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푸코 : ‘경계허물기’의 철학
세 명의 푸코
푸코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대부 중 한사람으로 간주됩니다. 혹은 적어도 근대적 합리주의에 반대한 반합리주의자, 계몽적 이성의 독재에 항의한 반계몽주의자로 간주됩니다. 이런 사정은 우리의 경우에 더욱 단순화되고 있지만, 서구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해 ‘구조주의자’라고 평하는 것 만큼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란 평가에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정은 그의 친한 친구였던 들뢰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들뢰즈의 경우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란 평가에 대해서 매우 적대걱 입장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 가운데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근본적인 문제설정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시류 타는 평가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드러내게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저는 제 나름대로 철학자로서 푸코의 문제설정이 어떤 건지, 무엇을 하려고 그토록 복잡하고 ‘희한한’ 역사를 썼던 것인지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푸코가 근대적 문제설정과의 사이에 만드는 긴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푸코의 사상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흔히 ‘고고학’이란 이름으로 대변되는 시기입니다. 이는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고전주의 시대 광기의 역사」에서 출발하여 출세작인 『말과 사물』을 통해 『지식의 고고학』에 이르는 시기지요. 이 시기에 그는 정신병리학(『광기의 역사』)이나 생리학(『병원의 탄생』), 혹은 생물학ㆍ정치경제학ㆍ언어학 등의 인문과학(말과 사물) 등 다양한 지식을 둘러싼 관계들의 역사를 연구합니다. 특히 당시 혹은 지금, 진리요 과학이라고 평가되는 지식에 의해 가려진 침묵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어떻게 해서 ‘침묵’ 속에 갇히게 되었나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침묵하는 소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문학이나 미술 등 다양한 문화적 ‘유물’을 통해 과학이나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잊혀진 과거를 드러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을 ‘고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담론의 질서』에서 시작하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에 이르는 시기로, 흔히 ‘계보학’이란 이름으로 요약되는 시기지요. 앞서 니체에 관한 부분에서도 언급했지만, 계보학’이란 모든 것들에서 가치와 권력의지를 찾아내는 작업이며 방법입니다. 형벌과 감옥의 역사를 통해서(『감시와 처벌』), 혹은 성이나 성욕에 관한 담론과 장치들을 통해서(『성의 역사 1』) 그것들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을 드러내고 그 권력의 효과를 분석하는 게 이 시기 푸코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셋째는 푸코의 말년으로서 『성의 역사 2』와 『성의 역사 3』에 집약되어 있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권력과 자아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예컨대 쾌락의 활용을 통해 어떻게 자아를 구성하는지, 양생술 같은 자기 배려의 기술을 통해 자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연구합니다. 이는 권력을 통해 자아가 구성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바보들의 배
보쉬(Bosch)의 그림 「바보들의 배」(Narrenschiff)
바보들의 배는 중세말에 쫓아내고 싶은 광인들을 태워서 이곳저곳을 항해하게 했던 배였는데, 15세기 말 이래 서양의 문학이나 미술 등에서 집중적으로 형상화된 주제였다. 여기서 ‘바보’란 일종의 광인이기도 한데, 이러한 광기는 미친 사랑의 정열이나 모든 것을 웃어넘기는 태도, 어리석음, 집착, 망상, 풍자 등을 포함하는 아주 복합적인 개념이었다. 그것은 멕베스나 햄릿의 광기처럼 죽음이나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돈키호테의 광기처럼 웃음을 야기하기도 하며, 리어왕의 어릿광대처럼 미련하게 세태에 반하여 버림받은 자의 동무가 되어주기도 하는 극히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었다. 르네상스인들은 이러한 광기와 우매함에서 일종의 두려움과 위험, 혹은 경멸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삶에 불가결한 요소로 보았다. 에라스무스는 『우신(Narrheit) 예찬』에서 우신의 입을 빌려 우매함을 절멸시키려는 태도는 삶 자체까지도 파괴할 것이라고 설파한다. 보쉬의 ‘나렌쉬프’는 고깃덩어리를 달아놓고 마이크 삼아 노래하고, 그 위아래에서 어리석고 기이한 행동들을 하는 이 우매한 광인들을 싣고 간다. 그것은 자기들의 ‘이성’을 찾아 헤매는 광인들을 실은 순례선이었던 셈이다. 이런 식으로 이 시기의 사람들은 광인이나 ‘바보’에 대해 불안해 하고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그것의 미덕과 혼란스런 힘을 인정했고, 따라서 그들은 갇히지 않았고, 쫓겨나는 경우에도 마을 사이를, 사람들 사이를 떠다니는 존재였다. 마치 돈키호테가 끊임없이 비웃음을 사면서도 온 세상을 떠돌며 기사도 순례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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