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발李起浡: 1602(선조 35)~1662(현종 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패우(沛雨), 패연(沛然), 호는 서귀(西歸). 전라북도 전주(全州) 출신. 학덕과 효행이 높던 조선 중기 문신.
1. 전주팔현(全州八賢) 중에 한 사람으로 화곡(華谷) 홍남립(洪南立, 1606∼1679), 이흥발(李興浡, 1600~1673), 이후선(李厚先, 1609∼1674), 이경록(1543~1599), 유장옥(柳章玉), 정효승, 이생발(李生浡) 등과 팔과정(八科亭)에서 교유하며 강학함【전주 팔복동(八福洞)은 여덟 명이 과거에 합격했다 해서 팔자(八字)를 넣어 이름지어졌으며, 팔복(八福)을 받은 곳이라며 팔복동으로 이름하게 됨】.
2. 형 이흥발(李興浡)과 동생 이생발(李生浡) 등 삼형제가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의 문인이 되어 학문을 닦아 벼슬에 올랐으며 학문으로 칭송이 자자함.
3.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여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국모가 없는 나라’라고 한탄하며 은거함.
4. 인조반정 이후 1624년(인조 2)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3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함.
5. 1627년(인조 5) 아우 이생발(李生浡)과 함께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아우 이생발의 상을 당하여 사직함.
6. 1633년(인조11) 정언(正言)에 다시 이르고 예조정랑(禮曹正郞), 중원 현감(忠原 縣監), 지평(持平) 등을 역임했다.
7. 1636년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있을 때에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당시 옥과현감(玉果縣監, 곡성군 옥과면)이었던 형 이흥발, 순창군수 최온(崔薀), 전 찰방(察訪) 유즙(柳楫), 전 한림(前翰林) 양만용(梁曼容) 등과 더불어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여산의 모의소에서 다른 의병단과 합류한 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진격하였으나, 화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 황산(黃山) 아래에 복거하고 학문을 강구하며 처사적 삶을 살았다.
8. 시경 비풍(匪風)의 “누가 물고기 삶을 수 있을까? 크고 작은 가마솥 씻으리라. 누가 서쪽으로 돌아가려나? 좋은 소리로 품으리라[誰能亨魚 漑之釜鬵 誰將西歸 懷之好音]”라는 구절의 의미를 담아 ‘서귀(西歸)’를 호로 삼고 은거하며 ‘인의(仁義)’를 지키고자 다짐하며 서귀시(西歸詩)를 노래함.
9. 지평, 헌납, 영광 군수, 장성 부사, 남원 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부하다가 끈질긴 설득 끝에 1644년(인조 22) 황주 판관(黃州 判官)이 되어 부임했지만 장(狀)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일로 부임 9일 만에 파직되는 등 끝까지 청(淸)과의 화친을 반대하고 명(明)과의 의리를 주장함.
10.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동방의 백이숙제(伯夷叔齊)로 칭송함.
11. 효종이 장련, 집의 등을 제수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생을 마침.
12. 1673년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으며. 1668년 만육(晩六) 최양(崔瀁),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와 함께 서산사(西山祠)에 배향됨.
13. 1744년(영조 20)에는 도신(道臣) 조영국(趙榮國)이 ‘충절신(忠節臣)’으로 계청(啓請)하여 정려(旌閭)됨.
14. 문집 『서귀집(西歸集)』이 전하고 있으며 전주 추천대(楸川臺, 전주 팔복동3가 1301-3), 공북정(拱北亭) 등에 올라 읊은 시가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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