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존재와 존재 – 전(前) - 존재
돌이 떡이 되어 너를 섬길 때 진실로 너는 영적이 되리라
❝세속적 존재에 앞선, 존재하기 이전의 존재를 말하는 도마에는, 요한복음 로고스기독론의 선구적 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도마는 그 로고스를 모든 인간의 가능성으로서 개방시킨다.❞
제19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한 자여, 복되도다. 2너희가 나의 따르는 자들이 되어 내 말을 듣는다면,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 3왜냐하면 너희를 위하여 파라다이스에 다섯 그루의 나무가 준비되어 있나니, 그 나무는 여름과 겨울에 따라 변하지도 아니 하며, 그 잎사귀는 떨어지지도 아니 하기 때문이다. 4그 나무들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1Jesus said, “Blessed is the one who came into being before coming into being. 2If you become my followers and listen to my words, these stones will minister to you. 3For there are five trees in Paradise for you; they do not change, summer or winter, and their leaves do not fall. 4Whoever knows them will not taste death.”
도마복음이 일시에 한 사람에 의하여 집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로기온자료들도 다양한 전승의 예수 말씀들이 누군가에 의하여 수집된 결과물일 것이다. 그 수집과정이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수집의 주체가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도마복음의 내용들은 최소한 마가복음에 선행하는 것으로, 복음서리는 드라마적 양식을 규정짓고 있는 사상적 틀에 오염되지 않은 어떤 오리지날한 예수운동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사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리가 도마복음을 복음서로서 이름짓는 것은 원 텍스트의 말미에 ‘유앙겔리온(복음)’이라는 제목이 붙어있기 때문인데, 도마복음의 복음의 의미와 공관복음서의 복음의 의미는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다른 함의를 지닐 수 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good news)’이다. 마태복음 11:5에는 종말에 대한 기쁜 소식이 전파되며, 누가복음 16:16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 전파되고 있다. 그러나 도마의 기쁜 소식은 종말론이나 기독론적 함의를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이 신화적 담론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도마복음은 결코 영지주의적 담론의 소산으로 보기 어렵다. 영지주의라는 것 자체가 일괄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대부분 유치한 신화적 코스몰로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는 그러한 신화적 코스몰로지를 전제로 하기보다는 매우 견고한 우리의 상식에 호소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장의 기술은 신화적 코스몰로지의 어휘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 도마에도 역시 중층적 담론의 기층들이 복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이 안티옥 외곽 동굴교회의 전면은 12-13세기 십자군 시기의 작품이지만 그 내부의 석굴은 사도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의 본부었다. 베드로도 여기에서 한때 머물렀다. 이 석굴교회야말로 이방기독교의 산실이라 말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성지이다.
우선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세속적ㆍ현상적 존재와, 그 세속적 존재 이전의 존재, 즉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한 자(a pre-existent existence)’라는 어떤 신화적 존재의 이원적 틀이 본 장의 담론에 전제되어 있다. 창세기에도 1:1~2:4a의 담론(원융, 온전)과 2:4b~3:24의 담론(분열, 타락)이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상의 전후를 말하는 존재의 하이어라키에 그치지 않는다. 요한복음 1장에 깔려있는 로고스기독론에도 이런 틀이 깔려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든가 요한복음 9:58의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와 같은 언어는 이런 세계관을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존재-전-존재 | 로고스 | 본체 |
존재 | 코스모스 | 현상 |
이러한 사상의 배경에는 영지주의가 깔려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44~49에는 바울이 이러한 세계관을, 희랍적 영·육이원론의 틀 속에서 철저히 부활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서 사용하고 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첫 사람 아담은 육의 인간이며 땅의 사람이고, 마지막 아담 즉 부활한 인간은 영의 인간이며 하늘의 사람이다. 도마의 존재-전-존재는 오히려 바울의 마지막 아담과 상통한다. 요한은 로고스를 예수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지만 도마는 그러한 가능성을 모든 인간에게 허용한다. 그래서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한 자들이야말로 복되도다 라고 말한 것이다.
