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나를 발견치 못하는 날들도 있으리라
제38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러 번 너희는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하고 있는 이 말들을 듣기를 갈구하였도다. 그리고 너희는 이 말들을 나 이외에 어느 누구로부터도 들을 수 없도다. 2너희가 나를 구하고자 하나 나를 발견치 못하는 그런 날들이 있으리라.”
1Jesus said, “Many times have you desired to hear these words which I am saying to you, and you have no one else to hear them from. 2There will be days when you will seek me and will not find me.”
이 장의 언어도 언뜻 그냥 순수하게 읽으면 매우 신비롭게도 들리고, 황당하게도 들린다. 그런 황당감, 당혹감이 바로 이 로기온을 편집한 사람이 노리는 것이다. 이 로기온의 내용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복음서에 익숙한 독자들은 ‘나를 발견치 못하는 그런 날들’과 같은 표현을 접할 때는 즉각적으로 종말론적 함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도마의 예수는 전혀 그러한 종말론적 함의를 가지고 있질 않다. ‘발견치 못하는 날들’의 황당함, 공허함은 오직 추구와 발견의 고귀함, 그 강도를 높여줄 뿐이다. 독자들은 본 장을 통하여, 도마와 같은 원자료들이 어떻게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다양한 자신들의 내레이션 문맥에 따라 자의적으로 활용되고 왜곡되는지, 그 명료한 샘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관련된 복음서 기사들을 살펴보자!
(마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들과 의로운 사람들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갈구하였어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갈구하였어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눅 10: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들과 임금들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갈구하였어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갈구하였어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눅 17:22)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의 영광스러운 날 중 단 하루를 보고자 갈구하여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그런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요 7:33~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나를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다이애스포라로 가서 헬라인이라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나를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한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이 4개의 관련된 파편을 살펴봐도 초기기독교의 발전과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소박한 도마의 로기온이 어떻게 복음서 저자들의 문제의식 속에서 임의적으로 활용되었나 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먼저 마 13:17과 눅 10:24는 큐복음서에 속하는 자료이다(Q33), 여기서 우리는 도마자료의 성격과 큐자료의 성적이 일치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큐자료의 성격을 통하여 도마자료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큐자료에는 종말론적 전제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지금 너희가 보고있는 바를 보고있는 그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라는 말씀이 선행되어 있다. 누가자료가 큐자료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깝다. 마태자료(마 13:16)는 ‘봄’과 ‘들음’의 파라렐리즘에 맞추어 누가자료를 세련화시켰다(가필이 역력하다): “너희 눈은 볼 수 있기 때문에, 너희 귀는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복이 있도다.”
여기 큐자료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볼 수 있다’ ‘들을 수 있다’는 인간의 내면적 가능성에 대한 축복이다.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노래,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What a wonderful world)’의 첫 줄을 생각해보자! ‘나는 본다. 저 초록 빛 나무를, 그리고 저 붉은 장미를, 나는 본다. 저 붉은 장미가 너와 나를 위해 피어나는 것을 .…’ 여기서 ‘본다’는 어찌 단순히 물리적 시력의 문제이겠는가? 미국의 흑인들이 고통의 세월을 겪고 그것을 인종으로 견디어낸 후에 쳐다보는 ‘푸름’이요 ‘붉음’이 아니겠는가?
도마의 본 장 1절의 외침은 이것이다. 너희는 지금 나의 말을 듣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말을 듣기를 갈구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들은 축복된 존재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갈구(desire)’이다. 예수의 도반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기를 갈구하는 존재들이다. 그 갈구가 있는 한 그들은 축복받은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보다 절실하게 만들기 위하여 예수는 말한다: “너희는 이 말들을 나 이외의 어느 누구로부터도 들을 수 없다.” 이 명제는 예수의 자신감, 진리에 대한 확신을 나타내주는 명언(明言)이다. 그리고 예수 도반들과 예수 사이의 친밀감(intimacy), 유대감(solidarity), 유일함(uniqueness)을 강조하고 있다. 이 주제를 발전시켜 큐자료는 많은 선지자들과 의로운 사람들(마), 많은 선지자들과 임금들(눅)이 보고자 갈구하였어도 보지 못했고, 듣고자 갈구하였어도 듣지 못한 유니크한 사태라고 선언한 것이다.
