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교육의 측면에서 본 「양사룡전」의 자료적 가치
김 형 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조교수)
[국문초록]
이 논문은 서귀 이기발의 「양사룡전」을 대상으로 작품에 담긴 핵심적 사유를 분석하고, 인성교육 자료로서 「양사룡전」이 지닌 특장을 살핀 것이다. 「양사룡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가치는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돈도 없고 작위도 없지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겠다[當爲所當爲]’는 의리이다. 양사룡은 당위소당(當爲所當)의 정신을 토대로 오이 나눔과 어머니에 대한 효행을 실천할 수 있었는데, 오이 나눔 선행과 효행은 양사룡 자신이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양사룡의 진아(盡我)였다.
「양사룡전」이 인성교육의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양사룡전」의 당위소당(當爲所當)과 진아(盡我)는 청소년의 자아 형성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진아(盡我)와 당위소당(當爲所當)은 올바른 가치관 형성에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나’, 그리고 관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킨다. ‘나’를 매개한 인성교육은 ‘나’의 삶에서 왜 그런 가치들이 필요한지를 스스로 묻게 함으로써 ‘나’와 나의 인성의 문제에 관한 보다 능동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이끌 수 있다.
둘째, 「양사룡전」에 그려진 효행과 선행은 진솔하고 핍진하여 공감의 여지가 크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은 「양사룡전」에 그려진 인물들의 언행에 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되는데, 바로 이 공감이라는 요소야말로 교육적 감화가 일어나는 시발점이 된다.
셋째, 「양사룡전」에 그려진 효행과 선행은 모두 일상의 소박한 것들이라 그것에 공감한 독자의 실천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효자전에 자주 등장하듯 양사룡의 효행이 단지(斷指)나 할고(割股)로 그려졌다면, 그 행위는 숭고한 것임에도 독자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양사룡전」에 그려진 효행들은 우리 학생들로 하여금 효도란 것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자신을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고 자신도 일상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넷째, 「양사룡전」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점이다. 양사룡의 오이 나눔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싶게 참신하다. 이외에도 「양사룡전」은 다양한 삽화를 통해 이야기의 흥미를 높이고 있다. 한문 고전을 활용한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생들이 그 작품을 읽어야 한다. 읽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수업에서 읽을 자료가 지루하여 제대로 된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다음 단계의 교육은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더구나 한문 고전은 왠지 딱딱하기만 하고 재미와는 멀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가진 청소년들이라면 텍스트 자체가 지닌 흥미소는 대단히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이 논문은 구체적인 교육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하나의 텍스트를 작가의 사유와 연계하여 분석하고 인성교육적 가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작으나마 의의를 지닌다.
[핵심주제어] 서귀 이기발, 양사룡전, 효, 선행, 의리, 전주
Ⅰ. 머리말
이 논문은 「양사룡전(梁四龍傳)」에 담긴 핵심적 사유를 분석하고, 인성교육 자료로서 「양사룡전」이 지닌 장점을 소개하려 한다. 주지하듯 우리가 연구와 교육의 자료로 삼는 한문 고전 중에는 인간다움을 사색하게 하는 내용이 대단히 풍부하다. 이는 우리가 학문과 문예의 목표를 인격의 완성에 두었던 전통시대 지식인의 지적 성과물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한문교육하면 자연스레 인성교육을 떠올리는 사고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유명세를 탄 청학동의 예절학교나 각지의 서원, 향교에서 인성과 예절을 테마로 한 각종 프로그램들이 활발하게 운용되고 있는 현상이 그러한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한문 기록 속에는 우리의 정신문화가 대부분 축적되어 있어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가치관의 문제 등을 치유할 수 있는 자료가 많으므로 건전한 가치관과 바람직한 인성을 함양하기 위해서 한문 학습이 필요하다.”고 한 교육부의 고시【교육부 고시 제2015-74호】도 한문교육에 기대하는 오늘날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문교육자에게 다행한 일인 동시에 큰 부채이기도 하다. 점차 소외되어 가는 한문고전의 가치를 오늘날 그나마 펼쳐볼 수 있는 장이 마련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행한 일이지만 가치관이 현저하게 달라진 오늘날, 선인들의 지적 유산을 어떻게 의미 있게 살려낼 것인가를 염두에 두면 임중도원(任重道遠)의 감(感)을 떨칠 수 없다. 더구나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 병폐가 불거질 때마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은 방기한 채 인성교육을 통해 인성을 기르면 된다는 대단히 피상적인 접근이 활개를 칠 때면 더욱 그렇다. 입시를 기준으로 끊임없이 승자와 패자를 양산해내는 교육현실과 사회구조는 어쩌지 못한 채, 단발적인 인성교육만으로 무언가 신통한 효험을 기대한다면 그것이 과연 되겠는가?
상황이 이러하기에 한문고전을 통한 인성교육은 더욱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더구나 충, 효, 예로 대변되는 전통시대의 가치는 그 시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도 작동했던 바, 그 이데올로기의 꺼풀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오늘날에도 음미하고 공유해야 할 정수를 섬세하게 골라내어 학생들과 소통해야 한다. 다수의 열등생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두고 그 구성원들에게 충과 효를 빙자한 복종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면 과연 어찌 되겠는가? 더구나 기성체제의 문화를 전수 받으면서도 기성체제의 항상성을 깨뜨리며 자기들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청소년문화의 특징【변윤언, 「청소년문화의 정체성과 지향성에 관한 연구」, 『청소년 문화포럼』 제13집,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2006, 16쪽.】을 이해한다면, 인성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계몽하는 방식보다는 윤리와 도덕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요소가 됨을 근원적으로 환기하는 접근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그간 한문고전을 활용하여 인성교육을 모색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연구성과들을 일람하노라면 인성교육을 위한 한문고전은 대개 경서(經書)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 방법적으로는 인성교육을 위한 윤리, 도덕적 가치를 설정하고 각각의 가치와 경전의 구절을 연결시키는 방식이 상당수를 차지한다【이에 대해서는 전광수, 「고전인문학과 인성교육의 관계성」, 『대동철학』 제82집, 대동 철학회, 2018, 105~127쪽; 박영민ㆍ이성흠, 「고전과 생태관광을 활용한 교과 연계 인성교육 자료 개발」, 『敎育問題硏究』 제64집,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17, 141~168면; 함영대, 「중등학교에서 경전ㆍ제자서 학습과 인문고전교육-인문 가치의 설정과 교과서 서술을 중심으로」, 『漢文敎育硏究』 51호, 2018, 131~156쪽 참조.】. 그에 비해 한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작품에 내재된 인성적 가치를 교육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는 아직 활발하지 않다. 안세현【안세현, 「한문교육에서의 인성교육-방향 설정과 교육 방안을 중심으로-」, 『漢文敎育硏究』 49호, 2017, 311~342쪽.】은 한시와 기문 등을 통해 자아, 관계, 배려, 자연 친화 등과 같은 인성적 가치를 교육하는 방안을 모색한 바 있고, 백광 호【백광호, 「國語 敎科와 漢文 敎科의 ‘讀書’敎育 連繫 方案」, 『漢文敎育硏究』 52호, 韓國漢文敎育學會, 2019, 5~36쪽.】는 독서교육을 매개로 국어와 한문 교과의 연계 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한문학 텍스트의 활용 방안을 모색한 바 있다. 그럼에도 한 작가의 의식을 심층 분석하거나 작품을 전면적으로 분석하여 교육적 가치를 추출하는 연구는 아직 미비한 형편이다.
