활에서 기인한 거겠지요. 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일반 치즈와 피자용 치즈 등이 전부고, 더 나아간다 해도 해태치즈, 매일치즈 등과 같은 고유명사 이상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 700가지 치즈를 맛보고 이름을 배운다 해도 실제로 치즈 맛에 둔한 우리로서는 그 미세한 차이를 별로 유의미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이는 주체의 생활, 활동 속에서 치즈라는 대상이 형성되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입니다. 어떤 대상에 민감한 민족일수록 그에 대해 더 미세하고 많은 대상들을 형성합니다. 바로 언어를 통해서 말입니다.
주체의 활동이 대상을 형성한다는 이 명제는 “대상은 주관이 형성하는 것이고 판단은 주관의 작용”이라는 칸트의 견해를 그대로 빌려 온 것입니다. 즉 훔볼트가 칸트의 견해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훔볼트는 선험적 주체가 사고의 기초라는 칸트의 견해에 명시적으로 동조합니다. 그리고 바로 언어(모국어)야말로 주체들이 그 위에서 사고하는 일종의 ‘선험적 구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사고도 언어(모국어)를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며, 따라서 모국어에 내장된 세계관 속에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적 활동과 언어는 결합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후 훔볼트의 사상을 계속 발전시킨 바이스게르버(L. Weisgerber)는 위의 말과 관련하여 언어(모국어)를 “세계를 변화시켜 인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세계를 영유하고 전유하는 방식이며 내적 조직”이라고 말합니다(모국어와 정신형성).
따라서 만약 칸트가 훔볼트의 연구를 참조할 수 있었다면 순수지성의 선험적 형식을 ‘범주’라고 하지 않고 ‘언어’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사실 그게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훔볼트의 칸트주의는 매우 생산적인 보충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훔볼트처럼 언어구조 속에서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려는 노력 또한 정확하게 칸트적인(근대적인) 선험적 주체를 구성하는 결과로 귀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훔볼트는 언어(모국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제약하며, 그래서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내장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써 언어와 사고구조 간의 긴밀한 관계가, 그리고 사고에 대한 언어의 선차성(先次性)과 우위성이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명제를 훔볼트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라는 개념에 이어 붙입니다. 즉 언어란 그걸 사용하는 주체들 모두에게 공통된 사고의 기반이며, 선험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종종 지칭되는 훔볼트는 칸트적인 선험적 주체를, 결국은 새로운 주체철학을 언어를 통해 재건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불어 훔볼트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선험적 구조로서 언어의 연구가 바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언어학은 인간에 대한 과학,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질서를 만들어내는가를 연구하는 과학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훔볼트의 언어학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근대성 안에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법의 논리학, 논리학의 문법
지금까지는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말했는데, 이것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재미있는,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가 언어에 의해, 언어적 규칙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보았지요? 언어적 규칙을 대략 ‘문법’이란 말로 대표해서 씁시다. 그러면 문법적 규칙이 달라지면 사고 규칙도, 사고 내용도 달라진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점을 잊고 데카르트처럼 문법적 규칙에 불과한 것을 자명하고 확실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법의 환상에 빠져버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논리학에 대해서도 이제는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느 경우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사고의 법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논리학 역시 문법적 규칙과 무관한 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문법적 규칙을 일반화하여 사고규칙으로 정립한 것이 바로 논리학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논리학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했는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해킹(I. Hacking)은 『철학에서 언어가 왜 중요한가?』라는 책에서, 서구의 논리학과 철학 분야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중요한 책으로서 『포르 루아얄(Port-Royal) 논리학』을 꼽습니다. 포르-루아얄은 프랑스의 수도원이 있던 지명이고, 『포르 루아얄 논리학』은 16세기에 이 수도원에 있던 수도사들이 저술한 책입니다. 이 책은 이후 논리학의 발전은 물론이고, 현대에 와서도 언어학(특히 촘스키)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친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기지고 있는 기본적인 발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고란 개개의 표상들, 예를 들면 ‘토끼’ ‘귀’ ‘길다’ 같은 표상들을 질서지우고 결합하는 것이며, 그래서 “토끼는 귀가 길다”와 같은 판단을 만들어내는 규칙이 바로 논리지요. 