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평화와 충돌
가정사에 집착 말고 홀로 서라
❝예수는 결코 ‘전쟁과 평화’라는 세속적 대립의 주제를 말하지 않았다. 여기 평화라는 개념의 대립적 짝을 이루는 불과 칼과 전쟁은, 모두 가족관계와의 분열, 세속적 가치와의 충돌을 말하는 상징적 표현일 뿐이다. 내 마음의 평화는 궁극적으로 가족관계에 집착하지 않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제16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2그들은 내가 이 땅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3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이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4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
1Jesus said, “Perhaps people think that I have come to cast peace upon the world. 2They do not know that I have come to cast conflicts upon the earth: fire, sword, and war. 3For there will be five in a house: there will be thre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father against son and son against father, 4and they will stand alone.”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이 구절은 큐복음서에 속하는 것으로(Q57), 마태복음 10:34~36, 누가복음 12:49~53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누가자료를 보면 도마 제10장이 본 장의 메시지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6장과 관련된 자료들 |
마태복음 10:34~36 |
누가복음 12:49~53 |
도마복음 제10장 |
도마자료는 큐자료의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큐자료로서 보다 원형을 반영한다고 하는 누가자료가 도마자료에 더 근접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확인할 수 있다. 누가는 도마자료의 10장과 16장을 합성하고 있다. 그렇지만 누가는 동사형으로서 ‘주다’라는 셈족어의 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오히려 마태는 ‘던지다(bállō)’라는 도마의 용법을 계승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 누가, 큐, 도마 4 텍스트들 간의 다이나믹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개봉한 영화인데 프랑스 감독 크리스티앙 카리옹(Christian Carion)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어느 전선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메리 크리스마스(Joyeux Noël), 2005」라는 작품이 있다.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 북부 전선에서 100m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독일·프랑스ㆍ스코틀랜드 세 나라 군대간의 숨막히는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에게야 물론 이유없는 싸움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잠시 총격이 멈춘 틈을 타고, 스코틀랜드군에 자진하여 의무병으로 가담한 성공회의 파머 신부가 백파이프를 불자, 독일군에 징집된 베를린 오페라 하우스 소속의 베테랑 테너 스프링크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화답하면서 사람들은 한두 명씩 총을 내려놓고, 자기들이 총부리를 겨누었던, 전우의 시체가 깔린 전장 한복판으로 나오게 된다. 드디어 공동 미사를 드리며 임시 크리스마스휴전을 선언한다. 전우의 시체를 묻어주고, 축구를 하다가 한마음이 된 이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기독교가 가르치려는 사랑의 의미요, 예수가 이 땅에 탄생된 크리스마스의 소이연(所以然)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상층부에서는 이들을 모두 전출시키고 또다시 전쟁분위기를 조성한다. 파머 신부를 축출하면서 새로 온 스코틀랜드 주교는 새로 파견되어 온 병사들에게 마태의 구절을 읽는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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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험스럽기 그지 없는 카디샤계곡의 모습. 고행승들의 외로운 수행이 지금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카디사 계곡의 산꼭대기에서 폭포가 쏟아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희한한 자연현상이다. 영험스러운 산하의 생명력이 분출하는 장엄한 광경이다. 망원으로 촬영.
과연 기독교는 이 세상의 평화를 깨뜨리고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종교일까? 역사적 예수는 진실로 전쟁을 사랑하는 주전파(主戰派) 사상가였던가?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구절을 암송하면서 도무지 이 마태·누가의 구절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느 목사님께 문의해 보아도 나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해결해주는 분은 없었다. 그러다 결국 나는 도마복음을 만나게 되면서 나의 실존적 고뇌에 대한 확답을 얻게 되었다.
