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비트겐슈타인 : 언어게임과 언어적 실천
구조언어학의 난점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언어와 인간에 대한, 그리고 구조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즉 새로운 사고영역을 개척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또 언어학으로서 설명해야 할, 그러나 구조주의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대상(지시체) 사이에 어떤 실제적 연관을 상정하는 실증주의적 입장과 비교해 구조언어학의 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컨대 논리실증주의와 유사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던 러셀은, 만약 치즈에 대한 비언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떤 사람도 ‘치즈’라는 낱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시체 즉 대상과 기호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며, 기호는 서로 긴밀하게 엮인 하나의 체계(랑그)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입장에선 생각을 달리합니다. 그 낱말은 다른 기호들에 의해 정의되며, 관계된 다른 기호들(예를 들면, 우유, 버터 등)과의 차이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지요. 야콥슨에 따르면, 치즈라는 말은 영어로 ‘커드로 만들어진 음식’(food made of pressed curd)입니다. 여기서 Curd는 응유(응결된 우유)라는 뜻이니, 치즈는 응결된 우유로 만든 음식이라는 말입니다. 야콥슨은 우리가 ‘응유’라는 말만 알고 있어도 치즈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러셀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사태는 야콥슨의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응유’라는 말을 모른다면 어쩌겠습니까? ‘응유’를 알려면 우유를 알아야 하고, 응결이란 말을 알이야 합니다. 또 우유를 알려면 소를 알아야 하고, 젖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나 젖을 알려면 또 무엇을 알아야 하고 등등, 결국 한 단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선 사전 전체를 뒤져야 할 판입니다. 물론 그러다 보면 다시 ‘치즈’나 ‘우유’로 돌아올 게 뻔하지만 말입니다. 이래서 뒤에 다시 보겠지만,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합니다. 라캉의 명제와 ‘가치’는 달라지지만, 우리는 다른 기호를 통해서 기호의 의미에 가 닿기 힘들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러셀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는 야콥슨의 주장은 환상입니다. 이를 좀더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구조주의 언어학의 가장 큰 난점 중 하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언어를 어떻게 배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외국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구조언어학에 따르면 기호의 의미는 기호사용 규칙과 다른 기호들을 알아야 정해집니다. 기호의 의미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이미 아는 다른 기호가 없다면, 어떠한 기호의 의미도 알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영어를 배우려 한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예컨대 그가 mother란 단어를 알려 한다 합시다. 그게 어머니란 뜻인지 다른 조선인이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영국인도 mother에 해당하는 조선어를 모르니 못 가르쳐 주지요. 사전을 찾으면 “a female parent of a child or animal”이라고 나옵니다. mother보다 더 난감한 단어들이 죽 이어져 나오니 이걸 어찌 알겠습니까? female을 뒤지고, parent를 찾아내고 child와 animal을 찾아본다고 해서 이 말을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언어사용 규칙과 다른 단어들을 이미 알고 있지 않다면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그것을 배워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조주의자들 생각대로라면, 마치 성문을 찾아 성 주변만 배회하다 끝나는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 조선인은 영어의 주위만 빙빙 돌다 끝나고 말 겁니다.
요컨대 구조언어학에 따르면, 약속된 기호의 체계를 모르면 기호의 의미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사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영어의 랑그를 모르는 사람이 mother란 기호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그만 기호의 의미도 모르면서 기호의 체계를 알 수는 없습니다. mother도 모르면서 영어라는 언어(랑그)를 알 순 없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배우는 데 닭(랑그)이 먼저인지, 달걀(개별 기호)이 먼저인지 선택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이런 때 실증주의자라면 신이 나서 끼여들지도 모르겠습니다. mother란 말을 어머니를 가리키면서 말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이를 ‘지시적 정의’라고 합니다. 간편한 방법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영국인이 뛰어가는 흰 토끼 한 마리를 보고 ‘rabbit’이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럼 영어를 배우는 조선인은 그게 ‘rabbit=토끼’라고 생각할까요? 혹시 ‘rabbit=뛰다, 달아나다’라고 생각하진 않을까요? 아니면 그 말을 ‘한 마리’란 뜻이나, ‘희다’란 뜻으로 볼 순 없을까요? 심지어 ‘귀가 길다’는 말을 가르쳐 주려는 걸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너무 고지식하게 군다고 할지도 모르니 좀 양보하여, ‘토끼’라고 알아듣는다고 합시다. 그런데 만약 now나 when, general이란 말이라면 어떨까요? 이 역시 러셀처럼 ‘지시적 정의’를 사용하면 될까요? 이제 여기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으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
▲ 남과 여
위 그림은 화장실에 붙어 있는 기호다. 라캉이 기차를 타고 가다 이런 식의 기호를 보았다면서 써먹은 것이다. 소쉬르의 영향을 받아서 기호와 대상은 무관하며, “기표는 기의에 가 닿지 못한 채 그 위로 미끄러진다”고 했던 라캉이 보기에, 화장실에 붙은 ‘남’과 ‘여’라는 기표는 기호의 자의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확실히 ‘남’/‘여’라는 기표가 문 위에 붙어 있으면, 우리는 거기서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화장실을 떠올린다. 그런데 만약 그 문과 기표가 있는 곳에 ‘목욕탕’이라고 쓴 간판이 있었다면, 우리는 ‘남’/‘여’에서 화장실이 아니라 남탕과 여탕을 떠올릴 것이다. 기표의 의미는 하나로 고정된 게 아니라 이렇게 이웃한 기표들과의 놀이에 의해 규정된다. 소쉬르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고, 라캉이나 데리다는 더욱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간판 대신 옷과 진열대가 있었다면? 우리는 어느새 ‘남’과 ‘여’란 말에서 탈의실을 떠올릴 것이다. 다른 이웃한 기표가 없어도 그 의미의 변화를 알아차리기에 충분하다.
