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큰 고기와 작은 고기
긁어모으는 자가 되지 말고 버리는 자가 되라
❝도마복음의 언어는 직유로 가득차 있다. 인간다운 인간을 슬기로운 어부에 비유한다. 슬기로운 어부는 그물에 가득찬 고기를 다 버린다. 그 속에 번뜩이는 단 하나의 큰 물고기를 얻기 위해.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것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은 잔 것들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제8장
1그리고 그께서 가라사대, “사람된 자는 슬기로운 어부와도 같도다. 그는 그의 그물을 바다에 던져 작은 고기가 가득찬 채로 바다로부터 끌어올리는도다. 2그 가득한 고기 가운데서 슬기로운 어부는 잘생긴 큰 고기 한 마리를 발견하는도다. 3그는 모든 작은 고기를 다시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어려움 없이 그 큰 고기 한 마리를 가려 얻는다. 4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1And he said, “The human one is like a wise fisherman who cast his net into the sea and drew it up from the sea full of little fish. 2Among them the wise fisherman discovered a fine large fish. 3He threw all the little fish back into the sea, and chose the large fish without difficulty. 4Whoever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도마복음은 펴보고 또 펴볼수록 미궁이다. 아리송한 느낌을 준다. 어부가 바다에서 많은 고기를 낚아 올렸을 때 잔챙이는 바다로 돌려보낸다든가, 낚시꾼이 일정한 수치 이하의 송사리를 잡았을 때 다시 풀어준다는 이야기는 이미 우리의 상식이 되어있다. 그렇다면 과연 도마복음은 우리에게 이런 생태론적 상식(ecological common sense)을 가르치고 있는 또 하나의 성경일까? 도대체 이 말이 무엇인가?
우선 여기 발신자로서의 주어가 ‘예수’로 명기되어 있기 않고 ‘그’라는 대명사로 되어있다. ‘그께서 가라사대’는 명백히 이 예수의 말씀을 연출하고 있는 나레이터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 로기온에는 나레이터와, 예수와, 예수의 말 속에 있는 어부, 이 삼자의 관계가 얽혀져 있다. 여기서 어부는 바로 제1장에서 말하는 예수의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이다. 여기서 ‘어부’는 ‘사람된 자’의 직유(simile)적 표힌이다. ‘사람된 자’라는 표현도 참 절묘하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람디운 사람(the human one)’이다. 사람다운 진정한 사람, 그러니까 예수의 신비로운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이다. 그 해석을 발견했기에 고통스러워하고, 또 고통스럽기에 희열을 느끼는 왕자(王者), 내면의 사자를 삼켜 먹어버리는 그 왕자는 여기 ‘슬기로운 어부’라는 직유의 대상으로서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 바알신전 안뜰에서 쥬피터 신전으로 올라가는 정면의 전경. 저 멀리 6개의 쥬피터신전 기둥이 보인다. 정면계단이 35계단인데 로마인들은 반드시 첫 계단을 오른발로 딛고 끝낼 때 오른발로 딛는 습관이 있었다. 신전토대에 쓴 돌들은 보통 하나가 1,000t이나 된다. 그 어마어마한 돌을 어떻게 주무르고 운반했는지, 고도화된 현대의 토목기술로도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다.
누가복음 5:1~7에 보면 예수가 시몬의 배에서 가르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고, 그 고기를 두 배에 가득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코 그 고기를 버린다는 발상은 없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아도 부활하신 예수가 시몬 베드로에게 그물을 끌어올리라 하니 거대한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나 되었다.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배우는 예수는 어부가 많은 고기를 낚듯이 우리에게 복을 많이 가져다주는 예수다. 예수를 믿으면,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가 꽉 차듯이, 집이 가라앉을 정도로 복이 가득차는 것이다. 만복(萬福)의 근원 하나님, 만복의 예수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는 분명히 그러한 예수와는 다른 모습이다.
본 장의 문장을 잘 뜯어보면 작은 고기가 가득찬 채로 그물이 올라오는 모습이 먼저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가득찬 고기 가운데서 큰 고기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발견은 했지만 그 큰 고기는 가득찬 작은 고기들에 가려서 보이질 않는다. 발견은 했지만 아직 그 큰 고기를 손에 얻지는 못한 것이다. 그 고기를 손에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슬기로운 어부의 ‘슬기’는 바로 그 작은 고기들을 다시 바다 속으로 버리는 데 있다(to throw them back into the sea), ‘건짐’의 지혜가 아니라 ‘버림’의 지혜인 것이다. 버림으로써 큰 고기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려움 없이’ 그 큰 고기 한 마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107장의 ‘가장 큰 한 마리의 양’의 비유를 같이 생각해보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신앙이든, 은혜든, 축복이든, 성령이든, 모든 것을 얻기만 하는 기독교에 너무 익숙해있다. ‘버리는’ 기독교를 배우지 못했다. 이 도마복음서는 베드로 중심의 어떤 초기 사도집단의 윤리에 반항하는 예수운동의 모습일 수도 있다.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고 발견하는 자는 모든 것을 긁어모아서는 아니 된다. 하나의 진정한 아이덴티티를 위해서 사소한 아이덴티티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 최종적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왕필(王弼, 226~249)이 『주역』을 해석하는 데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말[言]이란 상(象)을 밝히기 위한 것이므로 상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려야 한다. 상(象)이란 뜻[意]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므로 뜻을 얻으면 상은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마치 올가미가 토끼를 산 채로 잡기 위한 것이므로 토끼를 얻은 후에는 올가미는 버리는 것과 같다. 그물은 고기를 산 채로 잡기 위한 것이므로 고기를 얻은 후에는 그물은 버리는 것과 같다.
言者所以明象, 得象而忘言; 象者所以忘意, 得意而忘象. 猶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也.
도마복음서는 바로 이 ‘득어망전(得魚忘筌)’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 마태복음 13:47~50에는 도마복음의 이 장을 연상시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의미의 왜곡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고기는 내어버리느니라.”
최종적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순수한 ‘버림’의 도마복음 논리가 마태복음에서는 선ㆍ악의 이원론으로 변질되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윤리적 분별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악한 자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종말론적 논리로 꼭 연결된다. 마태는 이 비유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여놓고 있다: “세상 끝날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 13:49~50), 이러한 윤리적 이원론의 맹점은 전혀 ‘선자’와 ‘악자’에 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종말의 협박을 선포하는 자들의 편의에 따라 선·악이 임의화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의 선한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없다는 것이다. 4복음서는 단지 초대교회의 절박한 종말론적 분위기를 반영할 뿐이다.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긁어모으기만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까? 버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까?
▲ 바알베크에 있는 쥬피터 신전은 로마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이었다. 그런데 쥬피터 신전에서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바카스신전이 있다. 나는 이 바카스신전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또 매혹되었다. 이 신전도 1898년 독일황제 빌헬름 2세와 터키 술탄 사이에 발굴계약이 성립할 때까지만 해도 거의 3분의 2가 지하에 매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이 신전을 바알베크에서는 ‘작은 신전(the small temple)’이라고 불렀는데 실상인즉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다. 내가 서있는 이곳은 신전의 지성소 외벽 회랑인데 7개의 기둥이 있고, 꼭대기에 천정이 남아있는 것이 이채롭다. 이렇게 제 위치에 남아있는 돌 천정은 거의 구경하기가 힘들다. 정면에 33스텝의 계단이 있고 그 신전 내부는 3구획이 있고 가장 깊은 곳에 지성소가 있다. 건축물 벽 상부의 엔태블러쳐(entablature) 부분의 조각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다채롭고 아름답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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