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盡我)’ 정신으로 본 「양사룡전(梁四龍傳)」의 입전의식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국문초록」
본고는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파악하고 저자의 입전의식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양사룡전」은 2,703자나 되는 긴 분량으로 구성과 내용에서 몇 가지 독특한 면모를 보인다.
첫째, 「양사룡전」은 하늘과 인간 사이의 정당한 관계 정립에 대한 철학적 의론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작품 전체를 통해 저자가 자신의 사유를 입전인물을 통해 입증해가는 장치로 기능한다.
둘째, 「양사룡전」은 중첩된 서사 구성을 통해 양사룡의 효행을 강조하고 주제를 심화시킨다.
셋째, 「양사룡전」은 다양한 삽화를 통해 주제를 확장시킨다. 이와 같은 구성상의 특징을 바탕으로 「양사룡전」은 내용과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효자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효자전의 일반적인 주제 가 효행의 계몽적 권면이라면 「양사룡전」은 양사룡의 효행을 서사의 시발점으로 삼아 선행, 의리로 주제를 확장해가면서 종국에는 하늘과 정당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바람직한 인간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양사룡전」에 담긴 핵심적인 사유는 저자인 서귀 이기발의 의리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기발의 의리론은 ‘마땅함’을 기준으로 몇 가지 양상으로 표출되는데 첫째는 부당한 일에 대해 ‘어찌 차마 그런 일을 하랴[那忍]’는 것이고, 둘째는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마땅히 하라[當爲所當, 當爲所能]’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의 할 도리를 다하라[盡我]’는 것이다. 「양사룡전」에서 양사룡이 자기가 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늘에 대한 보은을 모른 체 해선 안 된다는 것은 ‘나인(那忍)’과 연결되고, 스스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겠다는 다짐은 ‘당위소당(當爲所當)’의 정신과 연결되며, 오이를 정성껏 가꾸어 지친 행인들의 갈증을 풀어준 선행은 자신이 할 도리를 다하는 ‘진아(盡我)’와 연결된다.
이렇게 볼 때 서귀 이기발은 「양사룡전」을 통해 하늘이 품부해준 바를 따라 마땅히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하는 인간상의 확립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서귀는 「양사룡전」을 통해 ‘盡我’의 실천자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확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핵심어 : 서귀, 이기발, 양사룡전, 효, 선행, 의리, 오이, 전주, 대명의리
Ⅰ. 머리말
본고는 서귀(西歸) 이기발(李起浡, 1602~1662)의 「양사룡전」이 지닌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파악하고, 「양사룡전」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저자가 지향했던 정신적 가치를 통해 구명하고자 한다. 이기발은 자(字)가 패연(沛然), 호(號)가 서귀(西歸)【서귀(西歸)라는 호는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누가 장차 서쪽으로 돌아갈까, 좋은 소 리로 위로하리라[誰將西歸, 懷之好音]”에서 그 의미를 취한 것이다. ‘서쪽으로 돌아간다는 것 [西歸]’은 주나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이 시는 주나라의 도가 쇠미해져 감을 안타까워한다는 의미이다.】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1세손으로, 그의 집안은 증조부인 이치(李稺)가 선친 이수량(李守良)을 전주에 장사한 이래로 전주에 우거하게 되었다. 부친은 이극성(李克誠)이 고 모친은 전주가 본관인 최준극(崔峻極)의 따님인데, 모친은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내 신천우(愼天翊), 양만용(梁曼容)의 모친과 더불어 호남의 세 현모 중 한 분으로 일컬어졌다. 이극성과 최씨부인은 슬하에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이기발은 3남 가운데 둘째로서 전주 황방산(黃方山) 활동리(闊洞里)에서 태어났다. 형은 이흥발(李興浡)이고, 아우는 이생발(李生渤)이다.
서귀는 26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한림원 주서, 시강원 설서와 필선, 사헌부 지평, 사간언 정언 등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특유의 곧은 기개를 드러내었다【「연보」에 의하면 34세 되던 1635년, 당시 사헌부 지평이었던 이기발은 척신과 환관들의 도를 넘는 사치를 논핵하기도 하였고, 3월에는 폭우와 번개로 무너진 목릉(穆陵)과 혜릉(惠陵)을 대충 조사하고서 재해에 의한 붕괴라고 사실대로 보고했던 목릉참봉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대신, 예조판서, 선공감제조를 논핵하기도 하였다.】. 35세 되던 1636년의 일을 소개하면, 당시 대동찰방(大同察訪)이었던 이기발은 기자묘에 봉심하러 간 일이 있었는데 기자묘에 절을 하지 않았다. 함께 갔던 관찰사가 이유를 묻자 이기발은 “절을 하는 것은 진실로 보통의 예법이지만, 절을 하지 않은 것에도 그만한 마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嘗從方伯奉審箕子殿, 先生不拜. 伯問其故, 先生愀然對曰: “拜者固常禮也, 不拜者亦有其心也.” 蓋非其白馬朝周也, 座皆肅然敬歎.(『西歸遺稿』 附錄 「年譜」)】. 이는 은나라 신하였던 기자가 주나라를 조회하러 간 일을 불사 이군(不事二君)이라는 절의에서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 해에, 말을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오랑캐 사신에게 자신의 말을 오랑캐가 탈 수 없 다며 거부하자 사신단 10여 명이 칼을 뽑아 이기발의 책상을 내려치는데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일도 있었다【時値虜使往來, 責馬甚急. 先生不應曰“我馬豈作虜奴乘耶”, 終不肯出給. 虜奴十餘輩, 拔劒亂入叫噪, 而擊先生坐前書案. 先生凝然不動, 虜奴相顧掉舌而退曰: “大人不可犯矣.”(『西歸遺稿』 附錄 「年譜」)】.
이렇게 청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렬했던 이기발은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형 이흥발, 한림 양만용(梁曼容), 순창군수 최온(崔蘊), 찰방 유집(柳楫)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주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을 불과 50리 남겨둔 지점에서 청과의 강화(講和)가 성립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전주로 돌아와 황산(黃山) 아래 ‘서귀(西歸)’라 편액한 뒤 은거에 들어갔다. 이후 서귀는 임금의 숱한 부름에도 자신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토록 일체의 출사를 거부한 채 제 자 교육을 소명으로 삼다 생을 마감하였다.
이기발의 문집인 『서귀유고(西歸遺稿)』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인 6대손 이승연(李承淵)이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편차하고 교정한 뒤, 1872년에 영초(潁樵) 김병학(金炳學, 1821~1879), 1873년에 경대(經臺) 김상현(金尙鉉, 1811~1890),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6)에게 서문을 받아 10권 5책으로 편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교정을 거치고 1870년에 서문을 받아두었던 형 이흥발(李興浡)의 『운암일고(雲巖逸藁)』 1책을 보태어 10권 6책으로 1876년에 활자로 간행하였다. 『서귀유고(西歸遺稿)』 권7에는 두 편의 전이 실려 있는데 한 편이 본고의 대상인 「양사룡전」이고 나머지 한 편은 「송경운전(宋慶雲傳)」이다. 두 편의 전은 구성과 표현, 주제의식에 있어 빼어난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이들 작품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공소하여 「양사룡전」은 아직 제출된 논문이 없고, 「송경운전」은 박희병 교수가 예인전을 연구한 논문의 일부로 소개되었을 뿐이다【박희병 교수는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 藝人傳의 연구』라는 논문에서 「송경운전」을 예인전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고도의 유기적 구성과 빼어난 표현미를 갖춘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박희병,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 藝人傳의 연구 , 『대동문화연구』 제24집, 1990, 107~108면.】. 이에 본고는 일반적인 효자전에 비추어 「양사룡전」이 지닌 구성상의 특징과 그 의미를 파악하고, 이와 같이 독특한 전이 나오게 된 배경을 작가의 정신적 지향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양사룡전」이 지닌 주제의식이 심화되고 그것을 잉태한 작가정신의 일단이 구명되길 기대한다.
Ⅱ.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 간개
서귀 이기발의 「양사룡전」은 아직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된 작품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본고는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도입」
① 하늘이 사람에 대해 보이는 일관되지 않은 처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본사1」
② 을유년(1645)의 큰 가뭄과 전주 금암천 일대에만 일어난 강우 현상
③ 금암천 일대의 강우 현상에 대한 전주 사람들의 전언
③-1 금암천 상류에 살던 효자는 죽어가는 노모를 자신으로 대신해달라고 열흘 동안 기도하였고, 노모는 기도 후 이레 만에 기적적으로 소생함.