이제 기표는 다른 기표만이 아니라 이웃한 모든 것과 놀이한다고 바꿔 말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남’/‘여’ 표시가 된 목욕탕의 문이 잠겨 있다면? 우리는 주인을 불러내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월요일’이란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또 다시 기호의 놀이. 그러나 우리가 그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이 ‘월요일’이란 기표 때문일까? 오히려 그 반대는 아닐까? 문을 열 수 없다는, 다시 말해 목욕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월요일이란 말을 휴일이란 말에 연결시키는 게 아닐까?
실천을 통한 언어학습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의 시기로 나누어집니다. 초기의 사상은 『논리철학논고」라는 책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성전처럼 떠받드는 고전이 되는 책이지요. 한편 후기의 사상은 사후에 출판된 『철학적 탐구』라는 책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초기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론과 생각들을 해체하고 부정하며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선회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이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은 반영론과 비슷합니다. ‘그림이론’이라고도 하는데, 단어는 사물의 ‘이름’이고, 문장은 어떤 상황에 대한 ‘그림’이라고 합니다. 명제들은 물질이 원자로 나누어지듯이, 요소명제로 나누어지며, 이 요소명제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리고 명제 전체의 참과 거짓은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라고 합니다. 즉 고등학교 수학책에 나오는 진리표를 통해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는 거지요.
반면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단어가 사물의 ‘이름’이라는 것부터 부정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고’나 ‘언제’처럼 이름 아닌 것이 대부분이란 거지요. 그렇다면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단어의 용법(use)이라고 합니다. 즉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의미는 결정된다는 겁니다.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법(용법)을 배우는 것이란 말이죠. 예컨대 아까 말한 mother나 now, when, general 등 모든 단어를 그 영국인이 사용하는 것을 반복해서 보고, 그걸 어떤 경우에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배움으로써 그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구조언어학과 실증주의의 간극을 가볍게 뛰어넘어 버리는 새로운 견해입니다.
잠시 water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알다시피 ‘물’이란 뜻이지요. 그런데 똑같은 이 한마디의 말이 그게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예컨대 만약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물병을 가리키면서 “water”라고 했다면 ‘이건 물이야’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water라는 단어를 배운 꼬마가 밥을 먹다가 “water”라고 말한다면 그건 ‘물 줘’라는 뜻이겠지요. 또 낙타를 타고 긴 사막을 가던 어떤 대상(隊商)이 “water”라고 말하는 것은 ‘물이다! 이젠 살았다’라는 뜻입니다. 반면 홍수가 나 지붕 위까지 피신했던 사람이 “water”라고 소리친다면 그건 아마 ‘물이 여기까지 왔다. 이젠 죽었구나!’라는 뜻일 겁니다. 또 공사장에서 “water!”라고 외치는 것은 ‘여기 물 좀 부어줘’라는 뜻이겠지요.
