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장
단 하나의 진주에 투자하라
제76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의 나라는 한 상인과도 같도다. 그는 매매할 많은 상품을 가지고 있었으나 언젠가 영롱한 한 진주를 발견하고 말았다. 2그 상인은 매우 신중하였다. 그는 그 상품을 모두 팔아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 단 하나의 진주를 아느니라. 3그러하므로 너희도 그리하라. 좀이 갉아먹거나 벌레가 궤멸시키지 못하는 곳에서 썩지도 않고 변치도 않는 그의 보물을 구하라.”
1Jesus said,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merchant who had a supply of merchandise and then found a pearl. 2That merchant was prudent; he sold the merchandise and bought the single pearl for himself. 3So also with you, seek his treasure that is unfailing, that is enduring, where no moth comes to devour and no worm destroys.”
참으로 아름다운 비유이다. 하나의 완정(完整)한 통일성이 있는 비유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유는 공관복음서에서는 1·2절의 부분과 3절의 부분이 나뉘어져서 나타나고 있다. 1·2절의 부분은 마태 13장에 나타나고, 3절의 부분은 큐복음서자료와 병행하고 있다. 물론 도마를 후대의 작품으로 보는 사람은 마태자료(전반)와 큐자료(후반)를 도마가 보고 합성했다고 말하겠지만, 도마 76장 전체의 흐름을 편견없이 감지할 때, 그 유기적 통일성의 아름다움은 그러한 이질적 자료의 합성이라는 느낌을 거부한다. 도마자료가 현행 복음서자료에 선행하는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 의미맥락도 종말론적ㆍ초월주의적 해석이 가미되기 이전의 순결한 양식을 고수하고 있다.
(마 13:45~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도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오히려 마태가 도마자료의 풍요로운 뉘앙스를 간결하게 요약했다는 느낌을 준다. 마태는 바로 그 앞 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 (마 13:44)라고 하여 매우 유사한 주제를 말하고 있는 비유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13장 전체가 그러한 천국에 관한 비유의 모음집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마태는 다양한 전승의 비유를 수집하면서 도마계열의 자료를 요약했을 것이다.
다음 3절은 큐복음서(Q54)와 병행하고 있다.
(눅 12:33~34) 너희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낡아지지 아니 하는 지갑을 만들라! 이는 곧 하늘에 둔 바, 잘못될 일이 없는 보물이니,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마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害)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도마와 이 두 자료를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몇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우선 마태와 누가를 비교해보면 마태는 누가에 비하여 훨씬 더 그 희랍어 원문이 시적인 파라렐리즘을 타고 있으며 리드믹 하다. 주석가들은 과연 이 두 자료 중 어느 것이 더 오리지날한 것인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과연 같은 큐자료에 의거한 것일까? 맨슨(Manson)은 누가는 큐자료에 의거한 반면, 마태는 마태의 독자적 자료인 M자료에 의거했다고 본다. 그룬트만(Grundmann)은 마태가 오히려 큐 자료에 의거한 반면 누가는 그의 독자적 자료인 L자료에 의거했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결국 누가와 마태는 같은 자료에 의거했을 것이다. 동일한 큐자료를 놓고 달리 변주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우선 누가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적극적 구제의 개념을 도입했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돈을 다 나눠주어버렸기 때문에 땅의 현실 속에서는 이미 보물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낡아지지 않는 지갑’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여기 마태ㆍ누가ㆍ도마를 비교해보면 ‘낡지 않는다’ ‘잘못될 일이 없다’라는 표현은 누가에만 나타나며, 이것은 도마자료와 공통된다(‘썩지도 않고, 변치도 않는’). 마태와 누가 중에서 도마의 흔적을 더 보존하고 있는 것은 누가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태에는 누가의 ‘구제’ 개념이 없다. 그리고 막바로 하늘과 땅의 콘트라스트로써만 전체의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 마태는 역시 지독하게 종말론적이며 초월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이다. 바울도 재림을 앞둔 이 땅의 현실은 전혀 보화를 쌓아두거나 미련을 가질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라져버릴 허상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세속의 부정의 논의’는 항상 이러한 재림사상이 그 배면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만 해도 간접적으로 암시는 하지만 마태처럼 그토록 노골적으로 땅의 보화와 하늘나라의 보화를 이원론적으로 대비시키지 않는다. 현실감각이 남아있으며,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는 말과 부드럽게 연결된다. 하늘나라의 보화를 마음의 문제로 환원시키면 그토록 초월주의적 해석은 생겨나지 않는다. 땅의 보물에 관심이 있으면 마음도 세속적 영욕을 따르고, 하늘의 보물에 관심이 있으면 마음은 세속을 초월하게 된다.
