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아니마와 아니무스
남자 속에 여자가 있고, 여자 속에 남자가 있다
❝도마복음은 상징적 언어로 가득차 있다. 이 상징체계를 푸는 데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알고있는 기독교라는 가치체계의 상념의 탈을 여지없이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대중화되면 될수록 다면적인 데서 일면적으로, 포섭적인 데서 단선적으로 흐르기 쉽다. 오늘의 기독교는 그 원래의 원융적이고 자각적인 고차원의 세계관을 획일적이고 의타적인 세계관으로 저급화시킨 결과의 산물이다.❞
제4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1Jesus said, “The man ol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small child seven days old about the place of life, and that person will live.
2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3and will become a single one.”
도마복음서를 파헤치고 들어가보면 볼수록 미궁에 빠짐과 동시에 엄청난 은유와 비유와 상징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러다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발견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 도마복음서는 우리의 합리적 사유로 분석되는 정연한 논리체계가 아니요, 살아있는 예수와 직접 실존의 체험으로 맞부닥쳐야만 하는 추구와 발견의 과정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상징언어들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우리가 기독교나 서양철학이나 서양논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선입견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도마복음이 그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세계관, 그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도마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새삼 확인하는 사실은, 그것은 결코 외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정경화 되어있는 4복음서나, 4복음서의 더미 속에서 발견한 큐복음서보다도 확연히 더 오리지날한 느낌을 주는 웅혼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오리지날’하다는 의미는 시대적으로도 앞선다는 의미를 내포할 뿐 아니라 사고의 정합성(整合性)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정합성이란 평면적 논리의 일관성이 아니다. 다면적ㆍ중층적ㆍ복합적 논리의 직관적 통일성이다. 그 통일성은 원융(圓融)한 혼돈(混沌)의 세계를 포섭하고 있다. 제3장의 주석에서 나는 이미 ‘전관(全觀)’의 방법을 갈파하였다. 제4장에서는 혼돈(混沌)과 융합(融合)이라는 근원적인 가치관이 설파되지 않으면, 본장을 구성하는 언어들이 이해될 길이 없다. 이러한 혼돈성과 융합성은 4장뿐 아니라 도마복음 전체를 일관하고 있다.
인간의 사유가 고차원적인 데서 저차원적인 데로, 다면적인 데서 일면적인 데로, 포섭적인 데서 단선적인 데로, 고매한 데서 유치한 데로, 자각의 권면에서 믿음의 강요로 흐르기는 쉽지만, 그 역방향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일반적인 엔트로피증가의 방향성에 비추어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도마복음서와 큐복음서, 그리고 그에 기초한 내러티브 복음서들의 언어를 비교해보면 이러한 AD 1세기 초기기독교 역사의 진행방향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도마복음서를 포함한 나그함마디 성문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진리복음서가 들어있는 제1코우덱스를 소유하기까지 했던 20세기의 대표적 심리학자 융(C. G. Jung, 1875~1961)은 우리의 심층의식의 아키타입의 한 유형으로서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라는 재미있는 개념을 제시한다(융의 아키타입이론은 이미 제18편~19편에서 상술), 그것은 이 장 마지막 절의 ‘하나된 자(a single one)’의 해석과 관련된다.
▲ 예수 생전에 이미 기독교를 수용한 에데사(오스로외네) 왕국의 수도 우르파(Urfa), 도마는 예수 사후에 그 우르파로 갔다. 우르파는 현재 터키 동부 내륙, 유프라테스강 상류지역에 있다. 우르파는 도마기독교의 본산이며, 에데사왕국은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최초로 국교로서 승인한 곳이다. 1637년 오스만제국이 이곳을 지배하면서부터 기독교의 자취는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가 바로 이곳 우르파라는 이슬람교도들의 신념 때문에, 이곳은 현재 아브라함의 탄생 동굴이 보존되어 있는 이슬람성지가 되어있다. 나는 우르파 박물관(Sanliurfa Museum)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결합을 상징하는 조각을 발견했다. 초기기독교 왕국의 예술적 표현은 너무도 발랄한 것이었다.