본 장의 메시지는 명료해진다. 이전의 선지자들도, 왕들도, 그 모든 세속적 영화를 누린 지혜자나 권력자들도, 듣지 못했던 것을 지금 너희는 듣고 있다. 이것은 나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인 것이다. 제2절은 이러한 축복된 특권적 사태에 대한 반전의 가능성이 예시(豫示)되고 있다. 갈망은 절망을 낳는다. 추구와 발견은 항상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좌절의 날이 있으며 공허한 미충족의 가능성이 있다. ‘나를 구하고자 하나 나를 발견치 못하는 그런 날들’이라는 것은 전혀 종말론적 예언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추구와 발견의 미충족을 나타내는 예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날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날들이 무수히 그대들의 추구의 전도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오늘 그대들의 갈망이, 살아있는 나 예수와 같이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누가는 본 장의 원자료에서 1절과 2절을 분리시켰으며, 2절의 내용을 눅 17:22에서 인자담론과 결합시켜 종말론적 맥락으로 변형시켰다. ‘인자의 영광스러운 날들(the days of the Son of Man)’은 이미 ‘수난 – 죽음 - 부활 - 재림’의 모든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 도마의 ‘나를 발견치 못하는 날들’을 ‘인자의 영광스러운 날 중 단 하루를 보지 못하는 그런 날들’이라는 식으로 변형시켰다. 발견의 대상을 ‘예수’에서 ‘예수의 재림의 날’들로 이전시켰다. 물론 ‘재림, 혹은 마지막 심판의 날들’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 날들의 예수의 모습’이 전제되어 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 편에서 번쩍하여, 하늘 아래 저 편까지 비침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눅 17:24). 누가는 도마의 추구와 발견의 상식적 로기온을 지독한 종말론적 콘텍스트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적인 주석가들의 보고에 의하면 눅 17:22의 구절이 마태와 마가에 없는 것인데 묘하게 여기 삽입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그 삽입구의 원형이 도마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말론적 맥락으로의 변형이 요한복음에 이르게 되면 황당하게도 후대 기독교의 문제의식으로 변형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나를 만나지 못한다’라는 메시지가 ‘너희와 조금만 더 있다가 나는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아주 노골적인 드라마대사에 연접되어 있어, 역시 ‘승천(昇天)’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변형되어 있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에 대한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수군거리는 말들은 공관복음서의 감각으로는 삽입되기 어려운 말들이다: “아니 예수가 희랍문화권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다이애스포라로 가서 거기서 살면서 주변의 희랍인들을 가르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것은 분명히 이미 바울이 한 선교사업을 이미 예수가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후대의 이방인기독교의 맥락이 상식화되어 있던 시대의 어법이다.
도마의 원문을 잘 살펴보면 1절은 ‘들음’을 말하고 있고 2절은 ‘봄’을 말하고 있다. 이 들음과 봄의 표현이 함께 압축되어 마 13:16~17, 눅 10:23~24의 큐자료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1절의 주제는 큐자료로 가고, 2절의 주제는 ‘발견치 못하는 그런 날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종말론적으로 변형되어 눅 17:22와 요 7:33~36으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도마가 4복음서의 아키타입을 이루는 어떤 원자료의 전승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표현의 갈래들을 비교해보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도마의 로기온은 4복음서 이외로도 이레나에우스 등의 저작물에서도 그 변형된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레나에우스의 『이단들에 대하여(Against Heresies)』(1. 20. 2) 속에 예수가 말한 것으로 인용된 구절인데 다음과 같은 좀 변형된 표현이 있다.
여러번 그들은 이러한 말들의 하나라도 듣기를 갈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같은 말을 해줄 수 있는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니교 시편(Manichaean Psalin Book)』(187, 28~29)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는 말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수 있는 어떤 자도 내 곁에 있지 않다.
『요한행전(Acts of John)』(98)에는 예수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한이여! 그 누군가 나에게서 이 말을 들어야 한다. 나는 이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의 키프리안(Cyprian of Carthage, ca.200~258)이 쓴 『퀴리누스에게로의 증언 세 책(Three Books of Testimonies to Quirinus)』(3.29)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네가 나를 찾을 날이 오리라. 너와 너 뒤에 오는 자들이 지혜와 깨달음의 말들을 나에게서 듣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본 장 마지막 구절에 관하여 데이비스(Stevan Davies)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내리고 있다. ‘너희가 나를 구하고자 하나 나를 발견치 못하는 그런 날들이 있으리라’는 말 속에서 예수는 ‘구함(seeking)’의 대상이 나 예수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함’은 나 밖에 있는 예수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도반들은 예수를 자기 속에서 그리고 그들이 살고있는 세계 한복판 속에서 추구해야 한다. 자기 밖으로 예수를 찾으러 다니면 예수는 거기 있지 않을 뿐이다. 결국 도반들의 추구는 자기 내면의 원초적 융합(the primordial Beginning)로 돌아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앞 장(Th.37)과 주제의 연속성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나그함마디 문서 발견지를 탐방하고 내려왔을 때 나를 둘러싼 함라돔의 어린이들. 뒤로 보이는 절벽 밑 바위가 두 개 놓인 곳이 바로 문서 발견지.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는 꽤 먼 거리다. 이런 아이들이 도마복음을 발견한 것이다. 사진=임진권 기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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