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태어난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
나 예수는 여자가 낳았다
❝예수는 자기를 경배의 대상으로 선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을 경배할 수 없다. 인간이 경배해야 할 것은 오직 ‘아버지’일 뿐이다. 아버지는 인간의 형상 속에 갇힐 수 없다. 우리는 아버지를 인간의 편협한 인식의 틀 속에 가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제15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를 볼 때에는 너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그를 경배하라. 그 이가 곧 너희 아버지니라.”
1Jesus said, “When you see one who was not born of woman, prostrate yourself on your faces and worship him. That one is your father.”
끊임없이 참신한 충격과 계발을 던져주는 예수의 말씀은 이어진다. 여기서 우선 예수는 추구하는 자(the seeker)에게 하나님 아버지(the Father)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는(to see) 권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인가? 하나님 아버지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one who was not born of woman)’이다. 즉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는 하나님일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성(the divinity)은 창조된 피조물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후대의 교조화된 기독론 이전의 참신한 사상을 전해주는 예수의 말씀이다. 이 말이 예수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이며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 전혀 없다.
공관복음서에서도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서의 자기인식은 주로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메시아와 부활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는 메시아일 수가 없었다.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을 해야만, 부활 후에 공동체의 메시아적인 왕이 되는 것이다. 영원한 왕권을 수여받는 다윗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부활이라는 사건이 없이는 별 의미가 없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하나님의 독특한 개입행위와 함께 아들의 왕적 통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활을 해야만 예수의 사역이 다윗가문에게 약속하신 통치로 이해되며, 하나님의 위임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에서는 이러한 종말론적 맥락이 일체 배제된다. 하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도 당연히 여자에게서 태어날 수 없다. 도마복음서 속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이 없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이다. 경배의 대상은 오직 아버지이실 뿐이다.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이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고민은 바울에게서도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화해되고 있지만, 바울은 예수의 인성을 확고하게 인정한다. 예수운동의 영향일 수도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 (갈 4:4).
여기서 충격적인 것은 바울이 전혀 ‘동정녀 마리아의 신화’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시었다’라는 것은 바울의 의식 속에서 예수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는 여자의 자궁에서 정상적인 생리과정을 통하여 태어난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확고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에게서 태어났고, 율법의 속박을 받는 자라는 이중적 규정은 예수의 인성(humanity)과 신체성(physicality)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역사적 사실은 예수는 바울이 생각하는 협애한 개념의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위) 예수 탄생 자리의 다윗의 별
(아래)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제단쪽에서 찍은 사진, 이 제단 지하에 구유간이 있다. 이 교회는 입구가 사람 키도 안되는 조그만 돌문인데 이슬람병사들이 말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후대에 그렇게 축소된 것이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라는 도마복음의 문구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찰해야 할 공관복음서의 중요한 언급이 있다. 그것은 큐복음서에 속하는 자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눅 7:28, 마 11:11, Q24, Also see Th.46).
도마복음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요한에 대한 이러한 예수의 언급에 대해 별 부담이 없었다. 예수의 신성이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파와 예수파의 갈등은 초기기독교의 매우 심각한 주제였다. 예수는 분명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 이 사실은 곧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요한의 세례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예수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은, 예수의 절대적 우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략되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장면을 삽입한 것은 역사적으로 새로운 그리스도운동을 보편화시키기 위해서는 세례요한이라는 존재의 성세(聲勢)를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세례요한의 대중적 심상은 예수보다 강렬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요한을 등장시키는 대신에 ‘물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라는 이분법적 논리와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는 굴종적 메시지를 세례 요한을 통해 말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 도마복음의 언급에 비추어 본다면 큐자료의 언급은 그러한 파벌의 대립적 의식이 없다. 예수도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요, 세례요한도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이다. 그런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라고 한다면 역사적 예수는 겸손하게 세례요한의 위대성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운동을 통하여 선지자와 율법의 시대를 종식시킨 위대한 인물! 그는 자기보다도 더 큰 인물이라고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마 11:13).
그러나 여기 더 중요한 포인트는 그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예수나 요한이나 여자에게서 낳은 자인 이상 엎드려 경배할 대상이 아니다. 경배할 대상은 오직 ‘아버지’일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자에게서 태어날 수가 없는 존재이다. 아버지는 육화(肉化)될 수도 없다. 도마복음의 사상체계 속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수육(受肉, Incarnation)사상도 거부된다. 아버지는 물화(物化, embodied)된 존재로서 국한되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눅 7:28: 마태는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씀)하는 것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로서의 위대함과 비소(卑小)함의 분별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인간적 분별이 사라지는 경지가 곧 도마의 예수가 말하는 ‘아버지의 나라(the kingdom of the father)’인 것이다. 여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그를 경배하라’는 의미도 단순히 컬트적 제식(proskynesi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 앞에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예수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이 아버지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친 사상가였다.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보다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하나님은 이미 종족신화된 천박한 개념이고 ‘아버지’는 개체화된 심오한 개념이다.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이면서도 나로부터 객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를 볼 수만 있다면 오죽 좋을까? 얼마나 황홀할까? 그 때에는 너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그를 경배하라. 그이가 곧 너의 아버지이시다. 매우 단순하고, 잘못 생각하면 컬트적 표현같이 들릴수도 있지만, 무엇인가 심오한 성자들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나는 이 순간에도 생각해 본다.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성스러운 나무 한 그루의 모습에서,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를 볼 때에 나는 그를 경배하리라. 그리고 예수 말씀을 생각하리라. 그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다.
▲ 여기 브샤례마을 밑에 카디샤계곡의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성 엘리사 수도원(the Monasters of Saint Elisa the Prophet)을 내가 쳐다보고 있다. 이 수도원의 내부는 많은 바위동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주변으로도 부속 암자와 같은 많은 동굴 속에서 수도승들이 고행을 하고 있다. 도마기독고는 이러한 고독한 수도승들의 전통을 창조하였다. 아라비아사막의 풀과 안토니로부터 내려오는 단독자의 전통은 마론파들에게까지 계승되고 있다. 16세기 이전의 이 수도원의 역사는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다(1533년 증축기록 있음). 그러나 상당히 오래된 전통의 수도원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서 엘리야의 영험을 두 배로 물려받은 선지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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