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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77장 - 나는 빛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77장 - 나는 빛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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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나는 빛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

 

 

77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빛이다. 나는 전부이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고, 그리고 나에게로 모든 것이 돌아온다. 2한편의 장작을 쪼개보아라! 나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3돌 하나를 들어보아라! 그리하면 너희는 나를 거기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1Jesus said, “I am the light that is over all things. I am all: From me all has come forth, and to me all has reached. 2Split a piece of wood; I am there. 3Lift up the stone, and you will find me there.”

 

 

참으로 위대한 장이다. 눈물겨웁도록 아름답고 광대한, 살아있는 예수의 메시지이다. 이러한 장을 해석하는데 서구인들은 또다시 기존의 인용학적 지식에 의존하려 한다(cf. 8:12, 11:36, 고전 8:6 등등), 그리고 범신론(pantheism)이니 만유재신론(panentheism)이니 하는 따위의 일체의 개념적 언사도 본 장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리고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운운하는 것도 한마디로 구역질나는 췌언(贅言)일 뿐이다인간이 빛의 구현자인 예수에게 나와서 예수로 돌아간다는 것은 전형적인 그노시스의 입장이라는 등등의 판에 박힌 유형적 설명.

 

살아있는 예수의 이 말을 차라리 다음과 같은 설봉(雪峰, 822~908: 덕산德山 문하의 걸출한 선승)의 말에 비견하면 어떨까?

 

 

대우주를 모조리 한손에 움켜쥐어 보니 꼭 좁쌀 한 톨만하구나! 너희들 면전에 던졌으나 이 새카만 밥통 같은 녀석들 도무지 알아보질 못하는구나! 북을 치니 모두 나와 찾아보라!

盡大地撮來, 如粟米粒大, 抛向面前, 漆桶不會, 打鼓普請看.

벽암록(碧巖錄)第五本則

 

 

도마의 대부분의 로기온자료들은 요한복음의 예수와는 달리 예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밝히거나 과시하는 데 급급해하지 않는다. 예수의 말씀이 중요한 것이지, 예수가 누구인지, 그 아이덴티피케이션이나 배후 족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본 장은 예외적으로 그러한 질문자의 궁금증을 선적(禪的)으로 크게 한 방 멕여 버린다. 이것은 전혀 신비로운 담론이 아니다. 바울이나 요한의 예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에고 에이미 담론(ego eimi saying, 나는 이다라는 식의 담론)’이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와 인간의 상호내거(相互內居)를 말하지도 않는다. 상호내거가 가능하기 위하여서는 내거의 주체들이 실체화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여기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밝히는 언어 중에서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1. 나는 빛이다(I am the light).

2. 나는 전부이다(I am all).

3. 나는 어디든지 있다(I am everywhere).

4. 나는 자연 속에서도 발견된다(I am found in nature).

 

이라는 개념에 관해서는 이미 24, 33, 50 등등의 로기온 속에서 충분히 해설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전부이다라는 메시지이다. , 예수라는 객관적 실체로서, 그 살아있는 예수의 말을 듣는 추구자들로부터 분리되어 소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와 청자, 주체와 객체의 이원이 허락되면 이미 그것은 전부가 아니다. 예수의 아이덴티티와 추구자들의 아이덴티티의 결별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자기이해는 이 담론을 대하는 사람의 자기이해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어떠한 주체도, 어떠한 곳(장소), 어떠한 사건도, 어떠한 시간도, 라는 빛의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혜시(惠施)가 말하는 지소무내(至小無內)’, ‘지대무외(至大無外)’일 뿐이다. 존재(Being)와 생성(Becoming)의 이원도 붕괴되어 버린다. 예수는 여기서 진정한 보편주의 신학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본 장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 나오는 단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동곽자(東郭子)가 장자(莊子)에게 물었다: “도대체 도라는 게 어디에 있는 거요[所謂道惡乎在]?”

장자가 대답했다: “없는 데가 없지[無所不在].”

동곽자가 또 말했다: “그렇게 막연하게 구라치지 말고 좀더 구체적으로 한정하여 말해보오[期而後可].”

장자가 대답했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지[在螻蟻].”

동곽자가 말했다. “아니, 그토록 하찮은 것 속에 있단 말이오[何其下邪]?”

장자가 대답했다: “논밭에서 패버리는 돌피 속에 있지[在稊稗].”

동곽자가 말했다: “왜 자꾸 더 내려가오[何其愈下耶]?”

장자가 대답했다: “깨진 항아리쪼가리 속에 있지[在瓦甓].”

동곽자가 말했다: “왜 자꾸 더 심하게 내려가오[何其愈甚耶]?”

장자가 대답했다: “똥오줌 속에 있지[在屎溺]”

여기에 이르자, 동곽자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동곽자가 과연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러한 장자의 사상 덕분에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는 선적인 변형을 겪을 수 있었다. 지고의 성()인 부처를 중국의 선승(雲門和尙)말라빠진 똥막대기[乾屎橛, 똥 푸기 위해 휘젓는 막대기]’라고 외쳤고, 불법(佛法)의 진제(眞諦)뜨락의 백수자[庭前柏樹子]’라고 일갈할 수 있었던 것이다(趙州和尙, 無門關37).

 

여기 쪼개진 장작 속에 내가 있을 것이요, 길거리에 나뒹구는 돌 하나를 들어보면 거기서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외치는 예수의 말이 과연 이것과 다른 더 지고의 성스러운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은 이제 사고를 전향해야 한다. 진정한 메타노이아를 실천해야 한다. 성스러움의 거부가 오히려 진정한 성(the Holy)으로의 진입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 살아있는 예수가 이러한 역설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가 말하는 뮈스테리움 트레멘둠(mysterium tremendum).’ 즉 신적 존재의 전적인 타자성(The Wholly Other)’은 거룩함에로의 고양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모든 존재의 심연에서 느끼는 심적 개방에서 달성되는 것이다. 신비로운 떨림은 똥오줌 속에서도 느껴져야만 한다. 장자의 언설은 거만한 자의 포효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존재의 겸손이다.

 

 

괴레메 세인트 바르바라 교회(Chapel of St. Barbara). 바위를 파서 만든 석굴이다. 그런데 코믹하게 벽돌모양을 그려넣었다. 단순미가 탁월하다. 바르바라는 이 지역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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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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