③-2 효자는 노모의 소생이 하늘의 은혜라 생각하고 하늘에 대한 보은으로 묵정밭을 일구고 오이를 심었는데 하늘이 효자의 밭에만 비를 내려주는 이적이 일어남.
③-3 하늘의 도움으로 풍성하게 오이를 길러낸 효자는 무더위에 험한 고개를 넘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오이를 나누어 주었고 그로 인해 효자의 선행이 알려지게 됨.
「본사2」
④ 무심자가 직접 만나 확인한 효자 양사룡의 생각과 효행
④-1 효자의 이름은 양사룡이고 나이는 45세였으며 직접 만나 대화해보니 행실과 말이 모두 애친(愛親)과 관계된 일이었음.
④-2 왜 오이를 나누어주게 되었는가에 대한 양사룡의 말 : 양사룡은 하늘의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보은해야 하는데 자신의 미천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어 하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오이를 나누어 주게 되었다고 함.
④-3 노모를 위한 양친계 조직 : 술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홀로 술을 마시는 게 안타까워 인근의 노모를 봉양하는 사람들과 양친계를 조직하여 노모를 기쁘게 함.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처음 마음과는 달리 점차 아버지를 잊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머니도 돌아가셨다면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불안하여 계를 조직하여 봉양하게 되었다고 함.
「본사3」
⑤ 삽화1: 부친 양흔동의 효와 주인 섬김
⑤-1 양흔동은 아버지가 죽자 남긴 신발을 대바구니에 넣어두고 일 년에 한 냥씩 대바구니에 넣으면서 이것이 아버지께서 남긴 자취라며 언제고 한참을 울었음.
⑤-2 주인집 사람들이 모두 죽고 아이 하나만 남게 되자 흔동은 이 아이를 주인으로 극진하게 섬김. 임진왜란 때는 자신의 가족은 남겨둔 채 주인을 모시고 피신했고, 돌아와서는 어진 스승에게 공부하게 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결혼도 시켜주고 집과 살림도 장만하여 줌.
⑤-3 가정을 꾸린 주인이 갑자기 죽어 그의 가족들이 의지할 데 없자 다시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몇 년을 봉양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헌신함.
⑤-4 수십 년 뒤 주인의 장례에서 있었던 일과 흔동의 죽음 : 주인의 장례식에 지간(支干)이 천민 흔동의 참여를 꺼려하여 아들 사룡이 만류하는데도 흔동은 주인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장례에 참여하여 널을 호송하고 곡함. 이 때문에 병이 생겨 죽음.
⑥ 무심자의 양사룡에 대한 경의 : 무심자는 양사룡 부자의 행실을 듣고 예를 표한 뒤, 벼슬을 탐하여 염치와 시비를 몰라라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사람들이 욕심을 버린다면 마땅한 하늘의 이치와 떳떳한 사람의 도리가 별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함.
⑦ 삽화2 : 양사룡이 자식을 잃은 무심자에게 남만국의 이야기를 통해 위로함.
⑦-1 옛날 남만국의 어느 부부가 40세에 외아들을 얻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와 학식이 빼어나 누구나 한 번 사귀기를 원하는 인재였음.
⑦-2 귀한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⑦-3 슬픔에 빠진 부부는 죽은 사람을 명부로 보내는 일을 맡고 있다는 도사를 찾아가 아들이 명부로 떠나는 것을 막고자 함.
⑦-4 도사를 찾아가자 도사는 아들을 아직 명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내일 아들이 올 것이니 머물렀다 내일 보라고 함
⑦-5 도사가 자식을 찾아온 부부의 이야기를 전하자 그 아들이 부부의 전생을 이야기함 : 부부는 전생에 어느 무고한 뱃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재물까지 훔쳤는데, 그 아들은 전생 뱃사람의 자식이었음. 부부의 악행에 분노한 하늘은 뱃사람의 자식을 후생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했고, 철저한 아픔을 주기 위해 귀한 늦둥이를 얻은 기쁨을 주었다가 갑자기 죽게 했던 것임.
⑦-6 부부는 자식의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자식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음.
⑦-7 그래서 세상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를 전생의 원수라고 한다면서 죽은 자식 때문에 슬퍼하면 모부인께서 상심하시니 상심을 거두라고 위로함.
「결사」
⑧ 양사룡의 행위에 대한 논평
⑧-1 양사룡으로 인해 하늘이 사람을 여전히 굽어살핌을 알 수 있었음.
⑧-2 입전 동기 : 사마천이 열전은 세교와 관련한 인물을 싣지 않은 단점이 있는데, 무심자가 양사룡을 만난 것은 양사룡의 행실이 후세에 전해지도록 한 운명적인 일임.
⑧-3 양사룡의 효행은 오로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오이
를 나누어 준 선행은 그 넓은 헤아림이 숭상할 만함. 양사룡의 행실은 그의 부친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임.
⑨ 삽화3: 춘반의 효행
⑨-1 어머니의 소상 한 달 전 아내에게 어머니가 생전 이즈음에 드셨던 미음을 올리도록 함.
⑨-2 어머니 생전에 출타하게 되면 문에 기대어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
를 위해 돌아올 적이면 멀리서부터 춤을 추면서 잘 돌아왔음을 보임.
2,703자의 긴 분량으로【본고는 「양사룡전」에서 보이는 내용과 구성상의 특징을 확인하기 위해 문집총간 소재 효자 전 26편을 참조하였다. 참조한 작품과 분량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優人孝子君萬傳(陽村集 권 21, 843자), 孝子林秀福傳(牛溪集 권6, 598자), 安孝子傳(鵝溪遺稿 권3, 511자), 孝子李至男傳(於于集 권5, 453자), 孝子李基稷傳(於于集 권5, 419자), 孝子金忠烈傳(宋子大全 권243, 508자), 孝子傳(丈巖集 권26, 824자), 金孝子傳(芝村集 권25, 2036자), 林孝子傳(息山續集 권6, 758자), 鄭孝子傳(訥隱集 권20, 1510자), 琴孝子傳(立齋遺稿 권19, 1075자), 孝子朴氏傳(雷淵集 권27, 658 자), 尹孝子傳(雷淵集 권27, 327자), 孝子吳後種傳(九思堂集 권8, 513자), 權孝子傳(霅橋集 권6, 593자), 洪孝子次奇傳(耳溪集 권18), 林孝子傳(樊巖集 권55, 162자), 鄭孝子傳(與猶堂全書 권17, 559자), 金孝子傳(洛下生集 권15, 808자), 孝子金應立傳(性潭集 권30, 752자), 吉孝子傳(淵泉集권20, 481자), 任孝子傳(梣溪遺稿 권5, 289자), 金孝子傳(竹石館遺集 책3, 554자), 孝子贈童蒙敎官金公傳(艮齋集前編續 권6, 340자), 金孝子傳(俛宇集 권165, 843자), 崔孝子傳(響山別集 권4, 515자)이다. 이 가운데 1,000자 미만의 작품이 23개 작품이고, 1,000자 이상의 작품이 세 작품이며, 2,000자 이상의 작품은 金孝子傳(芝村集 권25) 한 작품이다. 그런데 「金孝子傳」은 행장의 방식으로 효행뿐만 아니라 관력을 비롯한 생애 전반의 다양한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분량이 늘어난 것이다.】 이루어진 「양사룡전」은 양사룡이란 천민의 효행을 내용의 뼈대로 삼고, 거기에 양사룡이 실천한 선행, 부친 양흔동의 효행과 주인집에 대한 의리, 양사룡과 작가 이기발과의 대화와 교감, 남만국 이야기, 홍춘반의 효행 등 다양한 내용을 결합하고 있다. 이 점은 일반적인 효자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양사룡전」만의 특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장을 바꾸어 「양사룡전」이 지닌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살피기로 한다.
Ⅲ.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
1. 철학적 의론을 제시한 도입부
위에 제시한 것처럼 「양사룡전」은 크게 보면 도입-본사-결사의 삼단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 구성이 「양사룡전」의 독창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일반적인 효자전의 구성에 비추어 보면, 도입부를 둔 점은 드문 경우에 속한다【비교 대상 26편의 효자전 가운데 도입부를 둔 작품은 孝子傳(丈巖集 권26), 琴孝子傳(立齋遺稿 권19), 孝子吳後種傳(九思堂集 권8), 權孝子傳(霅橋集 권6), 孝子贈童蒙敎官金公傳(艮齋集前編續 권6) 5편이다.】. 일반적인 효자전에서 설정한 도입부는 대개 효의 중요성과 입전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금효자전(琴孝子傳)」의 경우를 예시한다.