오늘 소개할 「양사룡전」은 이 점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다. 이 작품은 효행을 계몽적으로 권면하는 일반적인 효자전과는 달리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철학적 기저로 삼고, 주인공 양사룡의 감동적인 효행과 선행을 독특한 구성으로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으며, 결국 효와 선과 같은 개별 덕목의 가치가 아니라 그것들을 근저에서 추동해내는 보다 근원적인 사유로까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사룡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특징적인 소통과 교감의 양상은 그 자체로 인성교육에 방법적 시사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에 필자는 Ⅱ장에서 「양사룡전」의 저자와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Ⅲ장에서 인성과 관련한 핵심적 사유를 분석하며, Ⅳ장에서는 인성 교육 자료로서 「양사룡전」이 지닌 장점을 서술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에도 대단히 유효한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흥미롭게 조우하고, 인성교육의 측면에서 본 「양사룡전」의 의의를 구명(究明)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양사룡전」의 저자와 서사 구성
서귀 이기발의 생애
저자 이기발(李起浡, 1602~1662)【김형술, 「‘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 『국문학연구』제39집, 국문학회, 2019, 184~186쪽.】은 자(字)가 패연(沛然), 호(號)가 서귀(西歸)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목은 이색의 11세 손으로 그의 집안은 증조부 이치(李稺)가 선친 이수량(李守良)을 전주에 장사한 이래로 전주사람으로 살았다. 아버지는 이극성(李克誠)이고 어머니는 전주가 본관인 최준극(崔峻極)의 따님인데, 모친은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내 신천익(愼天翊), 양만용(梁曼容)의 모친과 더불어 호남의 세 현모 중 한 분으로 일컬어졌다. 이극성과 최씨부인은 슬하에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이기발은 3남 가운데 둘째로서 전주 황방산(黃方山) 활동리(闊洞里)에서 태어났다. 형은 이흥발(李興浡)이고, 아우는 이생발(李生渤)이다.
26세에 아우 이생발과 함께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형 이흥발도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과부의 삼형제가 모두 문과에 합격한 일로 인하여 인조의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李起浡, 『西歸遺稿』 권9, 「西歸先生家狀[柳震錫]」. “上顧問左右曰: ‘是寡母之子, 兄弟三人力學, 其二弟聯登去年科者耶?’ 仍嗟歎美之.”】. 문과에 합격한 이후 이기발은 한림원 주서, 시강원 설서와 필선, 사헌부 지평, 사간언 정언 등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촉망받는 인재로 활약하였다. 강렬한 대명의리론자였던 그는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형 이흥발, 한림 양만용(梁曼容), 순창군수 최온(崔蘊), 찰방 유즙(柳楫)과 함께 의병을 모의하고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썼다. 1637년 1월 20일에는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지만 남한산성을 불과 50리 남겨둔 지점에서 청과의 강화(講和)가 성립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주로 돌아와 황산(黃山) 아래 자리를 잡고 ‘서귀(西歸)’라 편액한 뒤 은거에 들어갔다. 형 이흥발은 임실 운암협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갔다.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조정은 이듬해 봄부터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을 제수하며 이기발을 불렀으나 이기발은 1662년 4월 1일,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출사를 거부한 채 서귀당에서 제자 교육에 매진했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 포의로 살았던 이기발의 삶은 당대 절의로 기려졌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가 쓴 묘표에 의하면 이기발이 세상을 떠나자 우암 송시열은 “이기발 형제는 삼학사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그의 절의를 기렸다【宋穉圭, 『剛齋集』 권10, 「西歸李公墓表」. “吾先子尤菴文正公聞西歸李公之沒, 語人曰: ‘此人兄弟不下於三學士.’”】.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되는 1668년에는 전주의 유생들이 앞장서 서귀사(西山祠)에 배향하였고, 1671년에는 관찰사 오시수(吳始壽)가 계청하여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상서원정(尙瑞院正)에 추증되었다【李起浡, 『西歸遺稿』 권10, 「年譜」. “國朝顯宗大王十二年, 贈通政大夫ㆍ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ㆍ春秋館修撰官ㆍ藝文館直提學ㆍ尙瑞院正. 道伯吳始壽以先生孝友, 啓請褒贈.”】. 또한 이기발이 세상을 떠난 지 100갑자가 되는 1744(영조 20)년에는 도신(道臣) 조영국(趙榮國)의 계청에 의해 ‘충절신(忠節臣)’으로 정려되었다【李起浡, 『西歸遺稿』 권10, 「年譜」. “國朝英宗大王二十年, 春, 以忠節臣命㫌閭. 道臣趙榮國啓請㫌贈.”】.
문집 『서귀유고(西歸遺稿)』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인 6대손 이승연(李承淵)이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편차하고 교정한 뒤, 1872년에 영초(穎樵) 김병학(金炳學, 1821~1879), 1873년에 경대(經臺) 김상현(金尙鉉, 1811-1890),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6)에게 서문을 받아 10권 5책으로 편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교정을 거치고 1870년에 서문을 받아두었던 형 이흥발(李興浡)의 『운암일고(雲巖逸藁)』 1책을 부집(附集)하여 10권 6책으로 1876년에 활자로 간행하였다.
「양사룡전」의 서사구성
「양사룡전」은 『서귀유고』 권7에 수록되어 있다. 권7에는 두 편의 전 이 실려 있는데 첫 번째가 본고의 대상인 「양사룡전」이고, 나머지 한 편은 「송경운전(宋慶雲傳)」이다. 두 편 모두 일반적인 효자전이나 예인전이 포착하지 못한 참된 인간상에 대한 서귀의 깊은 사유가 녹아있는 작품들이다【김형술은 「‘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국문학연구』제39집, 2019)에서 서귀 이기발의 의리정신을 통해 「양사룡전」의 입전의식을 밝힌 바 있다. 「송경운전」은 젊은 시절 당대 최고의 비파 명인으로 명성을 누리다 정묘호란 때 내려와 전주사람으로 살다간 송경운의 삶을 그린 것이다. 「송경운전」에 대한 이해는 김하의 「이기발(李起浡)의 『송경운전』(宋慶雲傳)과 17세기 전주 재현-역사 지리를 접목한 한문수업의 모색」(『국어문학』 제72집, 2019)이 좋은 참조가 된다.】. 논의를 위해 「양사룡전」의 구성과 줄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도입】
① 하늘의 사람에 대한 일관되지 않은 보응(報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본사1】
② 을유년(1645)에 전주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큰 시내도 말라붙은 지 오래되었는데 오직 면암천 일대에만 일어나는 기이한 강우 현상 덕에 전주 사람들이 유리걸식을 면함.
