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⑤강: 소피의 선택과 신자유주의에서의 선택
“연극수업에 빠지고 수학공부를 할래요”라는 고2학생의 선언은 단순히 ‘더 공부를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거기엔 ‘여기의 가치관’을 중시하는 생각이 깔려 있기에, 그런 생각에 갇히면 갇힐수록 공부와는 인연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 동섭쌤의 트위스트 교육학 마지막 강의는 증여론을 다방면으로 펼치며 진행되고 있다.
거짓 선택과 강요된 선택
그런데도 그 학생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런 식의 공부만을 원하고 별다른 방법도 없기에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런 세상을 비판하며 재디자인하겠다는 사람을 ‘정신승리’하는 것쯤으로 비하했던 것이다. 이미 그 학생은 세상이 디자인한 길로 가려고 맘먹은 이상, 그렇게 만들어진 디자인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그 학생의 그와 같은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는 거다. 일반적으로는 ‘수능을 본다, 안 본다’의 선택지가 있고 그 중에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그 학생처럼 ‘수능을 보겠다’고 선택한 경우, “선택은 니가 한 것이니, 이제부턴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돼”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85호 크레인의 여인(철의 여인)’인 김진숙씨는 ‘선택 아닌 선택’이라 비판하고 있다.
저는 ‘선택’하면 항상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소피의 선택』인데, 주인공 이름이 ‘소피’입니다. 소피가 두 자식을 데리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갑니다. 여기까지는 빤한 내용이지요. 그때 나치 장교가 소피에게 두 아이 중 한 명을 구해줄 수 있으니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 순간,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소피는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저는 ‘선택’하면 늘 그 장면이 스쳐가곤 합니다. 그건 형식적으로 선택인 것 같지만 ‘선택’이 아닌 거죠. 두 자식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건 선택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한국에 사는 사람들, 한국뿐 아니라 약자 혹은 피지배자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와 유사한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을 ‘선택’하기 위해 여기 젊은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여러분이 눈 뜨면 듣는 얘기가 ‘스펙’을 쌓으라는 말이지요. 여러분은 어느 영어학원에 갈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지만 나머지, 곧 진짜 선택은 사실상 불가능하지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는 지배집단, 곧 자본가나 권력이 요구하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삶에서는 정작 선택의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죠.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김진숙, 한겨레출판사, 2012년, pp15
▲ 두 아이 중 한 명만 가스실에 보내야 하는 상황. 이때의 선택을 선택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녀는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에 맞서 바닷바람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크레인에 2011년 1월 6일에 올라 부당함을 호소했다. 결국 회사 측에서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면서 309일 만인 2011년 11월 10일에 영도의 땅바닥에 내려올 수 있었고 2012년 3월 13일에 ‘선택’이란 주제로 특강을 할 수 있었다. 위의 말은 그 특강 때 했던 말이다.
▲ 그녀는 차갑고 진중하며 대장부스타일 같을 줄만 알았는데, 좌중과 호흡하며 유머와 진지함 사이를 쥐락펴락했다.
재디자인은 정신승리가 아닌, 거짓 선택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겐 애초부터 진정한 선택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말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공부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걸 왜 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도도히 흐르던 기류가 있었기에 해야만 했고, 누군가는 마치 그걸 ‘선택의 기회가 주워졌을 때 네가 선택하여 여기까지 왔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김진숙씨가 잘 지적했다시피 내가 생각한 틀에서 선택을 했다기보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에 들어가 마지못해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학원에 갈까? 아니면 아예 다른 공부를 할까?’ 따위의 선택이 아닌, ‘영어학원에 갈까? 수학학원에 갈까?’의 선택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학생도 수능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연극수업에 빠지고 수학공부를 하는 걸 선택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어른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선택’을 강요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걸 그 학생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때 필요한 것이 동섭쌤이 말하는 ‘디자인된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걸 재디자인할 수 있는 용기’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선택의 기회가 박탈당한 사실을 알고, 그에 따라 그 기회를 되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건 단순히 ‘정신승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거짓선택의 기회를 버림으로 충분히 현실을 재디자인할 수 있는 ‘용기’라 보아야 맞다.
▲ 스펙을 쌓는 건 선택이 아니었고, 수능 외의 다른 20대이 미래를 그리는 건 선택이 아니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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