효는 백행의 근원인데 효를 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마는 승냥이와 수달도 보본(報本)하고 까마귀는 반포(反哺)하는데 사람이 되어 부모께 효도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면 금수만도 못하게 된다. 효는 인간의 상행(常行)인 데도 성인께서 그것을 칭찬한 것은 뭇사람들을 권장하고 자식 된 자를 면려하고자 해서이다. (중략) 그러나 궁벽한 시골에서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을 갖춘 사람이 있음에도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는 자를 또한 어찌 이루다 헤아리겠는가? 우리 마을의 금공(琴公)같은 분이 또한 그러한 부류이다.
孝者百行之源也, 而行之者鮮矣. 孰非人之子也, 而豺獺報本, 慈烏反哺, 人而不知孝親之道, 曾禽獸之不若矣. 孝者人之常行也, 聖人稱之, 盖所以勵衆人而勉不肖也. …(中略)… 而竆閻僻巷之間, 雖或有至性純行之人, 而不能表見于世者, 又何可勝數哉? 若吾里琴公, 亦其類也. -『立齋遺稿』 권19 「琴孝子傳」
효도의 중요성을 제시한 뒤 그런 효행이 있음에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있어 자신이 금공(琴公)의 효행을 알리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효행의 포장과 권면이라는 효자전의 주제에 걸맞는 도입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양사룡전」의 도입부는 하늘과 사람에 대한 서귀의 사유로 시작된다.
막막한 것이 하늘이라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믿을 수 없다고들 하면서 반드시 공자께서 지위를 얻지 못한 일과 안연(顔淵)은 일찍 돌아간 반면 도척(盜跖)과 장교(莊蹻)가 수(壽)를 누린 일을 근거로 말을 만들어 하늘을 일체 막막하여 알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진실로 하늘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니 사람들이 미혹하다고 크게 배척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하늘은 이따금 또 막막하지 않지 않을 때도 있어서 재앙을 내려 무을(武乙)이 벼락에 맞아 죽고 복을 내려 장씨가 금을 얻었으니 어찌 하늘을 끝내 믿을 수 없다고만 하겠는가? 돌봐줌이 부족한 것을 막막한 것으로 돌리는 것이야 마땅하지만, 다만 하늘이 응대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漠漠者天, 人皆曰不可信, 必就孔子不得位、顔淵不得壽而得之者乃反跖、蹻也, 爲之辭, 一切置之漠漠而不悟, 固天所以自致者, 不可深斥人爲惑. 然天時又有不漠漠者, 其禍之而武乙震死, 福之而張氏得金, 豈天終不可信? 而宜歸之漠漠然不足恤者, 特其酬酢不如人一一也. -『西歸遺藁4 권7 「양사룡전(梁四龍傳)」
전의 도입부에 철학적 의론을 제시한 것이 인상적인데, 이는 서귀의 글쓰기에서 자주 확인되는 독특한 면모이다. 가령, 「전주명륜당중수기(全州明倫堂重修記)」.(『서귀유고(西歸遺稿)』권6)에서도 “물과 밥은 하늘이요, 우물과 솥은 사람이다. 하늘은 홀로 하늘일 수 없고 반드시 사람을 기다린 후에 하늘일 수 있으며, 사람은 홀로 사람일 수 없고 반드시 하늘을 기다린 후에 사람일 수 있다.[水與食天也, 井與鼎人也. 天不得獨天, 必待人而後天也; 人不得獨人, 必待天而後人也]”라는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철학적 명제로 첫머리를 연 뒤, 명륜당 중수의 과정과 의의를 밝히는 내용을 이어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사기』 「백이열전」의 양상과 매우 흡사하다【「백이열전」을 보면 서두에 사마천 자신의 의론을 개진한 뒤, “太史公曰”로 다음 내용을 이어가는데, 「양사룡전」 또한 도입부에 이어 “無心子曰”로 다음을 이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서귀의 또 다른 전인 「송경운전」도 마찬가지 구성을 보인다.】.
서귀가 도입부에 제시한 의론은 작품 전체를 통관하는 핵심적 사유이다. 서귀는 먼저 하늘을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제시하였다. 사람들은 공자 같은 성인도 제대로 된 지위를 얻지 못한 채 여러 나라를 떠돌게 하고, 안연 같은 아성(亞聖)도 수를 누리지 못하게 한 반면 도척, 장교와 같은 악인은 오래 살게 한 하늘을 도대체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서귀는 하늘의 주재가 제대로 된 예를 들어 곧바로 이를 반박한다. 그런 다음 서귀는 정(正)과 반(反)에 대한 합(合)을 도출하는데 하늘의 주재는 신(信), 불신(不信)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다소 맥 빠진 합(合)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하늘의 응대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결론은 하늘의 정당한 주재를 받을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의 문제로 연결되면서 「양사룡전」의 본사를 이끌게 된다. 다시 말해 서귀는 도입부에 의론을 제시하고 입전인물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입증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리 하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도입부의 사유는 작품 말미의 논평 부분에서 다시 음미되면서 작품 전체의 주제를 형성하게 된다.
두 번째 도입부는 을유년(1645) 전주에 닥친 혹독한 가뭄 이야기로 시작된다.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아 전주 일대가 다 타들어 가는데 오히려 수원(水源)이 얕은 금암천만은 날로 물이 불어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금암천의 물을 끌어다 농사에 쓸 수 있었던 전주 서북쪽 백성들은 근심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전주 사람들이 혹독한 가뭄에도 유리걸식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유리걸식을 면하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떤 한 사람으로 인해 이런 기이한 일이 생겼다는 말을 전하였다[歲乙酉, 天大旱, 湖南特甚, 湖之完爲尤甚. 自春徂夏, 無一雨, 完一境, 無燥濕皆焦. 完之水有四, 而其源之最淺短者, 完之南上流綿巖之川也, 餘三川長且大, 而其渴且久焉, 則其源之淺短者, 宜若可知矣. 而綿巖之水獨日滋, 民引而灌之, 西北至五十有餘里, 民不憂, 而禾長畞, 農夫大悅. 完人得免流離, 人皆傳上流有一人.(같은 글)]. 두 번째 도입부는 사람들의 전언 형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양사룡전」의 본사, 곧 양사룡의 효 이야기로 이어진다.
2. 중복 구성을 통한 주제의 심화와 특징적 인간상의 강조
「양사룡전」의 본사1은 전주사람이 전하는 이야기를 소개한 내용이고 본사2는 서귀가 양사룡을 직접 만나 대화한 내용이다. 그런 까닭에 「양사룡전」은 양사룡의 효행과 선행에 관한 내용이 본사1과 본사2에 중복되어 제시된다. 비슷한 내용을 중복하여 기술하는 것은 서사 전개에 있어 다소 효율적이지 못한 구성이다. 그렇다면 서귀는 무슨 이유로 이러한 구성방식을 택한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부분을 살피기로 한다.
그 모친의 나이가 70여 세였는데 갑신년(1644) 가을 그 모친이 병에 들어 거의 소생할 수 없을 듯하였다. 그 사람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드렸는데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이시여! 우리 어머니의 병이 심해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하늘이 정녕 내 어머니를 취하시려는 것입니까? 내 나이 한창이고 많이 남았으니 필시 하늘을 섬기는 것은 어머니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늘이시여! 청하옵건대 나를 어머니 대신 데려가소서”라고 하였다. 이처럼 눈물을 뿌린 지가 열흘이 되었는데 그 모친이 이레 만에 소행하여 일어났다. 그 사람은 “이것은 하늘이 내 어머니를 보살펴주신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나의 정성을 다하지 않고 내가 어찌 내 몸 수고로운 것을 마다하여 하늘을 섬김을 소홀히 하겠는가? 하늘은 하민(下民)을 길러주시니 진실로 내 행위가 조금이라도 남을 기쁘게 할 것이 있다면 하늘은 반드시 섬김을 받아주실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남에게 은혜를 베풀 돈과 재물이 없고, 내게는 남에게 혜택을 줄 작위도 없으니 나는 다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리라”라고 하였다【其母年七十有餘, 甲申秋, 其母有疾病, 幾不甦. 其人日夜禱天, 繼以血泣曰: “天乎! 我母病極, 勢不可活, 天寧有必取我母者? 我年壯且不嗇, 必能事天愈於母. 天乎! 請以我代母.” 如是而雪涕焉者至旬日, 其母凡七甦乃起. 其人曰: “是天所以顧我母者. 我其敢不殫我誠, 我其敢不勞我身, 以享天一分乎? 夫天字下民, 苟我所爲一分有悅於人者, 天未必不我享也. 而我無錢財可以惠於人, 我無爵位可以澤於人, 則我但當爲所當爲.”(같은 글)】.