③ 기이한 강우 현상에 대한 전주 사람들의 전언
③-1 면암천 상류에 살던 효자는 죽어가는 노모 대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열흘 동안 기도하였고, 노모는 기도를 드린 지 이레 만에 기적적으로 소생하게 됨.
③-2 노모의 기적적인 소생이 하늘의 특별한 은혜라 생각한 효자는 하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묵정밭을 일궈 오이를 심었는데 하늘이 극심한 가뭄 중에도 효자의 밭에만 비를 내려주는 이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완산 서북 사람들이 전답에 물을 댈 수 있었음.
③-3 하늘의 도움으로 풍성하게 오이를 길러낸 효자는 무더위에 험한 고개를 넘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오이를 나누어 주었고 그로 인해 효자의 선행이 알려지게 됨.
【본사2】
④ 무심자가 직접 만나 확인한 양사룡의 오이 나눔 동기와 또 다른 효행
④-1 효자의 이름은 양사룡이고 나이는 45세였으며 직접 만나 대화해보니 행실과 말이 모두 애친(愛親)과 관계된 일이었음.
④-2 왜 오이를 나누어주게 되었는가에 대한 양사룡의 말: 양사룡은 하늘의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보은해야 하는데 자신의 미천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어 하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오이를 나누어 주게 되었다고 함.
④-3 노모를 위한 양친계 조직: 술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홀로 술을 마시는 게 안타까워 인근의 노모를 봉양하는 사람들과 양친계를 조직하고 술과 음식을 함께 즐기게 하여 노모를 기쁘게 함.
【본사3】
⑤ 삽화1: 부친 양흔동의 효행와 주인 섬김
⑤-1 양흔동은 아버지가 죽자 남긴 신발을 대바구니에 넣어두고 일 년에 한 냥씩 대바구니에 넣으면서 이것이 아버지께서 남긴 자취라며 언제고 한참을 울었음.
⑤-2 주인집 사람들이 모두 죽고 아이 하나만 남게 되자 흔동은 이 아이를 주인으로 극진하게 섬김. 임진왜란 때는 자신의 가족은 남겨둔 채 주인을 모시고 피신했고, 돌아와서는 어진 스승에게 공부하게 했으며, 결혼도 시켜주고 집과 살림도 장만하여 줌.
⑤-3 주인이 갑자기 죽어 그의 가족들이 의지할 데 없자 다시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몇 년을 봉양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헌신함.
⑤-4 수십 년 뒤 주인의 장례에서 있었던 일과 흔동의 죽음: 고령으로 장례식 참여가 어렵자 아들 사룡이 자신이 대신하겠다며 만류하는 데도 흔동은 주인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장례에 참여하여 널을 호송하고 곡함. 이 때문에 병이 생겨 죽음.
⑥ 무심자의 양사룡에 대한 경의: 무심자는 양사룡 부자의 행실을 듣고 예를 표한 뒤, 벼슬을 탐하여 염치와 시비를 몰라라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사람들이 탐욕하는 벼슬보다 마땅한 하늘의 이치와 떳떳한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 것이 훨씬 귀하다고 함.
⑦ 삽화2: 양사룡이 자식 잃은 무심자의 슬픔을 남만국 이야기로 위로함.
⑦-1 옛날 남만국의 어느 부부가 40세에 외아들을 얻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와 학식이 빼어나 누구나 한 번 사귀기를 원하는 인재였음.
⑦-2 그런 귀한 아들의 갑작스럽게 죽음.
⑦-3 슬픔에 빠진 부부는 죽은 사람을 명부로 보내는 일을 맡고 있다는 도사를 찾아가 아들이 명부로 떠나는 것을 막고자 함.
⑦-4 도사를 찾아가자 도사는 아들을 아직 명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내일 아들이 올 것이니 머물렀다 내일 보라고 함
⑦-5 도사가 자식을 찾아온 부부의 이야기를 전하자 그 아들이 부부의 전생을 이야기함: 부부는 전생에 어느 무고한 뱃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재물까지 훔쳤는데, 그 아들은 전생 뱃사람의 자식이었음. 부부의 악행에 분노한 하늘은 뱃사람의 자식을 후생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했고, 철저한 아픔을 주기 위해 귀한 늦둥이를 얻은 기쁨을 주었다가 갑자기 죽게 했던 것임.
⑦-6 부부는 자식의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자식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음.
⑦-7 그래서 세상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을 전생의 원수라고 한다면서 죽은 자식 때문에 슬퍼하면 모부인께서 상심하시니 상심을 거두라고 위로함.
【결사】
⑧ 양사룡의 행위에 대한 논평
⑧-1 양사룡으로 인해 하늘이 사람을 여전히 굽어살핌을 알 수 있었음.
⑧-2 사마천의 열전은 세교와 관련한 인물을 싣지 않은 단점이 있는데, 무심자가 양사룡을 만난 것은 양사룡의 행실이 후세에 전해지도록 한 운명적인 일임.
⑧-3 양사룡의 효행은 오로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오이를 나누어 준 선행은 그 넓은 헤아림이 숭상할 만함. 양사룡의 행실은 그의 부친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임.
⑨ 삽화3: 춘반의 효행
⑨-1 어머니의 소상 한 달 전 아내에게 어머니가 생전 이즈음에 드셨던 미음을 올리도록 함.
⑨-2 어머니 생전에 출타하게 되면 문에 기대어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 돌아올 적이면 멀리서부터 춤을 추면서 잘 돌아왔음을 보임.
Ⅲ. 양사룡의 당위소당(當爲所當)과 이기발의 진아(盡我)
양사룡의 당위소당(當爲所當)
「양사룡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가치는 어머니에 대한 효행, 행인(行人)들을 위한 오이 나눔 선행, 그리고 그 둘을 근저에서 추동하며 보다 근원적인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의리[보은의식]이다. 해당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 모친은 나이가 70여 세였는데, 갑신년(1644) 가을, 그 모친에게 병이 생겨 거의 소생할 수 없을 듯하였다. 그 사람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드렸는데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이시여! 우리 어머니의 병이 심해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하늘이 정녕 내 어머니를 취하시려는 것입니까? 내 나이 한창이고 많이 남았으니 하늘을 섬기는 것은 필시 어머니보다 제가 나을 것입니다. 하늘이시여! 청하옵건데 어머니 대신 나를 데려가소서.”라고 하였다. 이처럼 눈물을 뿌린 지가 열흘이 되었는데 그 모친이 이레 만에 소생하여 일어났다. 그 사람은 “이것은 하늘이 내 어머니를 보살펴주신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나의 정성을 다하지 않고, 내가 어찌 감히 내 몸 수고로운 것을 마다하여 하늘에 제향하는 것을 소홀히 하겠는가? 하늘은 하민(下民)을 길러주시니 진실로 내 행위가 조금이라도 남을 기쁘게 할 것이 있다면 하늘은 반드시 나의 제향을 받아주실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남에게 은혜를 베풀 돈과 재물이 없고, 내게는 남에게 혜택을 줄 작위도 없으니 나는 다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리라.”라고 하였다.
