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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37장 - 부끄러워 말고 발가벗어라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37장 - 부끄러워 말고 발가벗어라

건방진방랑자 2023. 3. 22.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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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부끄러워 말고 발가벗어라

 

 

37

1그를 따르는 자들이 여쭈어 가로되, “언제 당신은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오리이까, 그리고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게 되오리이까?” 2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부끄럼 없이 발가벗을 때, 그리고 너희가 어린 아해들처럼 너희 옷을 벗어 발 아래 두고, 짓밟을 때, 3비로소 너희는 살아 있는 자의 아들을 보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는 두렵지 않게 되리라.”

1His followers said, “When will you become revealed to us and when shall we see you?” 2Jesus said, “When you strip without being ashamed and you take your clothes and put them under your feet like little children and trample them, 3then you will see the son of the living one and you will not be afraid.”

 

 

우선 예수 도반들(Jesus followers)의 질문이 심상치 않다. 살아있는 예수가 그들 앞에 있는데 마치 없는 것처럼 질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마28에서 이미 예수는 나는 이 세상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육신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나타났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당신은 언제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까, 그리고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볼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좀 어색하다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이 정신적 깊이가 있는 사람들이라서, 지금 우리가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어떠한 정신상태에 이르러야 당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러한 내용의 화법이라면 예수 도반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 사이에는 부드러운 연속성이 감지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질문 속에는 어떤 종말론적 기대가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어떤 거대한 우주변동의 시기에 웅대한 예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대심판관의 화려한 모습으로, 왕다운 예복을 걸친 당당한 면류관의 당신을 언제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오리이까,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을 후대의 작품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초대교회 자체가 불트만의 말대로 종말론적 회중(Eschatological Congregation)이었으므로 이 37장이야말로 종말론을 부르짖는 초대교회 정통파들에 대한 반박이라고 해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시대에도 종말론적 기대라는 것은, 쿰란공동체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팽배되어 있던 것이므로, 이 질문은 예수운동 자체 내에서의 도반들의 질문의 한 유형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본 질문을 반드시 종말론적 배경 속에서 해석해야할 당위성은 없다. 매우 상식적인 시각에서 보다 본질적인 해후를 추구하는, 해석의 발견자들의 고충이 표현된 말이라고 이해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여튼 본 장의 주제를 종말론적으로, 혹은 실존적으로 해석하든지간에, 본 장의 질문과 대답 사이에는 매우 드라마틱한 사고의 전환이 개재되어 있다.

 

언제 당신을 볼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하여 어린애처럼 발가벗어라라는 명령은 가히 선()문답적인 급전(急轉)이다. ‘의 대상인 당신이 주어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노력하는 주체의 내면적 상태가 갑자기 도마 위에 올려지고 있다. ‘어린 아해의 비유는 이미 4, 22에서 인간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지시하는 긍정적인 의미체로서 등장한 바 있다.

 

부끄럼없이 발가벗는다라는 표현에 관하여 주석가들은 너무 전통적인 시니피에(signifié)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말에 해탈(解脫)’ 이라는 말은 너무도 쉽게 예수의 본의를 전달한다. ‘()’라는 것은 모든 의식의 매듭을 풀어버린다는 뜻이다. ‘()’이란 옷을 벗어던진다는 뜻이다. 여기 해탈이란 사회적 관습이나 속박, 부귀나 권세의 모든 세속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유를 획득할 때 비로소 너희는 살아있는 자의 아들을 보게되리라는 명제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러한 삶의 자세는 매우 동방적 가치에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 어린 아해의 비유도 노자(老子)영아(嬰兒)’를 연상시킨다(도덕경10·20·28·49). 분별적 인식 이전의 온전한 상태로의 복귀를 뜻하고 있다그 숫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계곡이 된다. 하늘 아래 계곡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떠나질 아니 하니 다시 갓난아기로 되돌아간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28.

 

그런데 서구의 주석가들은 이러한 소박한 명제를 유대인의 전통적 신화구조 속에서 그 의미를 규정하려고 애쓴다. 창세기 2:25에는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라는 구절이 있다. ‘벌거벗는다는 의미는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The Fall)하기 이전의 무분별 상태로 복귀한다는 신화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 발가벗는다는 초대교회의 세례(baptism)의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세례의 욕조에 들어가기 전에 피세례인은 옷을 벗어 발아래 두고 알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알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육체적 몸의 제거(the removal of the freshly body)’를 상징한다. 그리고 옷을 어린애처럼 짓밟는 행위는 어린애같은 천진성과 순결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적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같은 나그함마디문서인 빌립복음서(Gospel of Philip)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살아있는 물은 하나의 신령한 몸이다. 살아있는 인격을 새로 입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세례시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그는 옷을 다 벗어버려야 하는데, 그것은 살아있는 인격을 새롭게 입기 위한 것이다.” (75, 21~25).

 

그리고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비법전수 교리문답Mystagogical Catechesis2.2)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렇다면 네가 들어가려 할 때에는, 너는 반드시 너의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이것은 너의 옛 인격을 그 행위와 더불어 벗어버리는 이미지를 나타낸다. 옛 인격을 벗어버리고 네가 알몸이 되었을 때, 얼마나 황홀한가! 너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알몸이 되었고 부끄러울 줄을 모른다! 너는 진실로 막 만들어진 아담의 모습이 된 것이다. 파라다이스에서 알몸이 되었어도 부끄럽지 아니 하던 그 아담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세례와 관련된 표현이 아우구스티누스설교집(Sermon)(216. 10~11)에도 나온다.

