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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 제7장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 제7장

건방진방랑자 2023. 3. 1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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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플라톤의 국가와 예수의 천국

이 세계는 지배자가 철인이 될 때만 정의롭다

 

 

도마복음은 상징언어로 가득차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해석의 대상이다. 해석의 과정이 곧 추구와 발견의 과정이다. 그러나 발견은 번민을 낳는다. 그러나 번민이 있어야만 우리는 경이를 체험한다. 경이를 체험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왕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자를 먹는다는 것은 결국 이 왕됨에 관한 이야기이다.

 

 

7

1예수께서 가라사대, “복되도다 사자여! 사람이 그대를 먹어삼키기에 그대는 사람이 되는 도다. 2저주 있을진저 사람이여! 사자가 그대를 먹어삼킬 것이니, 사자가 사람이 될 것이로다.”

1Jesus said, “Blessed is the lion that the human will eat, so that the lion becomes human. 2And cursed is the human that the lion will eat, and the lion will become human.”

 

 

도마복음을 읽다보면 우리는 당혹하게 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우선 그 뜻이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예수의 함축적인 말씀이다. 그러기에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Th.1), 해석의 과정 자체가 추구의 과정이며, 그 추구의 결과 우리는 발견을 하게 되지만, 발견의 순간 우리는 번민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번민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어야만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고, 따라서 자기를 지배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된다(Th. 2). 사실 2의 이 예수 말씀 속에 본장의 해답은 이미 다 주어져 있다.

 

자기를 지배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나의 왕이 된다고 하는 명제 속에 본 장의 의미체계는 다 함축되어 있다. 도마복음을 읽어나가는 행위자체가 추구와 발견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 해석을 발견했을 때 번민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은, 진리의 실천이라는 과제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은 한가로운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각고의 깨달음의 과정이 되어야 하며, 깨달음은 반드시 나의 삶속에서 실천될 때 경이(驚異)로 전위하게 되는 것이다. ‘사자를 먹는다운운,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

 

많은 주석가들이 도마복음 언어의 상징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본장의 개념들을 객체화된 사물로서 규정하고 그 의미를 찾으려 했다. 상당히 수준높은 주석가도, 본 장에서 말하는 사람과 사자를 실제로 사람이 사자고기를 먹는 다이어트(diet)의 문제로 파악하고, 사람과 사자간의 종()적인 하이어라키(hierachy, 계층제)를 운운하는 황당한 주석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운동식탁교제(the table fellowship)에 있어서의 모종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Richard Valantasis, The Gospel of Thomas 64-5).

 

이런 주석들은 1세기 희랍어문화권의 문학전통의 다양한 심볼리즘을 망각하고 있다. 일례를 들면, 플라톤의 대화중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그 유명한 이상국가론(Republic)을 펼쳐보자! 재미있게도 이 이상국가론속에서 우리는 도마복음의 심볼리즘의 원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국가론은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롭지 못한 사람에 비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과연 정의는 훌륭한 것이고 불의는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 정당한 해답을 시도하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도전이다.

 

 