아니마란 남자의 여자 이미지고, 아니무스란 여자의 남자 이미지다. 그러니까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얽혀있다. 인간세상이 대체로 남성중심사회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니무스보다는 아니마가 더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된다. 융도 남성이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아니마에 더 명료하게 초점을 맞춘다. 아니마가 아니무스보다는 더 쉽게 기술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유대교전통에서 ‘지혜’가 여성의 이미지를 지니는 것이나, 동양의 도가철학에서 말하는 도(道)가 음(陰)적인 이미지를 지니는 것도, 모두 남성중심사회에서 파생된 아니마적 아키타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모두 어떤 개인적 의식의 구체적 현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집단적(collective)인 것이다. 한 인간의 체험의 세계에서 아니마는 엄마의 이미지로 출발할 것이고, 사춘기의 아니마는 한 남자의 에로틱한 충동이 형상화된 어떤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니마도 시대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다른 아키타입적 이미지를 지닐 것이다.
a그러나 더 근원적 사실은 아니마야말로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어떤 고리로서 묘사된다는 것이다. 융은 그것을 인간의 심층적 무의식의 인격화(a personification of the unconscious)로 간주하기도 한다. 인간의 섹스라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나 자신에 내재하는 아니마의 발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섹스라는 것은 인간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매우 특수한 체험이다. 성교는 본시 동물의 세계에서는 종족번식의 수단으로 본능화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와 같은 고도의 상징적 의식이 발달한, 인간이라는 동물에게서는 성교는 종족번식의 수단을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교란 단순히 성기접촉의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쾌락이 단순히 종족번식의 효율성을 유도하기 위한 몸의 장치만도 아니다. 인간은 에로틱한 체험을 통하여 에로틱한 충동을 넘어서는 심오한 느낌(Feeling)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성을 통하여 성을 넘어서는 우주를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으로 성적 체험을 통하여 성장하며, 그것을 우주적 이해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성적인 체험을 결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파토스의 세계와 그와 결부된 가치의 세계로부터 격절되어 있다. 성적인 체험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 그 자체와 결부되어 있는 것도 성이라는 복합적 열정이 너무도 많은 느낌의 세계에 대한 열쇠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도마복음의 언어가 드러내고 있는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합일(合一)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방편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그것이 실체화되어 나타날 때 인간에게 병리적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결코 긍정적인 의미맥락을 지니지 않는다. 도마에는 그러한 부정적인 맥락이 전혀 없다. 그리고 도마가 말하는 합일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분별이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아니마는 남성 속에 있는 여성성이며, 아니무스는 여성 속에 있는 남성성이다. 이것은 곧 나라는 존재 안에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공재(共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는 존재는 궁극적으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결합에서만 가능해지는 ‘하나된 자’이기 때문이다. 아니마를 음(陰)이라 하고, 아니무스를 양(陽)이라 한다면, 결국 나라는 존재는 음양의 합일인 것이다. 남자 속에는 여자(아니마)가 들어 있고, 여자 속에는 남자(아니무스)가 들어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성교란 결국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합일되는 체험이라 말할 수 있다. 남성 속에도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있으며 여성 속에도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있다. 이성지합이란 서로가 서로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발견하는 것이다. 밀교에서는 오르가즘의 극치에서 체험되는 신비경을 합체불(合體佛)이라 표현했고, 『주역』은 이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 표현한 것이다. 도마는 무소유 방랑자의 원초적 고독속에서 성적 체험을 뛰어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합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이곳은 에데사왕국의 수도였던 우르파이다. 우르파의 왕 아브가르 우카마(Abgar Ukkama)는 피부병으로 심하게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팔레스타인을 들락거리는 상인들로부터 이적을 행하는 예수의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예수를 초청한다. 예수는 팔레스타인의 사역을 포기할 수 없어 가지는 못하겠으나, 자기를 보지도 않고 믿고 초청하는 에데사의 왕을 축복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 예수가 직접 쓴 편지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발굴된 골동문서로서 실려있다. 예수는 편지와 함께 자기의 얼굴이 그려진 손수건에 땀을 닦아 보낸다. 그 손수건으로 상처를 어루만지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또 이곳 우르파는 아브라함이 탄생한 곳이다. 바빌로니아의 왕 니므롯(Nimrod)이 아브라함이 태어날 때 유일신을 퍼뜨릴 아이가 탄생하리라는 현몽의 예언을 듣고 아기 밴 여자와 아기를 다 죽이게 한다. 아브라함의 엄마는 임신을 숨겼고 몰래 동굴에서 아브라함을 낳았다. 헤롯 영아살해의 옛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장성하여 니므롯이 숭배하는 우상들을 파괴한다. 그러자 니므롯이 아브라함을 우르파 성에서 체포하여 성벽 밑에 타오르는 거대한 불구덩이로 그를 던진다. 이때 하나님이 불구덩이를 연못으로 변하게 했고 장작들을 잉어로 변하게 했다. 더 멋있는 버전에 의하면 아브라함을 사모하는 니므롯의 딸이 자기 몸을 성벽에서 던졌다고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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