其母年七十有餘, 甲申秋, 其母有疾病, 幾不甦. 其人日夜禱天, 繼以血泣曰: ‘天乎! 我母病極, 勢不可活, 天寧有必取我母者? 我年壯且不嗇, 必能事天愈於母. 天乎! 請以我代母.’ 如是而雪涕焉者至旬日, 其母凡七甦乃起. 其人曰: ‘是天所以顧我母者. 我其敢不殫我誠, 我其敢不勞我身, 以享天一分乎? 夫天字下民, 苟我所爲一分有悅於人者, 天未必不我享也. 而我無錢財可以惠於人, 我無爵位可以澤於人, 則我但當爲所當爲.’
그러나 저는 천한 사람이라 하늘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저 스스로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곧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와 같으니 사람 가운데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고 그것을 보답하는 자식이 있다면 아버지가 반드시 기뻐하리라’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무릇 천자의 재상이 된 자는 천하의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고, 제후왕의 재상이 된 자는 일국의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고, 백 리의 땅에 수령이 된 자는 한 지역의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천한 사람이라 많은 재물을 가지고서 어려운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나의 가난이 심해서 할 수 없다면서 혹여 사람을 이롭게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버지께 은혜만 입고 보답하지 않는 자식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我賤人也, 不知所以報乎天者. 自以天之於人, 卽父之於子也, 人有惠於父而報之子者, 父未必不喜. 夫爲天子輔相者, 利天下之人; 爲侯王輔相者, 利一國之人; 爲牧守於百里之地者, 利一境之人. 今我賤人也, 不可得有財巨萬, 可以利竆人. 今我貧甚不可得, 未或有可以利人者, 則是徒惠於父, 而亦不得報之子也. 如此其可乎? -李起浡, 『西歸遺稿』 권7, 「梁四龍傳」.
첫 번째 인용문은 본사1에 해당하는 전주 사람들의 전언 가운데 일부이다. 노모가 병이 들어 다시 살아날 기미가 없자 양사룡은 피눈물을 흘리며 ‘늙은 어머니 대신 나를 데려가 달라’며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노모가 다시 소생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자 하늘의 보살핌 덕분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양사룡은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돈도 없고 작위도 없지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겠다[當爲所當爲]’고 다짐하였다.
두 번째 인용문은 서귀가 직접 만나서 들은 양사룡의 입장이다. 첫 번 째 인용문과 같은 취지이지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겠다[當爲所當爲]’고 다짐하게 된 경위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양사룡은 하늘의 특별한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다. 물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는 가난한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양사룡은 가난을 핑계로 자신이 할 도리를 저버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했던 양사룡에게 가난을 핑계로 마땅한 도리를 저버리는 것은 마치 아버지께 은혜를 입기만 하고 보답할 줄 모르는 자식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귀가 전하고 있는 양사룡의 질박한 사고이다. 양사룡은 효에 대해서도 하늘에 보은하는 것에 대해서도 관념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받은 게 있다면 반드시 보답해야 하고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있다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이 단순하지만 명료하기 그지없는 생각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효는 물론이고 사람과 하늘 사이의 의리까지도 망설임 없이 실천하게 하는 동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양사룡의 당위소당(當爲所當)은 어떻게 구체화 되었는가?
이에 그 아내와 함께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동짓달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골 짝 어귀의 큰길가에 묵정밭 수십 이랑을 개간하였다. 호남 서도 수십 고을의 사람들 가운데 영남으로 오가는 자와 동도 수십 고을 및 영남인 가운데 호남 서도로 오가는 자들이 모두 이 길을 경유해서 행인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었다. 길 동쪽에 큰 고개가 있는데 돌 비탈이 몹시 구불거리는 것이 험난하기 그지없는 촉도(蜀道)에 뒤지지 않아 행인들이 그 길 가는 것을 매우 우려하였는데, 밭은 그 고개 밑에서 약 3리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곧 밭 가운데 초막 한 칸을 짓고 그 아내와 함께 부지런히 오이를 심고 가꾸면서 전처럼 재계하고 변함없이 제사를 지냈다. 그때 가뭄이 그치지 않아 오이가 말라죽을 판이었는데 홀연 구름 기운이 나타나 그 초막을 감싸더니 이윽고 비가 크게 내렸다. 이와 같은 일이 열흘에 꼭 두세 번은 일어나자 초막에서 약간 떨어진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이한 일로 여겼다. …(중략)… 이에 오이가 지극히 잘 자라나 그저 주렁주렁 달린 정도에 그치지 않았으니 오이 수확은 남보다 열흘에서 한 달 이상 빨랐고, 오이 생산도 계속되어 그 면적으로 따져보면 소출이 열배 백배나 되었다. 이에 계곡물을 이용해 차가운 샘을 만들고 매일 아침이면 오이 백 개, 천 개를 따서 물에 담갔다. 그리고 큰 대야 하나를 길 가운데 두고는 멀리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사람 수보다 몇 곱절 많게 오이를 가져다 소쿠리에 담아 두었다. 그리고는 사람이 당도하면 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릎을 꿇고 오이를 바치면서 맛볼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던 자들은 모두 험한 고개를 힘겹게 넘느라 갈증이 심할 때라 손쉽게 먹으면서 맛나게 먹었다. 또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던 자들은 하늘을 찌르는 돌길을 올려다보며 타는 듯한 무더위를 모두 심히 걱정했기 때문에 반드시 오이 하나를 먼저 먹어 열기를 씻어내고 또 남은 길을 위해 반드시 두세 개를 챙겼다. 그 길을 경유하던 자들은 반드시 이 일을 전하여 훌륭한 일로 삼았고 이에 이 일은 더욱 널리 전해지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於是, 與其妻一心齋肅, 自至月至明年春二月, 乃於峽口大路傍, 闢荒田數十頃. 盖湖南西道十數州郡人來往嶺南道者及東道十數州郡及嶺南人來往湖南西道者, 皆由是路, 行人日可數十百人. 其東有大峙, 石坂九折不下蜀路崟崎, 行人甚憂之, 田去峙底約可數三里. 其人乃於田中, 立草幕一間, 與其妻種瓜培埴甚勤, 其齋肅如舊, 常如承祭. 時天旱不已, 瓜逼枯, 忽有雲氣繞其幕, 俄頃雨大作. 如是者必旬有二三, 鄰其幕若干里, 里人咸異之. … (中略)… 於是瓜極茂, 不但唪唪已也, 瓜之食先於人旬朔, 而瓜之作不竆, 校其地, 其出可什百. 於是作澗流爲洌泉, 以每日朝, 摘瓜千百數, 沉之水, 置一大盤路中, 望見人來, 必以人數取瓜倍蓰, 置盤上, 及人到, 不卞老少尊卑, 特跪獻請嘗. 其東而西者皆艱度險嶺, 方其渴急時, 易爲食而食之甘; 西而東者仰見石路參天, 赫炎如焚, 皆憂甚, 必先食其一以滌熱, 又必取二三爲後地, 由其路者, 必傳爲勝事. 於是其傳益廣, 而人皆悅其人. -李起浡, 『西歸遺稿』 권7, 「梁四龍傳」.