인용한 부분은 전주사람들의 전언이다. 칠십 노모가 소생할 기미가 없자 양사룡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기도하였다. ‘늙은 어머니 대신 나를 데려가 달라’고.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한 지 열흘이 되자 기적처럼 노모가 소생하게 되었다. 하늘의 보살핌으로 노모가 소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양사룡은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돈도 없고 작위도 없지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겠다[當爲所當爲]’는 다짐을 하였다. 이 내용은 본사2에서 서귀와 양사룡과의 대화【「양사룡전」의 구성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징으로 양사룡에 관한 인물정보를 전의 중반에야 드러낸 점을 들 수 있다. 입전 인물의 대략적인 인적사항을 필두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전의 일반적인 구성과는 달리 이기발은 사람들이 전하는 효행과 선행을 미지의 인물 상태로 서술한 뒤 자신이 직접 확인한 양사룡의 인적사항과 사람됨을 나중에 기술하는 서술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이야기의 신빙성을 높이는 한편 입전 인물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아울러 양사룡 자신의 말을 통해 주제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일종의 전환점 역할도 한다.】를 통해 다시 한 번 강조 된다.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 어머니의 나이는 77세입니다. 작년 9월에 불행히도 어머니의 병이 심해지자 마을사람들이 불편해하며 저더러 늙은 어머니를 산중에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조리를 할 수 없어 어머니의 병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데 자식 된 정리에 마땅히 어떠했겠습니까? 다행히 하늘이 돌봐주신 덕에 제 어머니께서 살아났고 우리 모자가 다시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 마음도 스스로 의아하였으니 황홀하기 그지없어 누가 이런 복을 내게 내려주었으며 내가 어떻게 이런 복을 얻게 되었나 싶었습니다. 마음이 즐거워 거리낄 것이 없었으니 두텁고 큰 오악(五岳)을 뚫게 하더라도 스스로 두텁고 큰 줄 모를 정도였고, 넓고 깊은 사해를 뛰어넘게 하더라도 스스로 넓고 깊은 줄 모를 정도였으며 까마득한 구만리 하늘에 오르게 하더라도 스스로 구만리인 줄 모를 정도였습니다. 이런 것은 오히려 그때 제 기쁨의 만분지일도 형용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나 저는 천한 사람이라 하늘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다만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곧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와 같으니 사람 가운데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고 그것을 보답하는 자식이 있다면 아버지가 반드시 기뻐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무릇 천자의 재상이 된 자는 천하의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고, 제후왕의 재상이 된 자는 일국의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고, 백리의 땅에 수령이 된 자는 한 지역의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천한 사람이라 많은 재물을 가지고서 어려운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나의 가난이 심해서 할 수 없다면서 혹여 사람을 이롭게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버지께 은혜만 입고 보답하지 않는 자식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오이밭을 가꾸어 행인들의 갈증을 한번 풀어주는 것이 비록 사람을 이롭게 할 수는 없더라도 그만두는 것보다는 나은 점이 또한 있습니다. 나는 이 때문에 내 힘을 다하고 내 정성을 드리는 것을 마다 않고 그것을 하였습니다. 반드시 이처럼 한 까닭은 나는 사람을 하늘의 자식으로 여겨서 하늘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을 얻고자 해서였습니다.
自言: “我母年七十有七. 往年九月, 不幸母患厲, 里人不便, 使我以老母投林中. 不得調養, 母病日臻, 人子之情, 當如何矣? 幸賴天恤, 我母活之, 使我母子復得相依. 當是時, 我心亦自疑, 芒乎芴乎, 恍乎忽乎, 誰賜此我, 我何以得此, 快乎心而無所碍也, 雖使穿五岳之厚且重焉, 而不自覺其厚且重也; 使超四海之廣且深焉, 而不自覺其廣且深也; 使上九萬之蒼蒼焉, 而不自覺其九萬也. 此猶不足以形容我之樂之萬一也. 而我賤人也, 不知所以報乎天者. 自以天之於人, 卽父之於子也, 人有惠於父而報之子者, 父未必不喜. 夫爲天子輔相者, 利天下之人; 爲侯王輔相者, 利一國之人; 爲牧守於百里之地者, 利一境之人. 今我賤人也, 不可得有財巨萬, 可以利竆人. 今我貧甚不可得, 未或有可以利人者, 則是徒惠於父, 而亦不得報之子也. 如此其可乎? 治瓜田, 一解行人之渴, 雖不得以利人, 而其賢於已則亦有之. 我是以不辭竭我力致我誠而爲之, 所以必如此者, 我以人爲天之子, 而欲得天之喜其利之也. 我母性好飮, 我日必有三椀, 恨母獨飮孤寂. 有曰洪春盤、曰裵小男․李受福․李沒內、曰某某若干人, 皆有老母善飮, 而與我同鄰居者, 與之脩稧, 名曰養親. 每旬間五日一會, 各以齒坐輪辦, 可嘗羞以供, 使酬酢酒酣. 我以若干人, 必列侍歌, 仍並起舞, 盡歡而罷, 母頗慰悅”云, 仍流涕而言曰: “噫! 人子愛親之心, 亦有存亡之異. 方我父初亡時, 我心甚哀, 若不可堪, 若不得一刻可忘也. 旣日月而小異, 朞而漸異, 三年而又大異, 今纔二十年矣, 而或並日不思父, 雖思之, 其心之悲, 亦不如初亡時也. 不幸使我母不救, 其漸忘亦奚異父也? 我思至此, 自不覺煎然, 其容蹙蹙如也.”
인용문을 보면 서귀가 중복의 구성을 취한 이유를 감지할 수 있다. 인용문의 내용은 앞서 본 전주사람들의 전언과 비슷한 취지이지만, 병든 노모를 산 중에 버리라 권하는 이웃들의 몰인정함이 부가되어 있고, 어머니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하늘에 보답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 더욱 상세하게 서술되었다. 이 가운데 더욱 특기된 것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양사룡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길러주는 은혜만 받고 자신의 형편을 핑계 삼아 보은하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에서 앞서 본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겠다[當爲所當爲]’는 양사룡의 다짐이 한층 심화된 인식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하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양사룡의 생각은 도입부에 제시되었던 철학적 의론과 맞닿아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양사룡전」이 취한 중복의 구성은 양사룡의 효행을 강조하고, 그것을 통해 입전자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곧 주제를 심화시키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사룡전」이 심화시키고자 한 주제는 무엇일까? 여기서 주 목해야 할 것이 효행만큼이나 강조되어 있는 선행이다.
이에 그 아내와 함께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동짓달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골짝 어귀의 큰길가에 묵정밭 수십 이랑을 개간하였다. 호남 서도 수십 고을의 사람 들 가운데 영남으로 오가는 자와 동도 수십 고을 및 영남인 가운데 호남 서도로 오가는 자들이 모두 이 길을 경유해서 지나는 사람이 하루에 수십 수백이 될 정도였다. 길 동쪽에 큰 고개가 있는데 돌 비탈이 몹시 구불거리는 것이 험난하기 그지없는 촉도(蜀道)에 뒤지지 않아 행인들이 그 길 가는 것을 매우 우려하였는데, 밭은 그 고개 밑에서 약 3리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곧 밭 가운데 초 막 한 칸을 짓고 그 아내와 함께 부지런히 오이를 심고 땅을 북돋았으며 전처럼 재계하고 변함없이 제사를 지냈다. 그때 가뭄이 그치지 않아 오이가 말라죽을 판이었는데 홀연 구름 기운이 나타나 그 초막을 감싸더니 이윽고 비가 크게 내렸다. 이와 같은 일이 열흘이면 꼭 두세 번 있게 되자 초막에서 약간 떨어진 이웃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신이한 일로 여겼다. …(중략)… 이에 오이가 지극히 잘 자라나 그저 주렁주렁 달린 정도에 그치지 않았으니 오이 수확은 남보다 열흘에서 한 달 이상 빨랐고, 오이 생산도 계속되어 그 면적으로 따져보면 소출이 열배 백배나 되었다. 이에 계곡물을 이용해 차가운 샘을 만들고 매일 아침이면 오이 백 개, 천 개를 따서 물에 담갔다. 그리고 큰 대야 하나를 길 가운데 두고는 멀리 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사람 수보다 몇 곱절 많게 오이를 가져다 소쿠리에 담아 두었다. 그리고는 사람이 당도하면 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릎을 꿇고 오이를 바치면서 맛볼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던 자들은 모두 험한 고개를 힘겹게 넘느라 갈증이 심할 때라 손쉽게 먹으면서 맛나게 먹었다. 또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던 자들은 하늘을 찌르는 돌길을 올려다 보며 타는 듯한 무더위를 모두 심히 걱정했기 때문에 반드시 오이 하나를 먼저 먹어 열기를 씻어내고 또 남은 길을 위해 반드시 두세 개를 챙겼다. 그 길을 경유하던 자들은 반드시 이 일을 전하여 훌륭한 일로 삼았고 이에 이 일은 더욱 널리 전해지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於是, 與其妻一心齋肅, 自至月至明年春二月, 乃於峽口大路傍, 闢荒田數十頃. 盖湖南西道十數州郡人來往嶺南道者及東道十數州郡及嶺南人來往湖南西道者, 皆由是路, 行人日可數十百人. 其東有大峙, 石坂九折不下蜀路崟崎, 行人甚憂之, 田去峙底約可數三里. 其人乃於田中, 立草幕一間, 與其妻種瓜培埴甚勤, 其齋肅如舊, 常如承祭. 時天旱不已, 瓜逼枯, 忽有雲氣繞其幕, 俄頃雨大作. 如是者必旬有二三, 鄰其幕若干里, 里人咸異之. …(中略)… 於是瓜極茂, 不但唪唪已也, 瓜之食先於人旬朔, 而瓜之作不竆, 校其地, 其出可什百. 於是作澗流爲洌泉, 以每日朝, 摘瓜千百數, 沉之水, 置一大盤路中, 望見人來, 必以人數取瓜倍蓰, 置盤上, 及人到, 不卞老少尊卑, 特跪獻請嘗. 其東而西者皆艱度險嶺, 方其渴急時, 易爲食而食之甘; 西而東者仰見石路參天, 赫炎如焚, 皆憂甚, 必先食其一以滌熱, 又必取二三爲後地, 由其路者, 必傳爲勝事. 於是其傳益廣, 而人皆悅其人.