실루기아 항구(Seleucia Pieria)BC 300년경 셀레우코스1세 니카토르(Seleucus I Nicator, BC 301~281 재위)에 의하여 건설되었으며 시리아의 두 주요 카라반루트의 종점으로서 신약시대에는 지중해 동안(東岸)의 가장 중요한 상업지 중의 하나였다. 이곳이 바로 그 본 항구의 유적이며 바울의 배가 떠난 곳은 이곳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다.(p.222 사진), 두 바위 사이로 떠났다는 민간전승이 있다. 아마도 바울 일행은 사람의 눈을 피해 밀항지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자와 정의롭지 못한 자, 두 사람을 대비시켜 이러한 본질적 문제를 논구한다는 것에 어려움 느끼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국가의 문제로 확대시킬 것을 제안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 속에서의 정의문제를 이야기한 후에, 그것의 축소판으로서의 인간 속에서 정의를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 유감없이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국가를 그려본다. 그러나 결국 이상국가란, 이상적 법률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사회가 아니라,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하여 이성적으로 단련된 선남선녀에 의하여 다스려질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세계는 지배자들이 철인(哲人)이 될 때만이 정의롭게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배자 철인들은 선()의 이데아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지배하는 선의 이데아는 신의 온전함(divine perfection)이며, 그것은 인간세에서 인간적인 온전함(human perfection)인 정의를 구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플라톤의 국가론은 단순한 국가이론이기에 앞서 인간의 삶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정의로운 국가는 실현되지 않을지 몰라도 개인은 항상 정의로울 수 있으며,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그 정의를 실천하고 영예롭게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던졌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너무 철학과 종교를 별개의 분야인 것처럼 생각하여 이러한 논의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질 못하지만, 사실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국가론과 예수가 실천하려고 하는 천국운동은 그 본질에 있어서 매우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천국도 결국 이 지상에 어떻게 정의로운 하나님의 지배(basileia, reign)를 실현하는가에 관한 논의이다. 신적인 온전함(이데아의 세계)을 어떻게 인간적인 온전함으로서 구현시키느냐에 관한 논의인 것이다. 단지 예수는 그 논의를 아버지의 절대적 명령으로서 우리 실존에 직접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플라톤은 인간세의 국가형태를 그 이상적인 형태로부터 타락의 단계에 따라 5가지로 분류한다. 1) 최선자(最善者) 정체 2) 명예지상정체 3) 과두정체 4) 민주정체 5) 참주정체. 그리고 이 정체에 상응하는 인간형을 또다시 5가지로 설정한다. 1) 최선자정체적 인간 2) 명예지상정체적 인간 3) 과두정체적 인간 4) 민주정체적 인간 5) 참주정체적 인간.

 

그러니까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민주정치란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다. 민주정체적 인간은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고 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에 넘쳐 타락한 인간이다. 민주정체는 자유와 방종으로 인하여 참주정체를 탄생시키는데, 결국 참주(tyrant)는 개인적 야망의 달성을 위해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국가사회를 파멸시키고 만다.

 

다시 말해서 참주정체야말로 인간세의 최악의 국가형태이며, 참주정체적 인간이야말로 인간 중에 가장 올바르지 못한 인간이며, 가장 비참한 자이다. 최선의 인간인 철인 치자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간이다. 국가론8권은 참주정체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제9권에서 우리는 참주정체적 인간에 관해 놀랍도록 적나라한 묘사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인간 속에 내재하는 사자(leon)’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에로스가 참주가 되어 한 사람 안에 거주하면서 그 혼()의 모든 것을 조종하는 그런 인간의 한 모습이다. 여기서 도마복음의 상징언어가 풀려 나가는 것이다.

 

 

사자를 삼켜라! 나 도올이 지금 사자를 삼켜 먹으려 하고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 얼마 전에 앙드레 김을 만나 이곳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앙드레 김의 얼굴이 확 변하면서 1966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받은 충격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42년만에 이곳을 가본 한국인을 처음 만난다고 했다. 그 감동을 여태 하소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인생에 그 많은 유적을 보았어도 이곳에서 받은 충격만큼 거대한 그 무엇은 없었다. 앙드레 김과 나는 깊은 공감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갈릴리 바다의 함몰지역을 그대로 올라가면 헤르몬산을 지나 레바논산맥과 안티레바논산맥 사이로 펼쳐지는 거대한 평원을 만난다. 그 평원이 베카밸리(The Bekaa Valley), 말이 평원이지만 평균 해발 900m의 고원, ‘로마의 빵바구니(Rome's breadbasket)’라 불렸을 정도로 풍요로운 대곡창이다. 바로 이곳에서 농경 신인 바알신이 태어났다. 페니키아문명의 주신이다. 구약에서 그토록 바알을 저주하지만 이 지역에서 보면 야훼야말로 아웃사이더로 보인다. 예루살렘이 초라하게 보인다. 안티레바논산맥의 중턱에 바알베크(Baalbek)신전이 자리잡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로 만들었고 줄리어스 시저도 그곳을 모라의 시리아속주의 중심지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제우스신전, 비너스신전, 바알신전이 같이 모여있는 그 웅장한 모습은 두고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이드와 사자

덮치는 사자를 먹어라!