양사룡은 당위소당(當爲所當)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 았다. 재물과 지위는 고사하고 변변한 땅 한 뙈기조차 없었던 양사룡은 아내와 함께 묵정밭을 일구고 거기에 오이를 심었다. 오이를 심은 것은 무더운 여름날 험난한 고개를 넘느라 비지땀을 흘릴 행인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힘겹게 넘어온 행인들은 찬 샘물에 시원해진 오이로 갈증을 풀었고, 고개를 넘어갈 행인들은 오이 한 개로 열기를 씻어내고 남은 길을 대비해 두어 개씩 챙겼다. 볼 때마다 기발한 생각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오이 나눔 대목이다. 서귀도 이 점이 특별했는지 오이 나눔 선행을 「양사룡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중심 서사로 기술하였다【죽어가는 노모를 간절한 기도로 소생시키고 하늘에 보답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 165자 분량인데, 오이를 나누는 선행은 414자나 된다.】. 서귀의 이러한 서사 구성은 「양사룡전」을 일반적인 효자전과 변별시키는 지점이다. 일반적인 효자전이었다면 이야기는 간절한 기도가 하늘을 감동시켜 어머니가 기적처럼 소생했다는 부분에서 마무리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사룡전」은 양사룡의 효행을 기본적인 뼈대로 삼되 하늘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오이 나눔을 실천한 양사룡의 선행을 특기하고 있다. 그 결과 양사룡은 효행을 바탕으로 선행까지 실천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효행과 선행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 당위소당(當爲所當)까지 결부시키면 「양사룡전」의 주제는 단순한 효행, 선행의 권면을 넘어 참된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의 차원으로 심화된다.
이기발의 진아(盡我)
이러한 문제의식은 입전자 서귀 이기발의 특징적 사유와 연결되는 바, 그것이 곧 진아(盡我)이다. 진아(盡我)에 대한 언급은 다음 글에서 보인다.
대저 더없이 미약한 사람으로서 더없이 높고 두터운 천지(天地)와 그 덕을 합치시키는 것은 성인이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사시(四時)를 차례대로 따르게 하고 음양을 법도대로 조절하는 것은 훌륭한 재상이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방촌(方寸)의 정성으로 창창한 구만리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은 효자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일시의 절개로 만고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는 것은 의로운 선비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것들이 모두 나에게 있어 내가 진실로 내게 있는 것을 다 한다면 나는 반드시 그 어려움을 어렵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 가운데 공자가 계시고, 훌륭한 재상 가운데 주공(周公)이 계시고, 훌륭한 장군 가운데 방숙(方叔)이 있고, 효자 가운데 증삼(曾參)이 있고, 의사(義士) 가운데 백이(伯夷)가 있으니 이 분들은 모두 ‘나를 다한[盡我]’ 분들이다. …(중략)… 비록 그러하나 세상에는 또한 나 아닌 것이 있으니 나 아닌 것은 남이다. 무릇 덕(德), 재(才), 성(誠), 절(節)은 진실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그것을 다하여 공자가 되실 수 있었고, 주공과 방숙은 그것을 다하여 주공과 방숙이 될 수 있었고, 증삼과 백이는 그것을 다하여 증삼과 백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이른바 때[時]라는 것은 남에게 있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끝내 지위를 얻지 못하셨고, …(중략)… 백이는 말고삐를 부여잡고 한 간언을 이룰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내게 있는 것은 비록 아주 어렵더라도 능한 자는 어렵다 여기지 않고, 남에게 있는 것은 비록 아주 쉽더라도 성인도 끝내 쉽게 할 수 없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내게 있는 것을 다하지 않고서 남에게 먼저 구하는 것, 이는 우리의 공통된 걱정거리 아닌가?
夫以莫微之人身也, 而能與莫高厚之天地合其德, 爲聖人不其難矣乎. 居宰輔之位而能使四時順其序, 陰陽調其度, 爲良相不其難矣乎? 方寸之誠, 能動九萬之蒼蒼, 爲孝子不其難矣乎? 一時之節能扶萬古之綱常, 爲義士不其難矣乎? 雖然, 是皆在我, 我苟盡在我, 我未必不易其難. 是故, 聖人有孔子, 良相有周公, 良將有方叔, 孝子有曾參, 義士有伯夷, 是皆盡我者也. …(中略)… 雖然, 世亦有不我者, 不我, 人也. 夫德也才也誠也節也, 是固在我者, 故孔子能盡之而爲孔子, 周公·方叔能盡之而爲周公·方叔, 曾參·伯夷能盡之而爲曾參·伯夷. 若夫所謂時也者, 在人非在我, 故孔子終於不得位 …(中略)… 伯夷不能遂叩馬之諫. 是故, 在我者雖甚難, 能者不以爲難; 在人者雖甚易, 聖人亦終不能易之. 况凡人乎? 不盡其在我者, 而先求諸人, 此豈非吾人所通患者乎? -李起浡, 『西歸遺藁』 권5, 「與松京留守李令書」.
인용문은 이기발이 개성유수 이시만(李時萬)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이다. 이 글의 핵심 사유는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 가운데 과연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서귀는 공자(孔子), 주공(周公), 방숙(方叔), 증삼(曾參), 백이(伯夷)를 열거하면서 이들이 성인으로, 훌륭한 재상으로, 명장으로, 효자로, 의로운 선비로 남게 된 것은 이들이 모두 진아(盡我)했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진아(盡我)는 남의 것을 좇지 않고 내게 있는 고유한 가치, 즉 공자에겐 덕(德), 주공ㆍ방숙에겐 재(才), 증삼에겐 성(誠), 백이에겐 절(節)이라는 가치를 모두 구현했다는 의미이다. 한편 서귀는 내 것이 아닌 남의 것도 있다면서 때[時]를 예시하였다. 이 ‘때’라는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가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남 보기에는 대단히 쉬운 것도 바로 ‘남의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들도 이루지 못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다. 성현들이야 이루지 못한 바가 있을지언정 남의 것을 구하지는 않는데, 범상한 사람들은 제 것도 다 하지 않으면서 남의 것을 먼저 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남의 것은 ‘나’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구애되지 말고, 오히려 ‘나’에게 있고 ‘나’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서귀의 이러한 인식은 그의 시문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명의리 때문에 평생 은거를 단행했던 서귀였기 때문에 그는 절 의의 실현 방식을 백이숙제와 견주곤 하였는데, “백이숙제 아사(餓死)는 내 분수가 아니요, 도연명의 귀거래가 내 본심에 꼭 맞았네[夷齊餓死非吾分, 靖節歸來得本心 -李起浡, 『西歸遺稿』 권4, 「偶吟眎諸生」]”, “정신없이 바쁜 행색 모두 생계 때문이니, 백이숙제 대현(大賢)임을 비로소 알겠노라[奔忙行色皆糊口, 始識夷齊是大賢 -李起浡, 『西歸遺稿』 권4, 「秋夜雨中歸來有感」]”, “백이숙제 아니니 곡기는 못 끊겠고, 풍년들어 술잔에 술이나 그득했으면[不作夷齊難却食, 年豐願得酒盈杯 -李起浡, 『西歸遺稿』 권4, 「立春」]”과 같은 시구를 보면 어설피 ‘남의 것’을 구하기보다는 ‘나’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노라는 진아(盡我)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서귀의 진아(盡我)는 이런 점에서 양사룡의 당위소당(當爲所當)과 긴밀하게 조응된다. 천민이었던 양사룡에게 남을 이롭게 할 재물이나 지위는 ‘나’에게 없는 ‘남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양사룡은 ‘남의 것’을 구하려 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내 것’을 구하였다. 그렇게 구한 것이 묵정밭을 일구어 오이를 나눈 선행이었다. 즉, 오이 나눔이 곧 양사룡의 진아(盡我)였던 것이다. 이렇듯 양사룡의 당위소당(當爲所當)과 이기발의 진아(盡我)는 긴밀하게 조응하며 「양사룡전」의 핵심 사유로 기능하고 있다.