이런 의미의 차이는 동일한 단어가 상이한 맥락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물론 구조주의자라면 단어들의 응축이 이뤄지는 경우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동일한 단어에 상이한 단어들이 응축되고, 또 그 동일한 단어를 통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응축된 상이한 단어를 읽어내고 이해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언어를 어떻게 습득하는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언어를 배우려면 최소한 두 가지 요소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는 단어들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입니다. 구조주의자 입장에선, 단어의 의미는 랑그라는 전체적 규칙을 알아야, 그리고 다른 단어들을 알아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배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반면 기본적인 단어들도 모르면서 랑그를 습득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랑그를 배우려면 단어들의 의미부터 먼저 배워야 합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이나 구조언어학에선 이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단어를 몰라도 규칙을 배울 수 있으며, 규칙을 몰라도 단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용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실천을 반복함으로써 배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규칙 역시 마찬가집니다. 소쉬르가 말하는 랑그처럼 항상 이미 존재하는 통일적이고 완결적인 규칙의 체계가 있는 게 아니라, 언어적 실천 속에서 사용되는 부분적인 규칙들이 있는 것입니다. 전체 규칙의 체계를 몰라도 이 부분적인 언어사용 규칙은 그것을 사용하는 실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말의 랑그 전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언어사용 규칙을 모른 채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두드러진 예를 들어보면, 미국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국인은 영어의 문법을 거의 모르지만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말 정도는 사용해서 장사를 합니다. 우리도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의 말을 대략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집니다. 문법책을 붙들고 20년 공부한 사람보다 차라리 과감하게 뛰어들어 되든 안 되든 영어를 사용해 본 회사원이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오늘밤…….
① 라 투르(La Tour), 「성 세바스찬을 돌보는 성 이렌」
② 베어메어(Jan Vermer, 「레이스를 짜는 여인」(The Lacemaker)
③ 도미에(Honoré Victorin Daumier), 「담소하는 3인의 변호사」(Three Lawyers)
구조 언어학이나 그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기호와 대상의 관계, 기호와 기호의 관계를 고려했다. ‘자의성’이니, ‘차이의 놀이’니, ‘랑그’니 하는 개념들도 그 두 가지 축으로 만들어진 좌표 안에 있었다. 그러나 기호의 외부는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가령 첫 번째 「성 세바스찬을 돌보는 성 이렌」에서 성 세바스찬의 손목을 잡은 여인이 침울한 어조로 “오늘 밤…….”이라고 말했다 하자. 그것은 아마도 “오늘밤 돌아가셨습니다”를 뜻하는 것일 거다.
두 번째 「레이스를 짜는 여인」(The Lacemaker)에서 레이스를 짜는 여인이 조용하지만 이에 약간 힘을 준 어조로 말했다고 하자. “오늘밤……….” 아마도 “오늘밤엔 기필코 끝내야지”를 뜻하는 것이리라.
다시 세 번째 「담소하는 3인의 변호사」(Three Lawyers)에서 징그런 표정으로 웃고 있는 변호사 중 한 명이 약간 느끼하면서 윗니가 울리는 목소리로 “오늘밤”이라고 말했다 하자, 필경 “오늘밤 김마담 집에 가자구”를 뜻하는 것일 게다.
아마 이외에 다른 그림 골라서 똑같은 말풍선을 단다면, 대개 다른 의미의 문장이 될 것이다. 이 경우 동일한 하나의 기표가 전혀 다른 의미의 문장들을 언표한다. 그 차이는 랑그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다. 상이한 어조와 상황, 그리고 용법이 그런 차이를 만든다. 즉 기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기호 내부적인 게 아니라 기호 외부적인 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배우를 뽑을 때, “오늘밤”이란 한 단어로 30개의 상황을 표현해 보라고 했다는데, 이는 30개의 다른 문장을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기호의 의미에서 일차적인 것은 차라리 이런 게 아닐까?