첫 사람 아담 | 코스모스 | 존재 | 육의 사람 |
마지막 아담 | 로고스 | 존재 - 전 - 존재 | 영의 사람 |
그러한 로고스적 가능성을 소유한 인간이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을 듣는다면,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
‘내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제1장에서 말한 바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진기한 과정이다. 인간과 돌 사이에는 또다시 존재의 하이어라키가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도마는 암암리 인간의 차원과 돌의 차원을 대적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큐자료에 속하는 마태 3:9(눅 3:8)에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낼 수 있다’라는 식의 표현이 있고, 예수의 광야시험 장면에서도 사탄은 예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한다(마 4:3, 눅 4:3). 마태 7:9에는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는가’라는 식의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 돌과 떡을 대비시키며, 또 영에 대하여 육의 욕구인 떡을 비하시키고 있다. 그러나 도마는 돌이야말로 떡이라고 하는 생명의 일체감을 암시하고 있다. 돌과 같은 존재조차도 나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불가결의 것이다. 사람은 광물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돌과 같은 저차원의 물질과도 생명적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돌은 궁극적으로 땅적인 존재의 모든 것을 상징한다. 창세기 1:28~30에는 인간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라는 표현은 그러한 창세기의 구절과도 관련이 있다.
파라다이스의 다섯 그루 나무라는 표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창세기 2:9에는 ‘야훼 하나님께서 보기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에덴의 땅에 돋아나게 하셨다’라는 표현이 있다. ‘파라다이스’라는 표현은 원래 페르시아 말로서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 페르시아 말이 셉츄아진트 번역자들을 통하여 에덴의 동산을 가르치는 말로서 유대문화권에 들어왔다. 신약에서는 지상의 정원이 아닌, 지상의 모든 죄악이 말소된 새로운 차원의 낙원을 의미한다. 예수는 같이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있으리라’고 말한다(눅 23:43), 묵시문학에서는 파라다이스의 상실은 인간의 체험 속에서의 신의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며 구원을 파라다이스의 복원으로 생각한다. 실락원과 복락원이라는 드라마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 나와 네 줄기로 갈라진다(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파라다이스 다섯 그루의 나무’는 이 에덴의 본류와 네 줄기의 강들을 합친 다섯 강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인간의 타락 이전의 에덴의 상태로의 복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본 장의 ‘파라다이스 다섯 그루의 나무’를 인간의 오관(五官, five senses)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촉(觸)에 상응하는 오관이 세속적 죄악에 물들지 않는 상태를 ‘계절에 따라 변하지도 않으며 그 잎사귀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 불멸성ㆍ불변성을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한다’라고 다시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불멸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맛본다고 하는 삶의 행위 속에 죽음의 요소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장, 18장, 19장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라는 표현을 마지막에 공유함으로써 그 상관성을 과시하고 있다. 관련된 표현이 요한복음 8:52에도 있다.
▲ 1930년대 발굴을 통해 드러난 안티옥지역의 모자이크 소테리아(Sōtēria, salvation) 라는 글시가 새겨져 있으니 이 여인이야 말로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구원의 여신일 것이다. 기독고 이전의 헬라인들의 구세주관을 엿볼 수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놓고(偏袒右肩, 싯달타의 습관) 월계관을 쓰고 화려한 목걸이를 한 이 여인의 모습은 헬레니즘시대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śvara)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인용
'고전 >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마복음한글역주, 제20장 - 수평적 확산과 수직적 확대 (0) | 2023.03.20 |
---|---|
도마복음한글역주, 제20장 - 겨자씨와 백향목 (0) | 2023.03.20 |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8장 - 페르시아적 사유와 초기기독교 (0) | 2023.03.20 |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8장 - 시작과 끝 (2) | 2023.03.20 |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7장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0) | 2023.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