Ⅳ. 인성교육 자료의 측면에서 본 「양사룡전」의 특징
나를 매개로 한 인성교육
이 장에서는 앞의 논의를 부연하여 「양사룡전」이 인성교육의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음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먼저, 「양사룡전」의 당위소당(當爲所當)과 진아(盡我)는 청소년의 자아 형성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서도 언급하였듯 「양사룡전」은 효자전이면서도 단순히 효의 가치를 계몽하는 선을 넘어선다. 효행보다 특기된 오이 나눔 선행이 그러하고, 그런 효행과 선행을 당위소당(當爲所當)과 연결시킴으로써 보다 근원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상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아(盡我)와 당위소당(當爲所當)은 올바른 가치관 형성에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나’, 그리고 관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킨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가령, “효는 백행의 근원인데 효를 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마는 승냥이와 수달도 보본(報本)하고 까마귀는 반포(反哺)하는데 사람이 되어 부모께 효도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면 금수만도 못하게 된다[孝者百行之源也, 而行之者鮮矣. 孰非人之子也, 而豺獺報本, 慈烏反哺, 人而不知孝親之道, 曾禽獸之不若矣. -姜再恒, 『立齋遺稿』 권19, 「琴孝子傳」.].”와 같은 일방적, 선언적 접근이 아니라, 효와 선행의 근저로 내려가 ‘나’가 왜 효도를 해야 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적실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 도덕규범에 대한 무비판적 추수가 인성교육을 ‘나’의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하게 할 소지가 있다면, 당연하게도 ‘나’를 매개한 인성교육은 ‘나’의 삶에서 왜 그런 가치들이 필요한지를 스스로 묻게 함으로써 ‘나’와 나의 인성의 문제에 관한 보다 능동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이끌 것이다.
일상의 활용성
다음으로 「양사룡전」에 그려진 효행과 선행은 진솔하고 핍진하여 공 감의 여지가 크다는 점이다.
“제 어머니께서는 본래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저는 하루에 꼭 세 사발씩 마련하였지만, 어머니 홀로 쓸쓸하게 드시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홍춘반(洪春盤), 배소남(裵小男), 이수복(李受福), 이몰내(李沒內) 및 아무개라 불리는 약간의 사람들은 모두 노모가 술을 잘 드시고 제 이웃에 살고 있어서 그들과 함께 계를 만들고 ‘양친계’라 불렀습니다. 열흘마다 닷새 되는 날에 한 번 만났는데 나이순으로 돌아가며 자리를 주관하여 맛난 음식을 차려드리고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술을 즐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약간의 사람들과 늘어서서 곁에서 노래를 불러드리고 아울러 함께 일어나 춤도 추었습니다. 이렇게 즐거움을 다 한 뒤에 마치니 어머니께서 아주 기뻐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눈물을 흘리며 “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에도 살고 죽고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막 돌아가셨을 때는 제 마음이 너무 슬퍼서 견딜 수 없고, 잠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바뀌면서 조금씩 달라지더니 1년이 지나서는 더 달라지고 3년이 지나서는 또 더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20년이 되고 보니 이틀 동안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기도 하고, 생각하더라도 그 마음의 비통함이 또한 처음 돌아가셨을 때와는 같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제 어머니께서 구원 받지 못하셨다면 점차 어머니를 잊어감이 어찌 아버지 때와 달랐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졸아들고 그 모양새가 오그라듭니다.”라고 하였다.
“我母性好飮, 我日必有三椀, 恨母獨飮孤寂. 有曰洪春盤、曰裵小男·李受福·李沒內、曰某某若干人, 皆有老母善飮, 而與我同鄰居者, 與之脩稧, 名曰養親. 每旬間五日一會, 各以齒坐輪辦, 可嘗羞以供, 使酬酢酒酣, 我以若干人, 必列侍歌, 仍並起舞, 盡歡而罷, 母頗慰悅”云, 仍流涕而言曰: ‘噫! 人子愛親之心, 亦有存亡之異. 方我父初亡時, 我心甚哀, 若不可堪, 若不得一刻可忘也. 旣日月而小異, 朞而漸異, 三年而又大異, 今纔二十年矣, 而或並日不思父, 雖思之, 其心之悲, 亦不如初亡時也. 不幸使我母不救, 其漸忘亦奚異父也? 我思至此, 自不覺煎然, 其容蹙蹙如也.’ 李起浡, 『西歸遺稿』 권7, 「梁四龍傳」.
