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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5부 언어학과 철학 ‘혁명’ : 근대와 탈근대 사이 - 4. 비트겐슈타인 : 언어게임과 언어적 실천, 구조언어학의 난점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5부 언어학과 철학 ‘혁명’ : 근대와 탈근대 사이 - 4. 비트겐슈타인 : 언어게임과 언어적 실천, 구조언어학의 난점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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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트겐슈타인 : 언어게임과 언어적 실천

 

 

구조언어학의 난점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언어와 인간에 대한, 그리고 구조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즉 새로운 사고영역을 개척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또 언어학으로서 설명해야 할, 그러나 구조주의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대상(지시체) 사이에 어떤 실제적 연관을 상정하는 실증주의적 입장과 비교해 구조언어학의 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컨대 논리실증주의와 유사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던 러셀은, 만약 치즈에 대한 비언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떤 사람도 치즈라는 낱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시체 즉 대상과 기호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며, 기호는 서로 긴밀하게 엮인 하나의 체계(랑그)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입장에선 생각을 달리합니다. 그 낱말은 다른 기호들에 의해 정의되며, 관계된 다른 기호들(예를 들면, 우유, 버터 등)과의 차이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지요. 야콥슨에 따르면, 치즈라는 말은 영어로 커드로 만들어진 음식’(food made of pressed curd)입니다. 여기서 Curd는 응유(응결된 우유)라는 뜻이니, 치즈는 응결된 우유로 만든 음식이라는 말입니다. 야콥슨은 우리가 응유라는 말만 알고 있어도 치즈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러셀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사태는 야콥슨의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응유라는 말을 모른다면 어쩌겠습니까? ‘응유를 알려면 우유를 알아야 하고, 응결이란 말을 알이야 합니다. 또 우유를 알려면 소를 알아야 하고, 젖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나 젖을 알려면 또 무엇을 알아야 하고 등등, 결국 한 단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선 사전 전체를 뒤져야 할 판입니다. 물론 그러다 보면 다시 치즈우유로 돌아올 게 뻔하지만 말입니다. 이래서 뒤에 다시 보겠지만,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합니다. 라캉의 명제와 가치는 달라지지만, 우리는 다른 기호를 통해서 기호의 의미에 가 닿기 힘들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러셀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는 야콥슨의 주장은 환상입니다. 이를 좀더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구조주의 언어학의 가장 큰 난점 중 하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언어를 어떻게 배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외국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구조언어학에 따르면 기호의 의미는 기호사용 규칙과 다른 기호들을 알아야 정해집니다. 기호의 의미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이미 아는 다른 기호가 없다면, 어떠한 기호의 의미도 알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영어를 배우려 한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예컨대 그가 mother란 단어를 알려 한다 합시다. 그게 어머니란 뜻인지 다른 조선인이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영국인도 mother에 해당하는 조선어를 모르니 못 가르쳐 주지요. 사전을 찾으면 “a female parent of a child or animal”이라고 나옵니다. mother보다 더 난감한 단어들이 죽 이어져 나오니 이걸 어찌 알겠습니까? female을 뒤지고, parent를 찾아내고 childanimal을 찾아본다고 해서 이 말을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언어사용 규칙과 다른 단어들을 이미 알고 있지 않다면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그것을 배워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조주의자들 생각대로라면, 마치 성문을 찾아 성 주변만 배회하다 끝나는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 조선인은 영어의 주위만 빙빙 돌다 끝나고 말 겁니다.

 

요컨대 구조언어학에 따르면, 약속된 기호의 체계를 모르면 기호의 의미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사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영어의 랑그를 모르는 사람이 mother란 기호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그만 기호의 의미도 모르면서 기호의 체계를 알 수는 없습니다. mother도 모르면서 영어라는 언어(랑그)를 알 순 없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배우는 데 닭(랑그)이 먼저인지, 달걀(개별 기호)이 먼저인지 선택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이런 때 실증주의자라면 신이 나서 끼여들지도 모르겠습니다. mother란 말을 어머니를 가리키면서 말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이를 지시적 정의라고 합니다. 간편한 방법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영국인이 뛰어가는 흰 토끼 한 마리를 보고 ‘rabbit’이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럼 영어를 배우는 조선인은 그게 ‘rabbit=토끼라고 생각할까요? 혹시 ‘rabbit=뛰다, 달아나다라고 생각하진 않을까요? 아니면 그 말을 한 마리란 뜻이나, ‘희다란 뜻으로 볼 순 없을까요? 심지어 귀가 길다는 말을 가르쳐 주려는 걸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너무 고지식하게 군다고 할지도 모르니 좀 양보하여, ‘토끼라고 알아듣는다고 합시다. 그런데 만약 nowwhen, general이란 말이라면 어떨까요? 이 역시 러셀처럼 지시적 정의를 사용하면 될까요? 이제 여기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으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

 

 

남과 여

위 그림은 화장실에 붙어 있는 기호다. 라캉이 기차를 타고 가다 이런 식의 기호를 보았다면서 써먹은 것이다. 소쉬르의 영향을 받아서 기호와 대상은 무관하며, “기표는 기의에 가 닿지 못한 채 그 위로 미끄러진다고 했던 라캉이 보기에, 화장실에 붙은 라는 기표는 기호의 자의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확실히 ’/‘라는 기표가 문 위에 붙어 있으면, 우리는 거기서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화장실을 떠올린다. 그런데 만약 그 문과 기표가 있는 곳에 목욕탕이라고 쓴 간판이 있었다면, 우리는 ’/‘에서 화장실이 아니라 남탕과 여탕을 떠올릴 것이다. 기표의 의미는 하나로 고정된 게 아니라 이렇게 이웃한 기표들과의 놀이에 의해 규정된다. 소쉬르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고, 라캉이나 데리다는 더욱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간판 대신 옷과 진열대가 있었다면? 우리는 어느새 란 말에서 탈의실을 떠올릴 것이다. 다른 이웃한 기표가 없어도 그 의미의 변화를 알아차리기에 충분하다.

이제 기표는 다른 기표만이 아니라 이웃한 모든 것과 놀이한다고 바꿔 말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표시가 된 목욕탕의 문이 잠겨 있다면? 우리는 주인을 불러내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월요일이란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또 다시 기호의 놀이. 그러나 우리가 그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이 월요일이란 기표 때문일까? 오히려 그 반대는 아닐까? 문을 열 수 없다는, 다시 말해 목욕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월요일이란 말을 휴일이란 말에 연결시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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