인용한 부분은 본사1에 해당하는 전주사람들의 전언으로,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겠다[當爲所當爲]’고 다짐한 대목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이다. 오이를 정성껏 가꾸어 험한 고개를 오가는 행인들에게 오이를 나누어준 행위와 그것에 감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흥미롭게 서술되 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주목되는 것은 오이를 가꾸어 선행을 베푸는 내용을 서술하기 위해 할애한 분량이다. 기도를 통해 노모를 소생시키고 하늘 에 보답할 것을 다짐하는 부분이 원문으로 165자 분량인데 비해, 위에 제시한 선행 부분은 414자로 곱절 이상이다. 이는 「양사룡전」이 양사룡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단순한 효자 이야기에 그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전의 구성이 하늘에 지성으로 기도하여 다 죽어가던 모친을 소생시킨 효행보다 양사룡이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실천한 선행에 작가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양사룡전」은 효자 이야기인 동시에 남을 도운 선량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곧 서귀가 입전한 양사룡이란 인물은 효행을 바탕으로 선행에까지 나아간 인간이며, 서귀는 양사룡을 통해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보다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상을 제시하기 위해 서귀는 하늘과 사람간의 근원적인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서귀는 이러한 방식으로 「양사룡전」의 주제를 단순한 ‘효행의 권면’을 넘어 보다 포괄적이고 본원적인 차원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3. 다양한 삽화를 활용한 주제의 확장
흔동 삽화
「양사룡전」은 양사룡전의 효행과 선행에 더해 여러 삽화를 추가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결부된 삽화로는 양사룡의 부친인 양흔동의 주인 섬김 이야기, 양사룡이 자식을 잃은 서귀를 위로하기 위해 해준 남만국 이야기, 그리고 작품 말미에 붙인 춘반의 효행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점 또한 일반 효자전에 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에 삽화가 지닌 의미와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부친 양흔동의 이야기는 양사룡이 양친계를 조직하여 노모를 봉양한 행 위를 말한 뒤, 그때의 심경을 서귀에게 말한 대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 다. 양사룡은 부친이 돌아가신 뒤 부친에 대한 자신의 그리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소홀해짐을 느꼈다. 그러면서 모친이 이번에 돌아가셨다면 역시나 차츰 어머니를 잊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친계를 조직하여 살아계시는 동안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림으로써 풍수지탄의 후회가 없기를 바랐다【이어 눈물을 흘리며 “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에 또한 살고 죽고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막 돌아가셨을 때는 제 마음이 너무 슬퍼서 견딜 수 없을 같고, 잠시라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바뀌면서 조금씩 달라지더니 1년이 지나서는 더 달라지고 3년이 지나서는 또 더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제 막 20년이 되니 이틀 동안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기도 하고 생각하더라도 그 마음의 슬픔이 또 처음 돌아가셨을 때와 같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제 어머니께서 구원받지 못하셨다면 점차 어머니를 잊어감이 어찌 아버지와 달랐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을 졸이고 그 모양새가 위축되고 불안해집니다.”라고 하였다.[仍流涕而言曰: “噫! 人子愛親之心, 亦有存亡之異. 方我父初亡時, 我心甚哀, 若不可堪, 若不得一刻可忘也. 旣日月而小異, 朞而漸異, 三年而又大異, 今纔二十年矣, 而或並日不思父, 雖思之, 其心之悲, 亦不如初亡時也. 不幸使我母不救, 其漸忘亦奚異父也? 我思至此, 自不覺煎然, 其容蹙蹙如也.”]】. 양사룡이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밝히며 눈물을 흘리자 서귀는 자연스럽게 그의 부친에 관한 일을 묻게 되었다.
가계를 물으니 흔동(欣同)이 그 아버지라 하였다. 흔동은 일찍이 아버지 섬김이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죽자 남은 신발을 흔동은 대바구니 속에 넣어두고 일 년에 한 냥씩 대바구니에 넣으면서 “이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남기신 자취이다”라면서 언제고 한참을 울었다. 일찍이 주인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주인집 사람들이 모두 죽고 오직 한 아이만 쓸쓸하게 남게 되었다. 흔동은 곧 이 아이를 봉양하였는데 주인으로 존대하고 골육으로 사랑하였다. 이때 왜란이 나자 흔동은 장차 왜구를 피하려 할 적에 그 처자식을 버리며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주인집은 오직 이 아이만 남아서 한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다”고 하고는 이내 등지고 떠났다. 다시 돌아와 서는 어진 스승에게 맡겨 가르침을 받게 하였고, 성인이 되자 서로 알맞은 사람을 찾아 중매를 놓아 배필로 삼아주었으며, 집을 짓고 살림을 마련하여 살게 해주었다. 얼마 안 있어 그 주인이 죽어 가실(家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흔동은 다시 그의 집으로 모셔 와서 봉양하기를 집이 없던 때와 같이 하였고 수고하기를 젊은 종처럼 하여 그렇게 몇 년 동안 또 마음과 힘을 썼다. 또 가정을 이루게 하고 입고 먹는 온갖 것을 모두 지극하게 하자 얼마 안 있어 가업(家業)이 조금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수십 년 뒤에, 그 주인이 죽어 장사를 지내려 할 적에 그 지간(支干)이 흔동을 꺼려하였다. 사룡은 장례에 참여하지 말 것을 청하며 “내가 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흔동은 거절하며 “내 나이 이제 칠십 남짓이니 죽어도 유감이 없고 또 내 평생 내 주인을 저버린 적 없었는데 내 주인이 땅에 들어가는 날에 유독 저버릴 수 있겠느냐? 미혹되고 어두운 말로 누가 나를 어지럽히려 하느냐?”라 하고는 즉시 가서 널을 호송하고 서글프게 곡하였는데 이 때문에 병이 생겨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問其系, 欣同其父也. 欣同嘗事父孝, 父歿有遺履, 欣同藏之籠中, 一年一兩納之曰“此亡父遺跡”, 必流涕移時. 嘗有主, 不幸主家俱亡, 獨有一兒伶仃. 欣同乃奉養, 尊之以主家, 愛之以骨肉. 時有倭亂, 欣同將避寇, 舍其妻子曰: “更可得也. 主家獨有此, 一失不可更得.” 乃負行. 旣還, 託賢師受文字, 使爲成人, 得相敵通媒爲配, 乃立屋營產, 使之安頓. 未幾其主喪, 家室無所依歸. 欣同又奉置其家, 養之如未有家時, 服勞若小蒼頭然, 旣數年, 又費心力, 又使有室家, 服食若凡百之爲, 無不致其極者, 未幾家業稍成. 後數十餘年, 其主死將葬, 其支干妨欣同. 四龍請勿會葬, 吾請自當. 欣同却之曰: “我今年七十有餘, 死無所憾, 且我生平未嘗負我主, 獨可負於我主入地之日耶? 迷昧之說, 誰我溷者?” 卽往扶櫬, 哭甚悲, 仍有疾不能起.