즉 논리학이란 사고의 규칙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통해서 표상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고 규칙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논리학이란 언어가 표상들을 결합시키는 일반적인 규칙과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논리학의 법칙은 문법적 규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논리학의 법칙이란 문법 규칙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한 것이란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말을 바꾸면, 문법적 규칙 즉 표상들을 결합하는 언어적 규칙이 전혀 다르다면, 전혀 다른 논리학을 가질 수도 있음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서구의 논리학적 규칙이 성립되는 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도, 참조되지도 못한 언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는 언어가 다르면 사고방식이 달라질 것이라는 훔볼트의 주장과도 일치합니다.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영어든 독일어든, 아니면 프랑스어든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공통적으로 꼽힐 것이 있습니다. 영어의 be동사, 독일어의 sein 동사, 프랑스어의 être 동사가 그것입니다. 알다시피 이들은 우리말로 하면 ‘있다’와 ‘이다’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동사가 주어와 서술어를 관계짓고, 문장 전체를 연결합니다. 또한 서구어에서 모든 동사는 être 동사로 환원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르 루아얄 논리학』에서 한 부를 할당하고 있는 동사의 이론이 바로 être 동사에 대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우리 말에서 ‘있다’와 ‘이다’는 분명 다른 단어고, 중국어에서도 그것은 ‘有’와 ‘是’라는 다른 단어며, 일본어에서도 그것은 ‘ある’/‘いる’와 ‘である’라는 다른 단어입니다(오히려 이 점에서 동양의 언어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이데거는 자신을 방문해서 존재론에 대해 질문한 일본인 철학자에게 sein 동사도 없는 언어로 어떻게 ‘존재론’을 연구하겠느냐고 했다 합니다. 즉 ‘있다’와 ‘이다’를 동시에 의미하는 단어가 없다면 존재론을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일종의 ‘문법의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말에서 sein 동사(be동사)로 사고하는 사람들과 ‘있다’/ ‘이다’를 구분해서 사고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고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으리란 결론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사의 이론이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푸코에 따르면, be(être) 동사는 무언가를 긍정하는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The tree is green이라면 나무(tree)와 green이 동등한 관계에 있음을 표시한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tree=green 이란 거고, =의 기능을 be동사(étre 동사)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동사의 이론에서 가장 중심되는 내용입니다. 논리학의 동일률이 이러한 동사의 기능과 무관하지 않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컨대 우리 말은 “나무가 푸른 상태에 있다”가 아니라 나무는 푸르다”일 뿐입니다. 물론 ‘나무=푸름’이란 등식은 여기서도 보이지만 우리 말에선 ‘=’을 위해 어떤 동사도 동원되지 않습니다. 형용사 자체가 용언으로서 술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동사 없이는 어떤 문장도 생각할 수 없는 서구어와 매우 다른 특징을 갖습니다. 푸코가 『포르-루아얄 논리학』을 인용해 언어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서 강조한 ‘동사의 이론’은 여기에서 빗나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동사의 동일화 기능에 기초한 논리학의 동일률 역시 다르게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실제로 서구의 논리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법칙조차도 진리이거나 자명한 게 결코 아니란 점은 자주 지적되어 왔습니다. 니체는 동일률이나 모순률이 진리란 것을, 혹은 누구나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대체 누가 증명한 적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아무도 그것의 보편타당성을 입증할 수 없으면서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학의 규칙, 여기에는 진리를 향한 의지조차 없으며, 단지 모든 걸 동일한 틀에 꿰어맞추고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만이 있을 뿐이라고 니체는 갈파합니다.
한편 동일률, 모순율과 함께 가장 기본적인 규칙으로 간주되어온 배중률은 직관주의의 대표자인 브루베르(L, Brouwer)라는 수학자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배중률이란 어떤 게 A가 아니면 ~A(not A)지 그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칠게 말해 “기면 기, 아니면 아니지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배중률은 왜 부정되었을까요?
원주율인 π의 값을 컴퓨터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π=3.1415926535897932384626…… 134999999837……
π는 아시다시피 무리수여서 불규칙하게 수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소수점 아래 762번째 자리부터 9가 연속해서 6개가 나옵니다. 그런데 무한히 계속되는 이 수의 배열에서 다시 9가 연속해서 6개 나오는 경우가 있을까요? 혹은 이 수의 배열에서 9가 연속해서 10개가 나오는 경우가 있진 않을까요? 확률상으론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수가 무한히 계속되므로 안 나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수가 나올 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하기 곤란합니다. 바로 여기서 배중률은 난파하고 맙니다. 이처럼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이제 모순률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주장도 모두 거짓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법을 달리하는 우리의 언어와 사고구조를 단지 서구의 논리학적 규칙에 끼워맞추려는 시도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좀더 나아간다면 우리의 언어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우리의 논리학적 규칙조차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