언어게임과 ‘인식론’
여기서 실천이란 어떤 것이든 특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규칙이 관습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아니면 단지 언어적인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 역시 이런 규칙에 따른 것입니다. 물건을 사는 데 사용되는 언어사용 규칙이 있을 것이고, 그런 행동을 훔치는 행동과 구별해 주는 행동 규칙이 있을 것입니다. 이 규칙은 모두 사회적인 성격을 가질 겁니다. 이 규칙은 미국이면 미국, 한국이면 한국마다 고유한 ‘생활방식’(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을 빌면 ‘생활형태’)을 보여줍니다. 어떤 규칙도 이런 생활방식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것이며, 또한 반대로 바로 이 규칙들이 모여 특정한 생활방식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태, 즉 행동이나 실천의 형태인데, 이는 대개 언어적 실천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Sprachspiel)이란 개념을 제시합니다. 특정한 규칙에 따르는 언어적 실천과 비언어적 실천이 서로 교차되는 영역이 바로 언어게임이라고 합니다. 즉 언어게임이란 언어와 행동의 결합체요, 언어적 활동과 비언어적 활동이 교차되는 지점입니다. 언어게임은 언어적 활동이나 비언어적 활동 모두가 따라야 할 규칙들의 집합이며, 또한 그 규칙에 따른 행동의 집합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유독 ‘언어게임’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말을 하는 행위가 더 큰 행위의 일부분임을 표시하기 위해, 즉 생활형태의 일부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언어게임은 의미나 행동을 이해하거나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맥락(context)을 제공합니다. 앞서 water란 말이 저토록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그토록 상이한 맥락 속에서, 즉 다양한 언어게임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맥락 속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거나 생각할 수 있으며, 또한 그대로 따라하거나 응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수많은 실수가 거기에 따르겠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언어게임은 동의나 합의, 실천이나 이해, 의사소통에 기준을 제공합니다. 반대로 언어게임이 다르다는 말은 언어적 실천이나 비언어적 실천이 기준으로 삼는 규칙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며, 이 경우 합의나 동의, 또는 공통된 실천은 힘들어지고, 이해나 소통은 곤란하게 됩니다. 예컨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지 문법이나 사전을 외우는 게 아니라, 그 나라의 생활형태(흔히 ‘문화’라고 부르지요)를 배우는 것이고 거기서 사용되는 규칙(언어게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한편 언어사용 규칙을 언어게임이란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한, 그것은 더 이상 랑그처럼 완결되고 불변적인 체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활형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인 만큼, 아니 생활형태의 일부분인 만큼 가변적입니다. 즉 규칙이 불변적인 전체로 있고, 그것이 언제나 동일하게 작동하는 게 아니라, 규칙 자체가 가변적이란 겁니다. 강의실에서 사용하는 언어사용 규칙과 술집에서 사용하는 규칙, 혹은 어린애와 놀면서 사용하는 규칙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언어생활과 문법 간에 매우 다양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언어든 언어에는 얼마나 많은 예외가 있는지!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구조언어학과 매우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의미를 단지 기호가 사용되는 상황으로 환원시키는 입장과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이를 흔히 ‘화용론(話用論)’이라고 하는데, 영국의 오스틴이 대표적입니다). 결국 언어 게임은 생활형태에 따라 가변적이며, 그 말은 언어사용 규칙까지도 가변적임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전 여기서 생활형태라는 개념이 맑스의 ‘생활양식’(Lebensweise, 독일 이데올로기』)이라는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는 실천이란 개념을 가지고 언어나 철학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려는 두 사람의 공통성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유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동일한 하나의 단어도 생활형태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맑스식으로 해석해 봅시다.
‘일하다’란 낱말을 생각해 봅시다. 고대 노예제에서 이 말은 말하는 도구인 노예가 채찍과 족쇄, 제도 등에 의해 강제로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한 대가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지요.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자기가 사장과 계약을 맺고 그 계약에 따라 자의로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일의 대가는 임금으로 받고 말이지요. 싫으면 안 해도 그만입니다. 비록 생계를 유지할 돈은 구할 수 없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에게 하듯 채찍을 들고 강제로 일을 시킨다면, 혹은 노예들에게 “자발적으로 좀 일해” 하면서 일을 시킨다면 전자는 큰 저항에 직면할 것이고, 후자는 우스운 말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성들이 대개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데, 만약 그런 주부들이 노동에 대해 대가를 요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지요. 심지어 남편조차도 아내인 주부와 생활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즉 자신이 사무실에 앉아 하는 것만을 노동으로 알기 때문에 그 요구를 묵살할 것입니다. 사실은 사무실에서 하는 노동은 임금을 지불받기 때문에 ‘노동’으로 인정되고, 가사노동은 지불받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지요.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이러한 생활형태의 차이 때문에 언어게임 사이에 싸움이 나타난다고 합니다(『확실성에 관하여』), 공동의 상황에서 언어를 상충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일은 자주 접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흔히 나타나는 언어게임의 싸움, 상이한 의미들이 충돌하는 사태는 ‘생활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러한 싸움에서 공통의 실천 혹은 상황의 공유가 가능하다면 의미나 규칙을 확인하고 수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유’나 ‘평등’ 같은 단어들에 대해서는 합의에 도달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상반되게 사용하는 두 집단의 생활형태는 완전히 다르며, 따라서 공통의 실천이 존재하기 힘들고, 이로 인해 공통의 의미를 형성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충돌과 대립이 주로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그는 진리나 지식에 대해서도, 진리를 요소명제의 함수로 정의하던(쉽게 말해 진리값을 계산하려던) 초기의 입장을 버리고 전혀 다른 방향에 섭니다. 