서귀는 양사룡에게 들은 바를 요약적으로 기술하였다. 내용의 대강은 노비였던 흔동이 홀로 남겨진 주인집 자식을 위해 실천했던 평생의 헌신과 의리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귀는 어떤 이유로 흔동의 일을 삽화로 활용하고 있는가? 이는 양사룡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보인 서귀의 반응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이에 무심자는 일어나 사룡에게 예를 표하고는 “자식이 그 어머니를 사랑하고, 노비가 그 주인을 사랑하니 이것은 변함없는 하늘의 이치이며 항상된 사람의 도리니 여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직 선생께서만 남다릅니다. 무릇 약한 것은 강해지고 궁한 것은 현달해지고 가난은 부유해지고 천함 은 귀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염치를 몰라라 하고 시비를 미루며 사생을 잊고서 오히려 샛길과 굽은 길을 또한 피하지 않으며 반드시 얻고자 하는 것은 벼슬입니다. 그러나 벼슬에 대해 또한 초탈하여 쳐다보지 않는 자도 모두 사람이니 이와 같은 자가 또한 있다면 마땅한 하늘의 이치와 떳떳한 사람의 도리인 자식이 그 부모를 사랑하고 그 주인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 희귀한 일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於是無心子起而禮之四龍, 曰: “子愛其母, 奴愛其主, 此天理之固也, 人道之常也, 何有於是? 而惟夫子之異之也. 夫弱可以強, 竆可以達, 貧可以富, 賤可以貴矣. 而人皆冒廉恥後是非忘死生, 而猶傍蹊曲徑之且不避而必欲得之者, 是爵祿也, 而於此亦有脫然而莫之顧者, 均是人也, 而如此者亦有之, 則夫何貴乎天理之固、人道之常之子愛其親、奴愛其主者?”
천민인 양사룡에게 예를 표하고 ‘선생님’이라고 부른 데서 서귀가 받은 감화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사회 구조가 달라진 지금이라 일견 수용하기 곤란한 가치관이 게재되어 있으나 이는 시대의 한계라 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서귀가 부모 사랑과 주인 섬김을 어떤 관점에서 사유하고 있는가이다. 서귀는 양사룡과 양흔동이 특별한 이유를 ‘천리지고(天理之固)’와 ‘인도지상(人道之常)’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부모에 대한 효와 주인에 대한 의리는 변함없는 하늘의 이치이자 사람의 도리인 까닭에 누구나 어렵지 않게 실천해야 마땅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늘[天理]과 인간[人道]을 매개해주는 그 마땅함을 모른 체하며 벼슬로 대변되는 자신의 이욕(利慾)만을 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마땅한 일이 특별하고 희귀한 일이 되었다고 하였다. 곧 양사룡과 양흔동은 뭇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의 이욕을 버리고 하늘이 품부해준 이치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하늘과 사람의 관계가 언급되는데, 서귀는 하늘과 사람 사이의 마땅한 관계를 왜곡시키는 것은 곧 사람의 욕심 때문이라 진단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양흔동의 삽화는 「양사룡전」 전체 이야기 속에서 효행의 문제로부터 선행, 의리의 문제로 가치를 확장시켜 나가는 동시에 그것들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근본 문제, 곧 ‘천리지고(天理之固)’와 ‘인도지상(人道之常)’을 실천하는 문제로 초점을 맞추어가는 역할을 한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대목에서 서귀가 마땅함의 가치를 기준으로 천민 양사룡과 진정한 교감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남만국 삽화
두 번째 삽화는 이와 같은 진정한 교감 위에 펼쳐진다. 서귀는 양사룡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즈음 세상을 떠난 자식을 떠올렸고 이내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러자 양사룡은 서귀를 위로해주려 남만국(南蠻國)에 전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때 무심자는 자식을 잃은 아픔이 있어 말을 나누는 사이에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되었다. 사룡은 이내 웃으며 나아와, “남만(南蠻)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생업이 조금 풍족해지자 나이 마흔에 비로소 외아들을 얻었답니다. 그 아들은 얼굴이 잘생기고 재주와 학식이 더없이 빼어나 모두들 한번 사귀기를 원할 정도였는데 약관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 부모가 몹시 슬퍼했답니다. 그 나라의 풍속에 바다 남쪽 끝에 한 도사가 있어 도사들을 관장하는데 새로 죽은 자는 반드시 도사에게 들러 도사가 머리를 끄덕인 뒤에야 명부로 돌아갈 수 있었답니다. 혹 도사에게 사정이 생기면 그 문에 열흘을 머무는 일도 있었답니다. 부부는 재계하고 급히 도사의 집으로 갔더니 그 아들 이름으로 방문이 벌써 있었더랍니다. 도사가 「저녁때 과연 왔었는데 내가 마침 마음이 번거로워 답을 할 수 없었다. 내일 일찍 다시 올 터이니 보고 싶으면 내 집에 머물러라. 내가 보게 해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과연 찾아오니 도사가 「그가 곧 올 것이니 그대는 우선 방안에 숨거라.」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도사를 찾아오자 부부는 문틈으로 엿보았는데 그 모습이 아주 추하고 또 두려워 똑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부부는 의아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도사가 부부가 했던 말로 말해주자 그 아들은 발끈하며 「내가 어찌 부부의 자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부부는 전생에 어느 뱃사람을 무고하게 죽이고 아울러 그의 재물을 취하여 그 때문에 현생의 부부가 되었으니 나는 무고하게 죽은 뱃사람의 자식입니다. 하늘이 부부의 무고한 살인과 도적질을 한스러워하고 내 아비의 원통한 죽음을 불쌍히 여겨 저더러 칼을 쓰지 않고 창자를 베는 방법으로 복수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본래 몸에 칼을 쓰는 것보다 더 참혹한 것으로는 늘그막에 얻은 어여쁜 자식을 갑자기 잃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나를 그들의 자식이 되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켰다가 갑자기 다시 빼앗아 그들의 창자를 찢고자 하였으니 내 어찌 부부의 자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재빨리 떠나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부부는 그 말을 듣고는 곧 눈물을 거두고 더는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時無心子有喪明之痛, 語次有淚潸然. 四龍乃笑而進曰: ‘南蠻之諺曰: 「古有夫婦, 貲業稍豐, 年四十始得一子, 其容端, 其才學絶倫, 人無不願與一交, 年弱冠猝逝, 其父母甚悼. 其國俗海極南, 有一道士管道流, 新逝者必過道士, 道士點頭, 然後歸冥府, 或道士有故, 則至有留其門旬日者. 夫婦齋宿, 急往道士家, 以其子名訪已過. 道士曰: 『日夕果來, 以我適心煩, 不能答. 明早必更來, 子欲見留我. 我使見之.』 明日果來, 道士曰: 『彼方來, 子姑隱室中.』 已而來謁道士, 夫婦從門隙覘, 其狀貌甚麤, 且威嚴不可直視. 夫婦方疑訝, 莫得端倪. 道士以夫婦言言之, 其子乃艴然曰: 『我安得爲夫婦子也? 夫婦前時, 枉殺一船夫, 並取其資, 仍爲此世夫婦, 我則船夫子也. 天恨夫婦枉殺人取資, 憐我父寃死, 欲令復其讎, 以不加刃其身而其腸之割, 自有慘於刃其身者莫如臨老得美子而旋失之, 特使我爲其子, 以足其心, 旋又奪之, 以割其腸而已, 我安得爲夫婦子也?』 乃倐然而逝, 更無所見. 夫婦聞其語也, 卽收淚不復思其子.」
양사룡은 이 이야기를 전하며 “그래서 자식 가운데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를 사람들이 반드시 ‘이는 곧 전생의 원수다’라며 그 부모를 위로하니 그 말이 이 이야기에서 나왔습니다. 선생께서는 상심하지 마십시오. 선생께서 상심하는 것은 태부인께서 상심하는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상심하지 마십 시오[故子之凡先父母亡者, 人必慰其父母曰「此乃前生讎也」, 語盖出此. 夫子其毋傷也. 夫子而傷者, 太夫人之傷也. 夫子其毋傷也. -李起浡, 『西歸遺稿』 권7, 「梁四龍傳」.].”라고 서귀를 위로하였다. 그러자 서귀는 “그와 더불어 종일토록 이야기해보니 말이 반드시 근거가 있었고 이치를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며 양사룡과의 깊어진 교감을 증언하였다.