 

 

내 몸속에 있는 사람이 달려드는 사자를 먹으면 나라는 인간은 그만큼 승화된다. 내 몸속의 사자가 내 몸속의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이다. 마태, 누가는 예수가 탐식가요, 술주정뱅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자를 항상 삼켜먹을 수 있는 강렬한 자제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7

1예수께서 가라사대, “복되도다 사자여! 사람이 그대를 먹어삼키기에 그대는 사람이 되는 도다. 2저주 있을진저 사람이여! 사자가 그대를 먹어삼킬 것이니, 사자가 사람이 될 것이로다.”

1Jesus said, “Blessed is the lion that the human will eat, so that the lion becomes human. 2And cursed is the human that the lion will eat, and the lion will become human.”

 

 

플라톤(화자는 소크라테스)은 참주정체적 인간을 묘사하는데, 마치 프로이드가 정신분석학에서 에고(Ego)와 이드(Id)의 관계를 말하는 듯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잠들었을 때 깨어나는 욕구들일세. 혼의 다른 부분이, 즉 이성적이고 유순하며 지배하는 모든 부분이 잠들 때면, 짐승같고 사나운 부분은 잔뜩 먹고 마시고서는 발딱 일어나 잠을 물리치고 나가서는 제 기질을 총족시키려 꾀하지. 그런 때에 그것은 일체의 부끄러움과 분별에서 풀려나고 해방된 터라, 무슨 짓이든 감행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네. 그것은 상상하게 되는 데 따라 어머니와도, 그밖의 인간들이나 신들 중의 누구와도, 또는 짐승들 중의 어떤 것과도 섹스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누구든 살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거니와, 어떤 음식이든 삼가는 일도 없다네. 한마디로 말해서, 어리석거나 파렴치한 짓을 빼놓지 않고 저지른다네.” (Republic 571c).

 

그는 참주적 인간의 탄생을 내부의 양심적 절제를 숙청하고서 밖에서 들여 온 광기로 자아를 가득채우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혼()의 상(, eikōn)을 세 측면에서 형상화한다. 하나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형태의 짐승으로 형상화하고, 하나는 사자의 형태로, 또 하나는 사람의 형태로 형상화한다.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은 인간의 혼의 다양한 욕구를 상징하고, 사자는 격정을 상징하고, 사람은 헤아릴 줄 아는 이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세 형상을, 키마이라(Chimaira), 스킬라(Skylla), 케르베로스(Kerberos)가 여러 형태가 하나로 합쳐진 것과 같이, 하나로 합쳐서 하나의 생물로서 자라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의 생물은 하나의 인간으로 보이도록 외피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면으로 보면 하나의 인간이지만, 그 내면에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과 사자와 사람의 세 형상이 들어있어 제각기 싸우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속에 사람과 사자와 다두수(多頭獸), 세 존재가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셋이서 서로 물어뜯으면서 싸우다가 서로 잡아 먹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589a).

 

 

내가 잡고 있는 사자의 조각은 저 기둥 꼭대기에 있는 지붕 홈통[石漏槽] 부분이 떨어져 내려온 것이다. 여기 사자 밑의 만()자 문양은 2008422일부터 83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페르시아 유물 중, BC 1000년경의 금목걸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부여 용정리에서 출토된 파문수막새 백제와당에도 아름답게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평창동 유금와당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음), 트로이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1882년 이 고자 문양이 태양의 기의 발출을 상징하는 원시문양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아리안족의 상징이 되어 히틀러에까지 내려갔다.