이에 비하면 도마는 철저히 현실적이다. 도마에는 마지막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고 하는 해석구도 나타나지 않는다(이 구절도 누가는 2인칭이 복수로 되어 있고 마태는 단수로 되어있다. 아마도 마태쪽이 큐자료의 원형일 것이다).
‘좀이 갉아먹거나, 벌레가 궤멸시키지 못한다’라는 표현은 고대사회에서 재화의 기준으로 통용되는 것이 ‘천’들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다. 우리나라도 조선 말기, 아니 일제시대 때까지만 해도 포목이 재화의 기준으로 유통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진주’는 ‘썩지 않고 변치 않는’ 그 무엇의 현실적 상징이며, 노골적으로 하늘나라라는 초월적 가치를 알레고리적 해석으로써 직유(直喩)하지 않는다. 보물은 보물로서 남을 뿐이다. 하늘의 추상적 가치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작부터 ‘하늘나라’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의 나라’라고 한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이 땅의 질서’에 관한 것이다. ‘울아버지(Abba)’는 보통 ‘딴 아버지들’과는 달리 생각하는 아버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63·64·65장의 연속된 테마를 통하여 부자나, 비즈니스맨이나, 상인이나, 농장지주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아버지의 자리’에 들어가기가 힘든 인물들이라는 것이 선포되는 것을 살아있는 예수의 입을 통하여 들었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그러한 주제의 놀라운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천국 즉 ‘아버지의 나라’가 저주의 대상이 되었던 ‘상인’과도 같다는 것이다. 도마의 기술에서는 천국 즉 아버지의 나라가 인격체와 곧바로 비교되고 있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57장에서도 이미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도 같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상인과 같다’고 말한다. 96장에서는 한 여자와 같고, 97장에서도 한 여자와 같고, 98장에서도 한 사람과 같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문제인 것이다. 살아있는 인격체 그 전체의 문제인 것이다. 그 인격체의 그 부분적 행동이나 사태, 혹은 객관 사물의 이벤트나 상태로써 천국을 비유하지 않는다. 천국은 막바로 사람과 같다고 전제해놓고 그 사람의 행위를 기술해나간다. 천국을 인격체 사람에 비유한 도마복음의 용법은 전승의 오리지날리티를 입증하는 한 사례에 속한다.