그에 따르면 무얼 ‘안다’는 것은 ‘안다는 믿음’이고, 진리란 ‘확실하다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데카르트처럼 끝없이 의심하는 것도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의심 끝에 뭔가 확실한 것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게 있을 거라는 믿음 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확실성이라는 것은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결단 즉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그 믿음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되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정당화’란 자신이 옳다는 근거를 세우려는 노력인데, 그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옳다고 생각되는 다른 지식이나 명제와 연루시킴으로써 정당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재와 일치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정당화가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즉 정당화에는 ‘끝’이 있다는 거지요. 그럼 그 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행동(activity)이요 실천입니다. 요컨대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결단에서 믿음은 출발하며, 이 믿음에서 모든 지식은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진리의 개념 역시 언어게임과 생활형태란 개념 속에서 다시 파악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천이란 ‘특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기에, 어떠한 실천도 규칙을 제공하는 특정한 언어게임에 의해 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언어게임이 생활형태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실천이란 특정한 생활형태 속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이해하기는 쉬울 것입니다. 결국 진리란 특정한 생활형태 속에서, 같은 말이지만 특정한 언어게임 속에서 정의되는 실천을 위한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특정한 생활형태에 의해 만들어지고 특정한 언어게임에 의해 정당화되는 믿음이 진리의 출발점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에 대해 다시 이렇게 정의해도 좋지 않을까요? 진리란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이라고 말입니다.
근대철학과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은 구조언어학의 그것과 몇 가지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기호의 의미를 용법으로 정의하는 것도 그렇고,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언어의 문제를 사고하는 것도, 생활형태 속에서 언어활동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특히 둘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는 구조언어학과 달리 항상-이미 정해진 의미구조, 완결된 체계를 이루는 의미구조 같은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어떤 언어든지 나름의 규칙에 따라 사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그 규칙 자체가 소쉬르가 생각했던 랑그처럼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서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언어적 실천에 의해 가변하는 (게임의) 규칙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랑그’는 불변적인 실체가 아니라, 어쩌면 일종의 가족유사성을 갖는 규칙들의 집합인 셈입니다. 따라서 소쉬르와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상황과 무관하게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선험적 구조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표의 의미가 용법이라면, 그것이 도달해야 할 어떤 본래적 지점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표의 미끄러짐’과 같은 문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소쉬르와 달리 언어의 의미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언어게임 속에서 기호의 용법으로 의미를 정의함으로써, 차라리 그것을 규정하는 상황과 규칙, 그리고 실천에 주목케 합니다. 이런 차이로 인해 구조언어학으로는 설명하기 난감한,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문제에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언어를 실천이나 상황과 같은 언어 외적인 것에 결부시켜 파악하기 때문에, 즉 생활형태라는 좀더 포괄적인 것의 일부분으로 다루기 때문에, 소쉬르처럼 언어 자체만을 독립시켰을 때와는 달리 언어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적 공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는 언어적 실천과 비언어적 실천, 언어와 언어 외적인 것 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고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진리는 이렇게 정의된 언어 및 언어게임의 개념을 통해 형성되는 믿음의 문제로 파악됩니다. 그 믿음은 물론 실천과 생활형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지식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함으로써 대상과 개념의 일치, 혹은 대상과 주관의 일치라는 근대적 진리 개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납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을 좀더 밀고 나간다면 진리를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으로 다시 정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옳은 지식으로서 갖는 효과(진리효과)에 의해서,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라는 믿음을 지속할 수 있는 지식이 바로 진리일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게 공학에 의한 것이든, 다른 이론적 명제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집단적이거나 개인적인 실천에 의한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실천은 실증주의자의 생각처럼 진리를 ‘검증’해주는 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 진리효과에 의해 어떤 지식을 정당화하거나 부정하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믿음이란, 단순히 주관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이처럼 실천에 의해 유지되거나 파괴되는 것이고, 따라서 진리란 ‘믿음의 함수’이자 ‘실천의 함수’인 셈입니다.
그리고 ‘주체’란 언어게임을 통해 활동하는 개개인을 가리킨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생활형태와 언어게임 속에서, 그리고 그 언어게임을 통해 형성되는 믿음에 의거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언어게임과 ‘주체’ 간의 교호적 작동은 실천(언어적 비언어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실천’의 개념이란 맑스에게서 ‘실천’ 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근본적이고 중심적 축임에 틀림없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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