 

 

나는 도마복음을 읽으면서 본장을 접했을 때, 심한 당혹감과 함께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본장이 해독되는 순간의 짜릿한 감동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 사자는 주로 인간에 내재하는 정욕, 욕정, 특히 성적 갈망(sexual desire)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성은 당대의 문헌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사실 순수하게 색정(色情)에 빠져본 일이 있거나 아편중독에라도 걸려본 사람들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메타포의 강렬함에 깊은 공감을 느낄 것이다. 인간의 색정은 인간에게, 즉 플라톤이 말하는 내면의 사람에게, 사자처럼 덮친다. 성서에서도 사자는 항상 위험과 괴력의 상징이다. 삼손도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사자를 맨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린다(14:5~6). 맹자(孟子)도 고자(告子)와 식색지성(食色之性)관하여 논쟁을 펼치지만, 하여튼 인간에게 항상 사자처럼 덮치는 것은 식색의 욕정이다. 고자는 그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맹자는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 바탕일 수는 없다고 전제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사자처럼 달려드는 인간의 욕정, 그 강렬한 회화적 상상력에 찬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바로 그 덤벼드는 사자를 삼손처럼 맨주먹으로 찢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곧 바로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씹어먹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욕정의 극복이란 사실 달려드는 사자를 통째 씹어먹어 버리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사람에게 먹힌 사자여! 그대는 복되도다! 그대는 사람이 되었기에.” 사자가 사람에게 먹히면, 사자는 사람이 된다. 즉 욕정이 이성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주석가들은 여기까지 제1절의 해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제2절의 해석이다.

 

1절에서는 사람이 사자를 먹었지만, 2절에서는 사자가 사람을 먹는다. 욕정이 이성을 잡아삼키는 상황은 분명히 비극적 상황이다.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이제는 사람이 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 사자를 먹어서, 사자가 사람으로 고양되었다면, 사자가 사람을 먹으면 당연히 사람이 사자로 비하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주석가들은 제2절은 텍스트 코럽션(text corruption)이 개재되어 있다고 본다. 콥트어 사경자들의 에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자가 된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사람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이 사자로 변형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제2절의 사자가 사람이 될 것이로다(and the lion will become human.)’는 결국 사람다운 사람은 사라지고 사자가 되어버린 사람만 남는다는 것이다. 2절의 사람플라톤이 형상화한 언어를 따르자면, 내면의 사람이 죽어버린, 사자가 사람노릇을 하는 그러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스테반 데이비스는 말한다: “2절은 무지와 악이 인간을 점령하여 인간을 인간이하로 변모시킨 그 무엇을 말하고 있다(The second clause speaks of ignorance and evil taking over a human being and turning a human into something less than human.” (Stevan Davies, The Gospel of Thomas 8).

 

인간의 죄악은 궁극적으로 모두 내 속에 있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다(Th. 14, 15:11, 7:15). 본장의 주제는 나 실존의 내면의 추구와 발견이라는 도마복음의 전체 테마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세례요한이 금식과 절제를 행한 금욕주의자였다면 예수는 당시 비방인들로부터 게걸스러운 탐식가(pharos, a glutton)’, ‘술주정뱅이(oinopotēs, a drunkard)’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금욕이라는 문제를 경시한 식탁교제운동가였다(11:19, 7:34, Q26). 그러기에 금욕주의적인 본장이 예수의 오리지날한 로기온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주석가들도 있으나, 예수는 타인에게 금욕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본인은 끊임없이 사자를 삼켜먹을 수 있는 절제의 인간이었다.

 

사자를 먹자! 덮치는 사자를 삼키자! 나는 이 말 속에서 무위진인(無位眞人) 임제(臨濟, ?~867)의 날카로운 할성(喝聲)을 듣는다.

 

 

레바논 안티레바논산맥 중턱에 있는 이 쥬피터 신전은 전 로마제국을 통하여 가장 거대한 신전이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의 수도인 로마에는 막상 거대한 건물을 짓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이방의 통치지역에 막대한 신전을 지어 그 지역민들을 압도시켰던 것이다. 이 쥬피터 신전은 폼페이우스장군 때부터 짓기 시작하여(BC 64) 줄리어스 시저ㆍ옥타비아누스 시대를 거쳐 네로황제 때 (AD 60) 완성되었다. 내가 서있는 이 6개의 기둥 잔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돌기둥이다(높이 22.9m). 이러한 돌기 등이 직사각형 신전 둘레에 54개 서있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신전들은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파괴되었고 배교자 율리아누스황제 때 감깐 회복되었다가 다시 파괴되었다.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AD 527~65 재위)는 이 기둥을 실어다가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성당 기둥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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