두 번째 삽화는 하늘이 준 마땅한 이치를 매개로 두 사람이 깊은 교감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이 교감은 신분의 차이마저 극복한 것으로서 확대하여 의미를 부여해본다면 두 사람의 교감은 마땅한 도리를 실천하는 두 사람 간의 연대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일체의 출사를 단념한 서귀와 하늘에 보은하기 위해 오이를 심었던 양사룡의 행위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한다’는 가치에서 서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서귀는 논평 부분에서 “그렇다면 무심자가 사룡을 얻고 사룡이 무심자를 얻은 것이 또한 기다림이 있음에 가깝다 할 것이다[則無心子之得四龍、四龍之得無心子, 其亦近於有待者矣].”【이 부분은 사마천의 열전이 지닌 한계점을 비판하고 사마천 당시에 양사룡이 살았더라도 열전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라며 양사룡이 서귀를 만남으로 인해 입전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서귀가 양사룡을 얻은”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서귀가 양사룡을 얻었다고 한 부분은 바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한다’는 가치의 교감, 연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홍춘반 삽화
세 번째 삽화는 논평 뒤에 부기된 홍춘반의 효행이다. 일반적인 전이라면 논평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양사룡전」은 글의 말미에 양사룡과 양친계를 운영했던 홍춘반의 효행을 부기(附記)하고 있다.
춘반이 그 어머니를 섬긴 것도 지극히 효성스럽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고 이듬해가 되어 소상(小祥)이 한 달 남았는데 그의 아내가 전과 같이 밥을 올리자 춘반이 문득 물리치며 “작년 이때 어머니께 밥을 올렸는가?”하고는 미음으로 바꾸어 소상일이 지난 뒤에야 그만두었고 재기(再朞) 때도 그렇게 하였다. 어머니 생전에는 춘반이 나가면 어머니가 늘 문에 기대어 기다렸는데 춘반은 돌아올 때 반드시 멀리서부터 춤을 추어 어머니께 잘 다녀왔음을 보였다고 한다.
春盤事其母至孝. 母宿病以歿, 越翌年未及祥一月, 其妻進食如故, 春盤輒却之曰“上年此時, 母其進飯乎”, 以粥飮, 至祥日過後乃已, 至再朞亦然. 母未歿, 春盤每出, 母常倚閭, 春盤還必自遠舞, 以示母好歸.
홍춘반의 효행은 두 가지로 제시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어머니 상을 당한 뒤에도 생전처럼 모시고자 했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는 어머니 생전에 홍춘반이 출타를 하고 나면 문에 기대어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 멀리서부터 춤을 추면서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부기된 홍춘반의 효행은 일관된 서사 전개로만 보자면 일종의 군더더기와 같아 서사의 정연한 맺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홍춘반의 효행, 특히 어머니를 위해 멀리서부터 춤을 추며 오는 모습은 흐뭇한 감동을 선사하며 공감을 유도하는 장치로 기능하여 글의 심미적 종료를 유도하는 면도 있다. 또한 이 삽화는 양사룡, 양흔동, 그리고 홍춘반에 이르는 마땅한 도리를 실천하는 인물들의 확대 양상을 점증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이상에서 본고는 「양사룡전」에서 확인되는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중복 구성을 통해 주제를 심화하고, 다양한 삽화를 활용하여 주제를 확장하는 독특한 서사 구성, 그리고 도입부부터 논평까지 일관하는 하늘과 사람에 관한 철학적 사유 등은 일반 효자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었다. 또 이와 같은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토대로 「양사룡전」은 단순한 효자 이야기를 넘어서 양사룡이란 인물을 통해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을 확인하고 증명해내는 이야기임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양사룡전」이 궁극적으로 제시한 이상적인 인간상은 사리사 욕을 버리고 하늘이 품부해준 마땅한 이치를 마땅하게 실천하는 인간임도 추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서귀는 어떤 생각에서 이처럼 독특한 효자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이에 본고는 장을 바꾸어 「양사룡전」의 입전을 추동한 작가정신을 살피기로 한다. 이기발의 정신적 지향이 중요한 것은 입전인물의 선택이나 서술방향, 그리고 서술태 도는 전적으로 작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박희병, 「조선후기 예술가의 문학적 초상 : 藝人傳의 연구」, 대동문화연구 제24집, 1990, 106면.】.
Ⅳ. 서귀 이기발의 의리 정신과 「양사룡전」의 입전 의식
의리 정신의 표출양상
서귀 이기발은 서두에 잠깐 언급하였듯, 철저한 대명의리론자였다. 이기 발이 의리를 앞세워 평생 동안 고집스러울 만큼 출사를 거부한 것은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를 청나라가 멸망시켰는데 원수에게 복수는 못할망정 청 나라의 배신(陪臣) 노릇은 절대 할 수 없다는 의식 때문이었다【그러나 명이라는 대상은 이기발의 의리 정신에 있어 우연적 대상에 불과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이 의리요, 보은은 못할망정 배신을 한다는 것은 지극한 불의가 되니 차마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이기발은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면 비록 성현의 일이라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 강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다음 글에 잘 드러난다. “아! 지금 명나라를 섬기던 예를 북인들에게 옮겼습니다. 아! 어떻게 성현을 취하여 그 일을 행하는 것으로 하늘의 이치에 합하고 인정을 순응시키겠습니까? 진실로 어긋나고 뒤집어졌다면 비록 성현의 일이라도 나는 또한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자식이 어찌 그 노모를 봉양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噫! 乃今移其禮於北人耶? 噫! 何以取聖賢焉, 以其行事, 合於天理而順乎人情也? 苟違焉逆焉, 雖聖賢之事, 吾且不取. 噫! 人子豈不欲養其老母耶?)”(『西歸遺稿4 권8 「湖南伯問答」)】. 이런 의식의 소유자였던 까닭에 그의 『서귀유고(西歸遺稿)』를 일람하노라면 문집 전체를 통관하는 강렬한 의리 정신을 만날 수 있는데, 서귀의 의리 정신은 ‘마땅함’을 기준으로 몇 가지 양상으로 표출된다.
첫째는 ‘어찌 차마[那忍]’인데, 이것은 부당한 일에 대해 ‘어찌 차마 그런 일을 하랴[那忍]’【부당한 일에 대한 ‘나인(那忍)’의 자세는 출사를 권유하기 위해 찾아온 전라관찰사 이시모(李時模)와의 문답을 기록한 「호남백문답(湖南伯問答)」(『서귀유고(西歸遺稿)』 권8)에 잘 나타나 있다. 가령, “명나라의 국운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국가는 차마 명나라를 섬기던 자로서 오랑캐를 섬기면서 편안히 거리끼는 바가 없고 아무 일 없듯 수치로 여기지 않으니 인륜이 모두 사라지고 하늘의 이치가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지사들이 바다로 뛰어들고 산중으로 들어가기에도 급급한 일인데 어찌 차마 봉록과 출사를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大明曆服, 不知時在何處, 國家忍以事大明者事虜, 晏無所忌, 恬不爲恥, 人倫掃地, 天理泯滅. 此固志士蹈海入山之不暇, 可忍言祿仕耶?]”, “임진년에 내 부친은 나이 14세였고 모친은 15세였습니다. 만일 명나라 병사들이 와서 왜적을 무찌르지 않았다면 우리 부친과 모친은 목숨을 온전히 하여 나를 낳고 기를 수 있었겠습니까? 명나라가 내 부모님을 살려주었는데 내가 곧 명나라를 멸망시킨 추악한 오랑캐 에게 陪臣 노릇을 하면서 남은 재물을 공략하는 것을 돕는 것으로써 내 모친을 봉양한다면, 비록 사람들이 나를 책망하지 않더라도 내 어찌 신명께 얼굴을 들며,, 내 어찌 상제께 얼굴을 들겠습니까?[在壬辰, 吾父年十四, 母年十五, 使無大明之兵來鏖賊者, 吾父母能保此全生, 以生我長我乎? 大明活我父母, 我乃爲陪臣於滅大明之醜虜, 得助攻餘財, 以養我母, 人雖不我咎, 我何顔神明, 我何顔上帝乎?]” 등이 ‘어찌 차마’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로 언명된다. 차마 배은망덕의 불의를 행할 수 없어 은거를 선택한 서귀였기에 선악과 시비, 출처의 기점에서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은 절로 의리를 택할 수밖에 없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둘째는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마땅히 하라[當爲所當, 當爲所能]’【‘당위소당(當爲所當)’과 ‘당위소능(當爲所能)’의 자세는 본고의 고찰 대상인 「양사룡전」, 나머지 하나의 전인 「송경운전」, 그리고 「식미가병서(食薇歌並序)」(『서귀유고(西歸遺稿)』 권1) 등에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차마 어찌 그런 일을 하랴”가 서귀의 의리 실행에 직접적인 동인이 되긴 하였지만, 그것은 여전히 수동적인 측면이 있다. 반면 ‘당위소당(當爲所當)’과 ‘당위소능(當爲所能)’은 거기서 한 발 더 진전된 면모를 보여준다. 해서는 안 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간다면 ‘그것 말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능동적 실천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출되기 때문이다.