 

하여튼 여기 옷을 벗는다는 사태는 우리 몸에 걸친 사회적 분별을 나타내는 의상을 벗는다는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옷이 곧바로 우리 육신을 의미한다는 데 그 상징적 특수성이 있다. ‘옷벗음은 육신의 부정이며 육욕의 부정이다. 사실 이러한 논리는 이미 복음서 성립 이전에 활약한 바울의 서한 속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4를 한번 보자!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 있나니,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 2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이렇게 입음은 발가벗은 모습으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이 땅의 장막에 있는 우리가 무거운 짐에 짓눌린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라.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바울의 유명한 메시지 속에서 발가벗은 모습으로 발견된다(to be found naked)’라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의미맥락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바울의 고후5장 메시지는 이전의 종말론적 입장과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하늘의 몸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의 재림 때에 가서야 가능하다고 보았다면(고전 15:51~58, 살전 4:13~18, 3:20~21), 여기서는 예수의 재림 이전에 이미 사람이 개체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개체적인 죽음을 맞이한 상태와 예수재림의 마지막 심판의 날과의 사이에는 시간적 갭이 있게 된다. 이 시간적 갭의 상태는 티베트 밀교에서 자주 말하는 것과도 같은 중유(中有, antarā-bhava)적 존재가 된다. 보통 성서주석가들은 이것을 중간기라고 말하는데, 바울은 여기서 이 중간기의 상태를 발가벗은 모습으로 발견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중간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재림사건을 맞이하기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발가벗은 모습으로 발견되지 않기를 갈구하면서, 현존의 땅의 장막 속에 살고 있다가 곧바로 하늘의 집을 덧입고싶다는 것이다. 바울의 레토릭에 있어서는 영과 육을 아주 이원론적으로 실체화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는 온전한 몸에 항상 관심이 있다. 영적인 몸이 된다고 해서 육신이 사라지는 허깨비를 말하고 있지 않다. ·육의 미분리 상태는 암암리 바울 사유의 저변에 항상 깔려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도 땅의 집 위에 하늘의 집을 덧입을뿐이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어도 죽을 것이 완벽하게 무화(無化)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철저히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체질적으로 발가벗는 것을 두려워 한다. 특히 어려서부터 바리새인으로서 엄격한 삶을 살았던 바울은 정당한 예복을 입지 아니 하고 알몸이 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다. 옷을 입지 않은 자는 쉐마(sherma)유대인 신앙을 고백하는 대표적 문구. 매일 아침·저녁으로 낭송한다. 6:4~9; 11:13~21; 15:37~41로 구성됨를 낭송할 수도 없었다.

과연 고후 5장의 바울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는 이견(異見)이 많다솔로몬출판사에서 나온 랠프 P. 마틴의 주석 고린도후서 WBC 40에 자세하다. 김철 번역,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이 바울이 발가벗은 몸으로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노라라고 말한 것은 이미 고린도 교회에 팽배하여 있던 어떤 영지주의적 성향을 비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울이 비판하는 영지주의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전통적 주석가들에게 있어서 영지주의는 초대교회에 해악을 가져다주는 모든 악의 복합체였을 뿐이다. 터무니없는 영지주의라는 개념의 실체에 그들은 매달렸다. 전통적 주석가들이 말하는 영지주의적 발가벗음영지가 신체를 벗어나는 상태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우리는 도마복음의 출현과 더불어 재미난 가설을 세워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발가벗음의 원의가 도마복음에 명기되어 있고, 그러한 도마식 이해방식이 이미 AD 50년대 중반의 초대교회에 침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도마의 발가벗음은 종말론을 전제로 하지 않은 자각적 해탈론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지혜를 허용할 수가 없었다. 바울의 신념 속에서는 모든 것이 철저히 종말론적 의인론(義認論)’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만이 인간은 해탈할 수 있으며 영적인 몸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 본인은 예수의 부활을 전제하지 않는 발가벗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본 장에서 마지막으로 명료하게 해야 할 구문은 살아있는 자의 아들을 보게 되리라라는 표현이다. 질문이 언제 예수 당신을 볼 수 있습니까?’였으므로, 대답에서 봄의 대상은 예수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자(the living One)’는 하나님이 되어야 하고, ‘살아있는 자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될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이해가 어떤 고정불변의 절대적 이데아적 개념이 아니라(유일신론이 헬레니즘세계에서 플라톤화 되었다), 단지 살아있는 자를 의미했다는 것도 가능한 규정이다. ‘살아있는 자라는 개념 속에서 예수와 하나님이 동일시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살아있는 자는 예수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1에서 이미 살아있는 예수를 말했고, 3에서도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은 예수 자신이 아닌 예수 도반들을 향한 말이었다. 그리고 108에는 내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마시는 자는 나와 같아지리라라고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를 언제 바라볼 수 있겠느냐는 도반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바로 살아있는 자의 아들’, 나 예수의 아해들인 너희 자신을 바라보라! 라는 선()적 회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면 너희는 두렵지 않게 되리라. 너희 삶에 닥치는 모든 환난을 용감하게 대면하는 살아있는 나의 도반이 되리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례금덕분에 모시고 올 수 있었던 에즈발 부우사의 청년. 앞의 두건 두른 사람이 필자. 바로 왼쪽의 큰 바위 아래가 코우덱스 문서 발견지. 저 뒤로 보이는 동네가 함라돔.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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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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