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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78장 - 황량한 사막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을 보려느냐?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78장 - 황량한 사막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을 보려느냐?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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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황량한 사막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을 보려느냐?

 

 

78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무엇 때문에 모래벌판에 나왔느뇨?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함이냐? 2그렇지 않으면, 너희 왕들이나 너희 궁전의 힘센 고관들처럼 화려한 옷을 두른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냐? 3진실로 그들은 화려한 옷을 둘렀으나 그들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느니라.”

1Jesus said, “Why have you come out into the desert? To see a reed shaken by the wind? 2And to see a person dressed in fine clothes, like your rulers and your powerful ones? 3They are dressed in fine clothes, and they cannot understand truth.”

 

 

이 장 역시 문맥은 전혀 다르지만 큐복음서와 병행하고 있다(Q24).

 

 

(11:7~9)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렇다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더 나은 자니라.”

 

(7:24~26) 요한이 보낸 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렇다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더 나은 자니라.”

 

 

마태와 누가를 비교해보면 거의 내용이 일치하며 동일한 큐자료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희랍어 문장으로 보면 누가 쪽이 좀 더 가다듬어져 있으나, 큐의 원형은 마태 쪽이 보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큐자료는 도마의 원자료를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서 활용하고 있다. 마태·누가 담론의 결론은 도마 46의 내용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큐복음서 계통의 문헌들은 도마의 46장과 78장을 하나의 담론의 맥락 속에서 묶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적 맥락의 정당성은 확보될 길이 없다. 본 장의 내용은 세례요한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장의 내용이 큐복음서 24장 속에서 인용되고 있는 부분은 실상 좀 어색하다.

 

마태·누가에서, 이 예수의 말은 예수가 그를 둘러싼 무리들 앞에서 세례요한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공적으로 밝히는 언명이다.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제1의 질문은 요한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결코 그렇게 허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2의 질문은 요한을 화려한 옷을 입은 왕궁의 사람들 같은 이미지로서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상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낙타털로 된 거친 옷을 걸치고 세속적 영화를 거부하는 가혹한 금욕의 사나이였다.

 

3의 질문, 그렇다면 선지자를 보러 광야에 나갔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긍정적인 결론을 내린다(cf. 말라기 3:1). 그러나 예수의 긍정은 더 강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과거의 어떤 선지자보다도 더 위대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큐자료의 맥락은 전혀 본 장의 원래 맥락과는 무관한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본 장의 의미를 애매하게 짚고 넘어가기 일쑤다. 여기 모래벌판사막(desert)’이다. 사막에는 실상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조차도 볼 수 없는 곳이다. 갈대는 요단강 주변과도 같이 물이 있는 계곡에서나 볼 수 있다. 갈대를 보러 사막으로 오지는 않는다.

 

여기 너희는 무엇 때문에 모래벌판에 나왔느뇨?”라고 하는 예수의 질문은 바로 예수가 황량한 모래벌판에 서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 질문은 바로 예수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예수에 대하여 그리는 심상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거친 옷을 입고, 세속적 영화를 거부하며 거친 광야를 헤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심상 속에서는 예수가 매우 현실적인 정치적 리더였고, 구세주였고, 메시아였다. 그 메시아상은 왕이나 힘센 고관과도 같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었으며, 현실적으로 그들을 억압에서 해방시켜주리라는 기대와 관련되어 있었다. 여기 예수의 로기온은 그러한 기대가 착오적인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왕이나 현실적 강자들은 진리로부터 멀리 있다. 예수의 진실한 모습은 진리를 찾아 사막을 방랑하는 모습이다. 예수를 찾아나선 사람들은 사막에 서있는 예수, 바로 그 리얼리티를 인식해야 한다. 거친 옷을 입고 방랑하는 진리의 화신 예수, 그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현실 속의 왕자나 강자는 결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여기 모래벌판에 서있는 나 예수를 보아라! 그리고 이 이상의 화려한 꿈을 꾸지도 말라!

 

 

안토니 수도원의 수사 루메우스와 담소하는 도올. 이들은 먹는 모든 것을 자급한다. 수사들이 만든 햄은 정말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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