좋아하시는 술을 어머니 홀로 드시는 게 안타까워 이웃 사람들과 양 친계를 만들고 이웃 어머니들과 함께 어울려 술을 즐기게 한 내용이다. 주흥(酒興)이 오른 어머니들 곁에서 누구는 노랫가락을 뽑고 누구는 어머니들과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이 트로트 한 곡이면 관광버스건 시골 장터 건 흥겨운 춤판으로 변하는 오늘날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슬며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선친의 유품인 신발 대바구니에 넣어두고 저승길 편안하시라고 일 년에 한 냥씩 대바구니에 넣으며 언제고 한참을 울었다는 부친 양흔동의 모습【李起浡, 『西歸遺稿』 권7, 「梁四龍傳」. “欣同嘗事父孝, 父歿有遺履, 欣同藏之籠中, 一年一兩納之曰‘此亡父遺跡’, 必流涕移時.”】도 일체의 가식 없이 그려져 있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은 「양사룡전」에 그려진 인물들의 언행에 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되는데, 바로 이 공감이라는 요소야말로 교육적 감화가 일어나는 시발점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아울러 주목할 점은 「양사룡전」에 그려진 효행과 선행은 모두 일상의 소박한 것들이라 그것에 공감한 독자의 실천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껏 살펴보았듯 양사룡이 어머니를 위해 한 효도는 지극정성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좋아하는 술을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계를 만든 것뿐이다. 「양사룡전」의 말미에 소개된 홍춘반의 효행도 그렇다. 홍춘반은 모친의 소상 즈음에 병환으로 미음만 드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상식(上食)으로 미음을 올렸고, 모친 생전에는 외출했다 돌아올 적 문앞에서 걱정하며 기다리실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멀리 서부터 춤을 추며 돌아왔다【李起浡, 『西歸遺稿』 권7, 「梁四龍傳」. “춘반이 그 어머니를 섬긴 것도 지극히 효성스럽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고 이듬해가 되어 小祥이 한 달 남았는데 그의 아내가 전과 같이 밥을 올리자 춘반이 문득 물리치며 “작년 이맘때 어머니께서 밥을 드셨던가?”하고는 미음으로 바꾸어 소상일이 지난 뒤에야 그만두었고 再朞 때도 그렇게 하였다. 어머니 생전에는 춘반이 외출할 때면 어머니가 늘 문에 기대어 기다렸는데 춘 반은 돌아올 때 반드시 멀리서부터 춤을 추어 어머니께 잘 다녀왔음을 보였다고 한다[春盤事其母至孝. 母宿病以歿, 越翌年未及祥一月, 其妻進食如故, 春盤輒却之曰‘上年此時, 母其進飯乎’, 以粥飮, 至祥日過後乃已, 至再朞亦然. 母未歿, 春盤每出, 母常倚閭, 春盤還必自遠舞, 以示母好歸].”】.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행위에 오히려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 행위가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안도감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일반적인 효자전에 자주 등장하듯 양사룡의 효행이 단지(斷指)나 할고(割股)로 그려졌다면, 그 행위는 숭고한 것임에도 독자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독서물의 내용이 공감되지 않은 순간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양사룡전」에 그려진 효행들은 우리 학생들로 하여금 효도란 것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자신을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고 자신도 일상에서 충분 히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활용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활동학습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게 한다면 교육의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흥미로운 삽화들
마지막은 「양사룡전」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점이다. 앞서 살폈듯 양사룡의 오이 나눔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싶게 참신하다. 이 외에도 「양사룡전」은 다양한 삽화를 통해 이야기의 흥미를 높이고 있다. 그 가운데 남만국 삽화를 예로 든다.
이때 무심자는 자식을 잃은 아픔이 있어 말을 나누는 사이에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되었다. 사룡은 이내 웃으며 나아와 다음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만(南蠻)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생업이 조금 풍족해지자 나이 마흔에 비로소 외아들을 얻었답니다. 그 아들은 얼굴이 잘생기고 재주와 학식이 더없이 빼어나 모두들 한번 사귀기를 원할 정도였는데 약관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 부모가 몹시 슬퍼했답니다. 그 나라의 풍속에 바다 남쪽 끝에 한 도사가 있어 길과 물을 관장하는데 새로 죽은 자는 반드시 도사에게 들러 도사가 머리를 끄덕인 뒤에야 명부로 돌아갈 수 있었답니다. 혹 도사에게 사정이 생기면 그 문에 열흘을 머무는 일도 있었답니다. 부부가 재계하고 급히 도사의 집으로 갔더니 그 아들 이름으로 방문이 벌써 있었더랍니다. 도사가 「저녁때 과연 왔었는데 내가 마침 마음이 번거로워 답을 하지 못했다. 내일 일찍 다시 올 터이니 보고 싶으면 내 집에 머물러라. 내가 보게 해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이 되자, 도사가 「그가 곧 올 테니 그대들은 우선 방안에 숨거라.」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도사를 찾아뵙자 부부는 문틈으로 엿보았는데 그 모습이 아주 추하고 또 무서워 똑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부부는 의아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도사가 부부의 말을 전해주자 그 아들은 발끈하며 「내가 어찌 부부의 자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부부는 전생에 어느 뱃사람을 무고하게 죽이고 아울러 그의 재물까지 뺏은 적이 있었는데 그대로 현생의 부부가 되었고, 나는 그때 무고하게 죽은 뱃사람의 아들입니다. 하늘이 부부의 무고한 살인과 도적질을 한스러워하고, 내 아비의 원통한 죽음을 불쌍히 여겨 복수를 하되 칼을 쓰지 않고 창자를 베는 방법으로 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본래 몸에 칼질을 하는 것보다 더 참혹한 것이 늘그막에 얻은 어여쁜 자식을 갑자기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나를 그들의 자식이 되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켰다가 갑자기 다시 빼앗아 그들의 창자를 찢어지게 한 것일 따름이니 내 어찌 부부의 자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재빨리 떠나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부부는 그 말을 듣고는 곧 눈물을 거두고 더는 아들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을 두고 사람들이 그 부모를 위로하면서 ‘이는 곧 전생의 원수다’라고 하니 그 말이 이 이야기에서 나왔습니다. 선생께서는 상심하지 마십시오. 선생께서 상심하는 것은 태부인께서 상심하는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상심하지 마십시오.”
時無心子有喪明之痛, 語次有淚潸然. 四龍乃笑而進曰: ‘南蠻之諺曰: 「古有夫婦, 貲業稍豐, 年四十始得一子, 其容端, 其才學絶倫, 人無不願與一交, 年弱冠猝逝, 其父母甚悼. 其國俗海極南, 有一道士管道流, 新逝者必過道士, 道士點頭, 然後歸冥府, 或道士有故, 則至有留其門旬日者. 夫婦齋宿, 急往道士家, 以其子名訪已過. 道士曰: 『日夕果來, 以我適心煩, 不能答. 明早必更來, 子欲見留我. 我使見之.』 明日果來, 道士曰: 『彼方來, 子姑隱室中.』 已而來謁道士, 夫婦從門隙覘, 其狀貌甚麤, 且威嚴不可直視. 夫婦方疑訝, 莫得端倪. 道士以夫婦言言之, 其子乃艴然曰: 『我安得爲夫婦子也? 夫婦前時, 枉殺一船夫, 並取其資, 仍爲此世夫婦, 我則船夫子也. 天恨夫婦枉殺人取資, 憐我父寃死, 欲令復其讎, 以不加刃其身而其腸之割, 自有慘於刃其身者莫如臨老得美子而旋失之, 特使我爲其子, 以足其心, 旋又奪之, 以割其腸而已, 我安得爲夫婦子也?』 乃倐然而逝, 更無所見. 夫婦聞其語也, 卽收淚不復思其子.」 故子之凡先父母亡者, 人必慰其父母曰「此乃前生讎也」, 語盖出此. 夫子其毋傷也. 夫子而傷者, 太夫人之傷也. 夫子其毋傷也. -李起浡, 『西歸遺稿』 권7, 「梁四龍傳」.