상인이 상품을 매매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으면 그 상인은 ‘아버지의 자리’로 들어갈 방도가 없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영롱한 한 진주’를 발견하게 된다. ‘상품매매’와 ‘진주의 발견’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이다. 인간이 종사하는 정신적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진주의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과 ‘진주를 산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가치의 발견은 ‘인식’의 문제이고 진주를 사는 것은 ‘행위’의 문제이다. 인식을 행위로 옮기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신중함’ 즉 ‘사려(prudence)’라는 것이다. 그의 사려의 방식은 소중한 진주를 사기 위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상품을 파는 것이었다. 세속적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진주를 얻겠다는 용단(勇斷), 그 분별과 지혜가 이 상인에게는 있는 것이다. 상인이야말로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진주를 살 수 있는 상품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사유가 반전되기만 하면 상인은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아버지 나라에 접근이 용이한 것이다(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로마시대에는 진주가 가장 값진 보석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그때 보석으로 각광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나라, 즉 천국은 발견되는 것이며, 자기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발견되는 즉시 투자를 해서 그것을 사야한다. 즉 세속적 가치로부터 탈자(脫資)하여 영원한 가치에 투자(投資)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 상품이 땅의 보화이고 진주가 하늘의 보화라는 마태적 이원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품은 하루살이처럼 일회적이고 덧없는 것임에 반하여 진주는 좀이 갉아먹거나 벌레가 궤멸시키지도 못하며, 썩지도 않고 변치도 않는 것이다. 여기서 상품과 진주를 대비시키는 것은 시간성의 문제일 뿐이다. 고귀한 가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는 영·육이원론도 여기에는 없다. 고귀한 가치는 땅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적인 것이라는 노골적인 메타포도 없다. 상품이나 진주는 다 땅의 것들이며, 다 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상품은 덧없는 것이나 진주는 영원한 것이다.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는 지속(duration)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고귀한 가치는 초월성(transcendentality)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성(durability)에 있는 것이다. 보다 정직하게 지속적인 가치를 추구할 때 인간의 영적세계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본 장의 비유가 우리 실존의 삶에 너무도 많은 시사를 준다고 생각한다. 이 현세에서 버팀목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이다. 여기 천국이 상인과 같다고 한다면, 이 장이야말로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는 내용을 설파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그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진주를 발견하고 살 줄 알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것도 가치의 창출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치가 일시적인 회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주처럼 구원한 지속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으며, 돈을 벌어서 어떠한 삶의 행위를 하느냐, 그 가치에 따라 돈을 버는 행위가 정당화될 뿐이다. 그것은 대단히 영적인ㆍ초월적인 그 무엇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단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더 지속적인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 데로 투자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거대한 교회건물 지을 돈이 있다면 그 돈으로 위대한 신학자를 만드는 교육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우리나라 부자들, 상인들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공적 마인드(Public mind)’의 부재이다. 자신의 돈이 공적으로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쓰여야 한다는 신념과 실천력,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재단을 만들어도 그것이 적극적으로 진주를 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과도한 세금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거나 매우 소극적인 코스메틱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에게 획기적인 비젼이나 도덕적 가치를 제시하는 데 너무도 미온적이다. 박물관이나 연구소를 지어도 그것이 우리문명의 굳건한 반석의 시공이 되는 그러한 사례가 별로 없다. 그리고 가장 개탄스러운 사태는 재벌의 자녀들 중에 그러한 공적인 비젼을 제시하는 인물이 너무도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멍청한 인물들’이다. 재벌의 자녀들 중에서 인문학적 낭만성을 과시하는 자도 없다. 도대체 재벌의 자녀 중에 위대한 학자가 있는가? 위대한 예술가가 있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아라비아사막의 모랫바람을 헤쳐가면서 낙타 위에서 호머의 『오딧세이』를 희랍어로 읽었다 하지 않는가?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젊은 날에 고전희랍문학을 공부했다지 않는가? 별 생각없이 경영학과, 법대나 나와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것인가? 진주를 발견하는 척하는 자는 있을지 몰라도 진주를 사서 간직하는 인물은 하나도 없다. 사유재산의 지속이 인정되는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는 극부유층 2세들의 교육의 문제는 국가비젼과 관련하여 각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공적인 방안이 어렵다면 사적인 차원에서라도 그들에게 거시적 비젼을 심어주는 특별한 교육제도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본 장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너무도 판에 박힌 ‘물질 – 정신’, ‘영 – 육’, ‘땅 – 하늘’의 이원적 대비는 참으로 영적인 진주(spiritual pearl)를 발견하고 구매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않는 허황된 환상만을 지어낸다는 것이다.
▲ 파바우 수도원 본부에서 나귀 타고 동네 아이들과 활짝 웃고 있는 도올. 이곳 도서관에 도마복음서가 소장되어 있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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