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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제5부 언어학과 철학 ‘혁명’ : 근대와 탈근대 사이 - 1. 언어학과 철학, 언어라는 주체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5부 언어학과 철학 ‘혁명’ : 근대와 탈근대 사이 - 1. 언어학과 철학, 언어라는 주체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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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언어학과 철학 혁명’ : 근대와 탈근대 사이

 

1. 언어학과 철학

 

 

언어라는 주체

 

 

서구의 현대철학은 언어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나 라캉 등을 위시한 프랑스의 현대철학자들은 물론, 비트겐슈타인이나 러셀, 프레게(G. Frege), 오스틴(J. Austin) 등 분석철학으로 묶이는, 하지만 다소 이질적임은 분명한 다수의 철학자들도 그렇고, 하이데거와 그의 사상에 의존하는 해석학도 언어에 대한 분석과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철학에 대한 강의에서 언어학을 언급하는 것은 심정적으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적 동조만으로 충분히 정당화할 만큼 철학은 너그럽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명하다고 생각한 것조차 결코 그대로 놔두는 법이 없는 게 철학이고 보면 말입니다. 또한 언어학과 철학이 이처럼 밀접한 이유는 단지 정당화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 언어학을 통해 철학이 새로이 사고하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따로 언급할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고등학교 시절, 특히 봄날 점심 먹고 난 직후인 5교시에 꾸벅꾸벅 졸다 야단맞은 경험이 있는 분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학이나 국민윤리처럼 건조하거나 재미없는 시간이라면 더 그렇지요. 수업을 하던 선생님은 학생을 불러 묻습니다. “너 왜 잤어?”

 

하지만 제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자고 싶어 잔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재미없는 강의나 식곤증 때문에 잠이 든 거겠지요. 그래서 이런 사정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잔 게 아닙니다. 저는 자진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백이면 백 한결같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변명도 말이 좀 되게 해라! 자지긴 뭘 자져. 넌 한글도 몰라?”

 

맞는 말입니다. 우리 말에는 자다의 수동형이 없습니다. 자지다란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다 불려나간 친구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려고 해서 잔 게 아니라, 오는 잠을 어쩔 수 없어서 자게 된 거라는 거지요.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는 잤다는 말을 써야만 합니다. 마치 자기가 선택해서 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내가 선택해서 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선택해서 자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는 내가 잔 거죠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 말에 자지다란 말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저는 가끔 내 삶을 내가 사는 건지 아닌 지구별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매일매일 해야 할 일들이 숨돌릴 틈 없이 꽉 짜여 있고, 그걸 제때 하지 못하면 당장에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거나 욕을 먹지요. 또 나는 좋으나 싫으나 맡겨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저는 이건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비슷한 사태가 발생합니다. 우리 말에서 산다는 말은 자동사지요. 따라서 살아진다’ ‘살아졌다라는 식의 수동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끔 살아진다’ ‘살아졌다라는 말이 눈에 띄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이는 일본식 표현을 잘못 번역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문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죠.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 am lived’라고는 쓰지 않지요.

 

우리는 남과 이야기를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혼자 생각할 때조차도 언어를 통해야만 합니다. 언어 없인 사고하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그 언어 자체에 살아지다’ ‘자지다라는 말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항상 내가 산다’ ‘내가 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산다는 것이나, ‘내가 잔다는 것이나 모두 나라는 주체가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즉 잠의 주체, 삶의 주체는 라는 말입니다. 내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자고 누가 사는 것이냐는 질문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마치 가 없는데 생각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데카르트처럼 내가 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언어 자체에 내가 그 삶의 주체요. 주인이다라는 내용이 내장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선 말하다’ ‘생각하다란 말도 마찬가집니다. 말은 내가 하는 것이고, 생각 역시 내가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려면 지켜야만 하는 문법에 이미 내장되어 있어서, 거기에 따라야만 하는 규칙입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원칙이 확실한 것은 사실 문법적인 규칙 때문이란 말도 가능합니다. 다른 식으로 말할 수 없고, 바로 그래서 다른 식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겁니다. 확실한 것은 다른 식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이니 말입니다. 주어 없는 문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주체의 존재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여기서 언어와 철학의 관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입장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니체나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듯이, 철학적 확실성이란 문법의 환상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나아가 분석철학자들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이, 모든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문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적 문제란 바로 확실한 것을 찾는 문제거나,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 등에 대한 문제인데, 이는 모두 언어가 제공하는 것(일종의 환상)이며, 따라서 언어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문제가 모두 언어에서 야기되는 것이라면 언어상의 혼란을 제거하고 일관되게 만들면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죠. 심지어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일상 언어가 구제불능이라면, 어떤 편견도 배제된 일관되고 명확한 언어를 만들자고 합니다. 수학적인 기호들로 말입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의 그림인데, 파이프 밑에 써 있는 문장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맞는 말일까? 왜냐하면 그 위에 있는 건 분명히 파이프 그림이지 파이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이프라는 기호는 실제 파이프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실제 파이프를 지시하는 파이프라는 기호는 무얼 지시하는 것일까? 지시체와 만날 수 없는 기호는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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