서귀는 양사룡 부친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즈음 세상을 떠난 자식을 떠올렸고, 이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러자 양사룡이 슬픔에 잠긴 서귀를 위로하기 위해 해준 이야기가 위에 인용된 삽화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부부에게 나이 마흔이 넘어 얻은 늦둥이가 있었는데 너무도 준수하여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런데 그 귀한 아들이 약관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려내고 싶었던 부부는 바다 남쪽 끝에서 저승 출입을 관장한다는 도사를 찾아가게 된다. 그랬더니 다행히도 자식은 아직 명부로 떠나가지 않은 상태였고, 마침 내일 다시 올 테니 보고 싶으면 내일 아침 봐도 좋다는 도사의 허락을 받았다. 이튿날 부부가 문틈으로 살펴보니 그 잘 생겼던 아들 대신 흉측하기 짝이 없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도사가 그 사람에게 자식을 찾아 이곳까지 온 부부의 이야기를 전하자, 그 아들은 발끈하며 뜻밖의 말을 하였다. 부부는 전생에 강도였는데 어느 뱃사람을 무고하게 죽인 뒤 그의 재물까지 훔쳐간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악행에 분노한 하늘은 그들에게 칼로 창자를 베어내 는 것보다 더한 아픔을 주기 위해 그들을 부부로 환생시킨 뒤 그들에게 더 없이 귀한 자식을 주었다가 갑작스레 요절시켰고, 요절한 자신은 바로 무고하게 죽은 뱃사람의 자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사룡은 이야기 말미에 “그래서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을 두고 사람들이 그 부모 를 위로하면서 ‘이는 곧 전생의 원수다’라고 하니 그 말이 이 이야기에서 나왔습니다. 선생께서는 상심하지 마십시오. 선생께서 상심하는 것은 태부인께서 상심하는 것입니다.”라는 위로를 덧붙였다.
삽화의 반전이 아주 흥미롭다. 그리고 ‘먼저 죽은 자식은 전생의 원수다’라는 말의 유래 또한 우리가 흔히 듣곤 하는 ‘자식이 웬수’라는 말이 연상되어 흥미롭다. 이처럼 「양사룡전」은 본사인 양사룡의 효행과 선행 이야기는 물론, 첫 번째 삽화인 양흔동의 효행과 의리, 두 번째 삽화인 남만국 이야기, 세 번째 삽화인 홍춘반의 효행 이야기까지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로 엮여있다. 한문 고전을 활용한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생들이 그 작품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읽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수업에서 읽을 자료가 지루하여 제대로 된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다음 단계의 교육은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더구나 한문 고전은 왠지 딱딱하기만 하고 재미와는 멀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가진 청소년들이라면 텍스트 자체가 지닌 흥미소는 대단히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양사룡전」을 대상으로 「양사룡전」에 담긴 인성교육의 핵심적 가치를 추출하고, 아울러 인성교육 자료로서 「양사룡전」이 지닌 여러 장점을 살펴보았다. 검토 결과 「양사룡전」은 효자전 일반의 계몽적 권면을 넘어 의리를 바탕으로 왜 효행과 선행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사 유과정을 보임으로써 인성함양과 관련된 윤리적, 도덕적 가치의 함의를 더욱 풍부하고 실재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인성교육 자료의 측면에서도 청소년의 자아 형성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진아(盡我)라는 사유를 갖추고 있고, 진솔하고 핍진한 서술로 독자의 공감을 높이고 있으며, 소박하지만 실천 가능한 행위들을 통해 전통시대 윤리 덕목에 대한 인식 전환을 꾀할 수 있고,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워 학생들의 독서를 적극적으로 이끌 수 있는 등 여러 장점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논문은 이러한 자료를 어떻게 수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가 하는 방법적 고찰이 결여되어 있다. 이는 필자의 역량이 부족한 때문이기도 하고, 이 논문의 목표가 방법론적 고찰과는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작품은 작가 고유의 사유 방식과 연계하여 분석하고 그 속에서 인성교육적 가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작으나마 의의를 지닌다. 미처 다루지 못한 방법론적 고찰은 후고를 기약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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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ignificance of the Yang Sa-ryong(梁四龍)’s biography in terms of personality education
Kim, Hyoung-Sool*
Dept. of Chinese Classics Education, JEONJU University
This thesis analyzes the key reason contained in the works for Seogwi(西歸) Lee Ki-bal(李起浡)’s 「Yang Sa-ryong’s biography」 and examines the special features of 「Yang Sa-ryong’s biography」 as personality education materials. The core value of “Yangsaryongjeon” is the loyalty of “I have no money, no title, but I will do what I have to do” to repay the grace of heaven. Yang Sa-ryong was able to practice cucumber sharing and filial piety toward his mother based on the spirit of “I will do what I have to do.”
「Yang Sa-ryong’s biography」 can be a great source of personality education for the following reasons.
First, the spirit of “I will do what I have to do” and “I’ll do everything I can” in 「Yang Sa-ryong’s biography」 can be closely linked to the formation of youth’s self. The spirit of “I will do what I have to do” and “I’ll do everything I can” directly evoke the “I”, which should be the center of the formation of correct values, and the problems of relationships. Personality education, which mediates “I” can lead to a more active and open attitude on the issue of “I” and my personality by asking myself why such values are needed in my life.
Second, the filial piety and good deeds depicted in 「Yang Sa-ryong’s biography」 are sincere and exhausting, which leaves much room for empathy. For this reason, readers can more easily sympathize with the words and actions of the characters depicted in 「Yang Sa-ryong’s biography」, which is the starting point for educational influence.
Third, the filial piety and good deeds depicted in 「Yang Sa-ryong’s biography」 are simple things in everyday life, it is possible to enhance the reader’s ability to sympathize with it. If Yang Sa-ryong’s filial piety had been portrayed as ‘cutting fingers’ or ‘cutting thighs’, as it often appears in common filial piety stories, the act would likely have been considered unrelated to himself, even though it was sublime. In this regard, the filial piety depicted in 「Yang Sa-ryong’s biography」 can lead to a shift in our students' perception that filial piety is too extreme to do anything they can’t do and that they can do enough in their daily lives.
Fourth, 「Yang Sa-ryong’s biography」 itself is a very interesting story. Yang Sa-ryong’s cucumber-sharing is a novel way to think about it in today’s perspective. Besides this, 「Yang Sa-ryong’s biography」 enhances the interest of the story through various illustrations. In order for personality education using Chinese classics to work properly, students must read the work above all. if the material to be read in the class is boring and proper reading is not achieved, the next level of education cannot expect the effect.
Although this paper did not provide specific teaching methodologies, it is of little significance in that it analyzed one text in connection with the writer’s thinking and presents personality educational values.
[Key words] Seogwi(西歸) Lee Ki-bal(李起浡), 「Yang Sa-ryong’s biography」, filial piety, good deeds, loyalty, Jeonju
논문투고일: 2020년 7월 8일 논문심사 및 수정: 2020년 7월 13일 ~ 8월 9일 게재확정일: 2020년 8월 10일 필자전자우편주소: mulsiwubu@jj.ac.kr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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