이 예수의 선포는 근원적으로 전쟁과 평화라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2원론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명제가 아니다. 이 명제의 대상은 도마복음 제1장과 제2장에서 말했듯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자’이다.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현존하는 사회적 가치체계와 갈등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유교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매우 스무드한 연속적 확충을 말했지만, 유목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중동의 사막문명에서 태어난 예수운동은 필연적으로 수신(修身)의 문제에 있어서도 본래적인 자아와 비본래적인 자아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고, 제가(齊家)의 문제에 있어서도 가족관계로부터의 격리가 문제가 되었고,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문제에 있어서도, 나라나 세상을 지배하는 세속적 권력과의 충돌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예수가 선포하는 ‘아버지의 나라’의 가치는 패밀리즘적 윤리체계(familistic ethos)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국면을 우리에게 실존적 고뇌로서 안겨준다. 예수운동의 핵심세력은 방랑자들이었고 고행하는 수도승들이었으며, 가정윤리 속에서 안착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Th.42). 인도문명은 아예 이러한 문제, 즉 ‘출가’를 보편적 사회규범으로서 제도화시킴으로써, 현명하게 해결하였다. 한 인간의 삶은 네 단계(아쉬라마, āśrama)로 구분된다. 1) 학생기(Brahmacarya) 2) 가주기(Gṛhasthāna) 3) 임서기(Vanaprasthā) 4) 유랑기(Sanyāsa), 실상 본장의 예수의 말씀은 가주기(家住期)에서 임서기(林棲期)와 유랑기(流浪期)로 전환될 때의 충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과 셋을 감관의 대결로 보는 재미있는 해석도 있다(Robert M, Grant), 둘은 안식(眼識)·이식(耳識)으로 보고, 셋은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의미맥락으로 따져보면 둘은 아버지와 엄마를, 셋은 아들과 딸과 며느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순조로울 것이다.
마태·누가와 비교해보면, 도마에는 딸-어미, 며느리-시어머니라는 여성의 대항관계가 생략되어 있다. 도마는 마지막 장인 제114장에서 다시 논의되겠지만(cf. Th.22), 여성의 독립적 개체성을 말하지 않는다. 아들 아비의 관계로서 그 모든 것이 포용되고 있다. 여성성은 남성성으로의 복귀를 통하여 온전하여진다고 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도마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융합으로의 복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ㆍ누가는 이 로기온의 핵심적 성격인 ‘홀로 서다’라는 마지막 구절을 생략해버렸다. 그들의 기독론적 케리그마에 별로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묘사할 때 쓰는 영예로운 개념이다(Three Steles of Seth 119, 17-18), 하나님은 서시는 자이다. 여기 ‘홀로 서다’는 가족관계를 끊고 세속적 가치를 전도시키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서있는 자이다. 이러한 도마복음의 ‘단독자’ 전통이 기나긴 수행승의 전승을 거쳐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주의적 단독자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홀로 서다’는 앞서 말한 ‘하나된 자’ 와 상통하는 개념이다.
▲ 제2롯데월드의 건축허가를 놓고 논란이 많다. 남산의 높이가 해발 243m, 남산타워의 높이가 236m, 도합 479.7m인데 롯데월드의 높이는 112층 555m에 이른다. 남산타워 꼭대기 피뢰침보다 더 높게 짓겠다는 것이다. 하늘에 더 가까이 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건축사에서는 고딕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면, 롯데월드는 하늘을 향한 신앙심의 극치라고나 해야 할까? 높고 좋은 건물을 짓겠다는 것을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으나 도대체 왜 그런 건물을 짓는지, 짓고 난 후에는 어떻게 그것을 유지하려는지 도무기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건물의 내용에 하등의 새로운 창조적 문명의 패러다임이 없는 것이다. 기존의 상권을 빨아 잡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망각하는 것은 20층만 넘어가도 화재시 소방서가 할 일이 별로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칼릴 지브란이 태어난 브샤레 마을을 바라보면서 인류문명의 21세기적 패러다임은 오히려 이런 모습에 있지 않을까,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영험스러운 인간의 삶이 생동치는 새로운 커뮤니티의 모습을 나는 목도하고 있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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