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7장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7장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건방진방랑자 2023. 3. 20. 13:57
728x90
반응형

 17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나 예수는 황홀한 경지를 선사하노라

 

 

한국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눈으로 보여지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황홀한 경지는 신비체험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근원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17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너희에게 여태 눈이 보지 못한 것, 귀가 듣지 못한 것, 손이 만지지 못한 것,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 한 것을 주리라.”

1Jesus said, “I shall give you what no eye has seen, what no ear has heard, what no hand has touched, what has not arisen in the human mind.”

 

 

우리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며, 헬레니즘문명권의 사람이며, 페니키아 문명의 전통 속에서 활동한 사람이며, 아시아대륙의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망각해버린다. 그리고 미켈란제로가 그린 이태리 미남형의 구레나룻 털보 남자로 생각하거나 서구라파 전통 속에 갇혀버린 전형적 서양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장의 예수 말씀도 그 본래적 의미를 생각지 못하고 기껏해야 서구적 신비주의(mysticism)의 맥락에서 오묘하게 해석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주석가들의 한계이다.

 

 

노자길과 얻음(老子道德經)14을 펼쳐보라!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라 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라 한다. ··, 이 셋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아니 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아니하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도다. 다시 물체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 없는 모습이요, 물체 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를 일컬어 홀황(惚恍)하다 하도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놀라웁게도 예수의 말과 노자의 말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처음의 삼자, 볼 수 없는 것(the invisible), 들을 수 없는 것(the inaudible), 만질 수 없는 것(the intangible)이 순서도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 이 이··미 삼자는 논리적으로 꼬치꼬치 따져 규명할 수 없다는 노자의 말은 예수에게서는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 한 것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다. 즉 인간의 개념적 언어인식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일자 즉 하나(the One)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곧 전체인 것이다. 그 하나는 모습 없는 모습이요, 물체 없는 형상이다. 모습은 모습이되 모습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노자는 홀황(惚恍)이라 표현했다. 우리말의 황홀이라는 말이 바로 노자14장에서 유래된 말이다. 예수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이 황홀의 경지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뜻을 해설하기 전에 고린도전서 2:9를 펼쳐보라!

 

 

기록된 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기록된 바라고 하여 인용한 이 구절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복음서가 쓰여지기 이전에 죽은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의 메시지는 4복음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사야 64:3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나 그 의미맥락이 전혀 다르다. 바울의 이 인용은 도마복음서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사계의 권위 로빈슨(M. Robinson)의 주장이다(The Fifth Gospel 108). 도마복음서의 직접 인용이 아닐 지라도, 최소한 도마복음서의 자료가 된 어떤 전승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성서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큐복음서 제33(13:16~17, 10:23~24)에 나오는 너희가 지금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라는 예수의 말씀도 본 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본 장을 이해하는 핵심은 황홀의 해석에 있다. 마태 13:17이 말하는 바 선지자나 의인이 볼 수 없는 것은 결코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에 의하여 새롭게 선사되는 혁명적인 그 무엇이다. 여태까지 최고의 권력자들인, 선지자들이나 왕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그 눈이야말로 복된 것이다(many prophets and kings desired to see what you see, and did not see it, 10:24).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드는 데 바로 예수나 노자의 말씀의 위력이 존하는 것이다.

 

볼 수 없는 것, 들을 수 없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객관적 사유 속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이라는 것도 개념적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황홀이란 결코 신비로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명(有名)의 세계에 대하여 무명(無名)을 말할 뿐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유명이란 유욕(有欲)의 다른 말이요. 무명이란 무욕(無欲)의 다른 말이다. 인간은 결코 개념적 인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개념적 인식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 고착성이다. 고착적 개념은 그릇된 욕망을 자아낸다. 인간의 과도한 분별지(分別智)는 항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니지만, 고착된 개념을 향한 집착은 인간을 독선과 오만과 번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만다. 집착이나 욕심, 욕정이 사라지면 분별지는 무분별지로 전식(轉識)하게 되고, 무명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보이는 것에 집착키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예수로부터 선물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당만 짓고 세속적 축복 만을 갈망하고 물리적 번영만을 기구(祈求)한다. 초기 예수운동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였다. 보이는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들을 수 있는 것을 버리고 들리기 않는 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추구의 핵심은 나 존재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다. 욕망의 부정은 욕망의 근절이 아니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 마음속에 통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들에 대한 집념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어찌 세속의 형상에 집착하는 자들을 예수를 믿는 자라 말할 수 있으리오?

 

 

구약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찬란한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할 때, 반드시 떠오르는 단어가 레바논의 백향목(柏香木)’이다. 어려서부터 레바논의 백향목이라는 말은 나에게 백향이라는 음성학적 울림과 함께 매우 로맨틱한 상상력을 자아냈다. 나의 체험이 미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물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무 중에 왕이요, 레바논의 영광이며(35:2, 60.13), 그 강인함과(29:59), 장대한 높이와(왕하 19:23), 위엄(왕상 4:38, 왕하 14:9)으로 천하를 제패하는 생명의 나무였다. 그런데 그 백항목을 직접 바라보는 나의 가슴속에서는 로맨스가 역사로 변하고 있었다. 그 숲에서 진동하는 형언키 어려운 항기는 나의 영혼을 씻겨주는 힘이 있었다. 우리나라 금강산의 미인송 비슷한 소나무과(family Pinaceae)에 속하는 상록교목인데 더 굵고 단단하다. 솔로몬은 두로 왕과 상업 동맹을 aowrh 레바논 산에서 자른 백향목을 욥바까지 뗏목으로 내려보내, 거기서 예루살렘까지 육로로 40킬로를 갔다. 솔로몬은 백향목의 대가로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두로 왕에게 주어야 했다. 백향목은 해발 1500m 이상에서만 자라고, 나이테가 1~2cm가 되는 보통 나무들과 달리 1~2mm 밖에는 되지 않는 단단하고 곧은 나무이다. 불행하게도 수천 년 동안 벌목만 하고 심지를 않아 지브란의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4km) 카디샤에 400여 그루가 남아있을 뿐이다.

 

 

인용

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