진아의식
마지막은 본고에서 제시한 ‘진아(盡我)’이다. ‘진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다음 글에서 확인된다.
대저 더없이 미약한 사람으로서 더없이 높고 두터운 하늘, 땅과 그 덕을 합하는 것은 성인이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사시(四時)를 차례대로 따르게 하고 음양을 법도대로 조절하는 것은 훌륭한 재상이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중략)… 일시의 절개로 만고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는 것은 의로운 선비라도 어렵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것은 모두 나에게 있어 내가 진실로 내게 있는 것을 다 한다면 나는 반드시 그 어려움을 어렵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 가운데 공자가 계시고, 훌륭한 재상 가운데 주공(周公)이 계시고, 훌륭한 장군 가운데 방숙(方叔)이 있고, 효자 가운데 증삼(曾參)이 있고, 의사(義士) 가운데 백이(伯夷)가 있으니 이 분들은 모두 ‘나를 다하신[盡我]’ 분들이다 공자 같은 성인께서도 과연 천지와 함께 그 덕을 합치하는 것을 어려워 하셨는가? 주공 같은 재상도 과연 사시를 순조롭게 하고 음양을 조절하는 것을 어려워 하셨는가? …(중략)… 백이의 절개로도 과연 만고의 강상을 부지하는 것을 어려워했는가? 비록 그러하나 세상에는 또한 나 아닌 것이 있으니 나 아닌 것은 남이다. 무릇 덕(德), 재(才), 성(誠), 절(節)은 진실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그것을 다하여 공자가 되실 수 있었고, 주공과 방숙은 그것을 다하여 주공과 방숙이 될 수 있었고, 증삼과 백이는 그것을 다하여 증삼과 백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이른바 때[時]라는 것은 남에게 있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끝내 지위를 얻지 못하셨고, …(중략)… 백이는 말고삐를 부여잡고 한 간언을 이룰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내게 있는 것은 비록 아주 어렵더라도 능한 자는 어렵다 여기지 않고, 남에게 있는 것은 비록 아주 쉽더라도 성인도 끝내 쉽게 할 수 없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내게 있는 것을 다 하지 않고서 남에게 먼저 구하는 것, 이는 우리의 공통된 걱정거리 아닌가?
夫以莫微之人身也, 而能與莫高厚之天地合其德, 爲聖人不其難矣乎. 居宰輔之位而能使四時順其序, 陰陽調其度, 爲良相不其難矣乎? …(中略)… 一時之節能扶萬古之綱常, 爲義士不其難矣乎? 雖然, 是皆在我, 我苟盡在我, 我未必不易其難. 是故, 聖人有孔子, 良相有周公, 良將有方叔, 孝子有曾參, 義士有伯夷, 是皆盡我者也. 孔子之聖, 果難與天地合其德乎. 周公之相, 果難順四時調陰陽乎. …(中略)… 伯夷之節, 果難扶萬古綱常乎. 雖然, 世亦有不我者, 不我, 人也. 夫德也才也誠也節也, 是固在我者, 故孔子能盡之而爲孔子, 周公․方叔能盡之而爲周公․方叔, 曾參․伯夷能盡之而爲曾參․伯夷. 若夫所謂時也者, 在人非在我, 故孔子終於不得位 …(中略)… 伯夷不能遂叩馬之諫. 是故, 在我者雖甚難, 能者不以爲難; 在人者雖甚易, 聖人亦終不能易之. 况凡人乎? 不盡其在我者, 而先求諸人, 此豈非吾人所通患者乎?(『西歸遺藁4 권5 「與松京留守李令書」)
인용문은 서귀가 개성유수 이시만(李時萬)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이다. 서귀는 ‘진아(盡我)’한 인물의 예로 성인 공자, 훌륭한 재상 주공, 훌륭한 장수 방숙, 효자 증삼, 의사(義士) 백이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각자 성현으로 추앙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있는 덕(德), 재(才), 성(誠), 절(節)을 모두 다 펼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편 서귀는 세상에는 ‘나’ 아닌 ‘남’이 있다고 하면서 그 예시로 ‘때[時]’를 들었다. 이 ‘때’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남’에게 있는 것은 제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바로 ‘남’의 것이기 때문에 ‘나’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 이하 여러 성현도 이루지 못한 바가 있었다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로 논의를 이끈다. 그것은 ‘나’에게 있는 것을 다 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있는 것을 다 하려 하지 않고 ‘남’에게 있는 것을 먼저 구하려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다. 그러니 남에게 있는 것을 구하려 하지 말고 내가 할 도리를 다 해야 한다고, 다시 말하면 ‘진아(盡我)’해야 한다고 서귀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의리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나’와 ‘때’이다. ‘나’는 의리 시행의 주체이다. 여기서의 ‘나’는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나’이다. ‘때’는 의리 시행의 외적 조건이다. 의리는 기본적으로 실천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실천의 상황의 동반하는데 그 상황이 곧 ‘때’이다. 의리는 이 ‘때’와 만나 ‘時宜’로서 구체화되는데, 그런 점에서 ‘때’는 의리의 실천에 있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귀의 경우를 놓고 보면 ‘나’는 불의한 ‘때’를 만났기 때문에 외재해 있는 ‘때’를 따를 수 없고 ‘나’에게 내재한 것을 따라야 했다. 그것이 서귀에게는 은거를 통한 ‘盡我’의 구현이었다.】.
그렇다면 서귀는 무엇을 통해 ‘진아(盡我)’를 실천하였을까?
堯舜君民計自深 | 요순의 임금 백성 계책 절로 심원한데 |
如何身世此山林 | 어째서 이 신세는 이 산림에 들어왔나? |
夷齊餓死非吾分 | 백이숙제 아사(餓死)한 건 내 분수가 아니요 |
靖節歸來得本心 | 도연명의 귀거래가 내 본심에 꼭 맞았네. |
俯仰百年無愧怍 | 평생을 돌아보며 부끄러움 짓지 말고 |
棲遲一壑任行吟 | 골짝에 거처하며 읊조리길 맘껏 하리. |
讀書不可要科目 | 독서는 과거 시험 바라서는 안 되니 |
須向彝倫仔細尋 | 모름지기 이륜(彛倫)을 자세히 살펴야지. 『西歸遺稿4 권4 「偶吟眎諸生」 |
이 작품은 출사를 단념한 뒤 전주에 은거하면서 가르치던 유생들에게 보인 시이다. 이 시에는 절의를 지키기 위해 서귀가 선택한 방법과 은거 이후 지향한 삶의 대개가 드러나 있다. 서귀는 함련에서 백이숙제의 아사(餓死)는 자신이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도연명의 귀거래가 자신에게 마땅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의 문집을 살펴보면, 가령 “정신없이 바쁜 행색 모두 생계 때문이니, 백이숙제 대현(大賢)임을 비로소 알겠노라[奔忙行色皆糊口, 始識夷齊是大賢. 『西歸遺稿4 권4 「秋夜雨中歸來有感」.]”나 “백이숙제 아니니 곡기는 못 끊겠고, 풍년들어 술잔에 술이나 그득 했으면[不作夷齊難却食, 年豐願得酒盈杯. 『西歸遺稿4 권4 「立春」.]”과 같이 자신과 백이숙제를 비교하며 자신은 백이숙제처럼 할 수 없음을 여러 차례 밝혔다. 백이숙제가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것은 서귀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귀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였는가? 경련에 제시된 부끄러움 없는 삶과 매임 없는 유유자적한 삶이 서귀가 은거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 던 삶이었다. 그리고 미련에서처럼 서귀는 출세를 위한 독서가 아닌 인륜을 깨우치는 독서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였다. 서귀는 이러한 자기 삶의 지향을 제자들에게 보임으로써 제자들을 참 공부의 길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처럼 출사를 단념한 서귀는 자신이 마땅히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하는 교육[학문]과 수양을 통해 자신이 할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다.
서귀가 제시한 ‘진아(盡我)’ 정신은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서귀 자신이 개념화한 독특한 용어이다. 맹자에 나온 ‘진기(盡己)’가 비슷할 수 있겠는데, ‘진기(盡己)’의 ‘기(己)’가 보편적 본성의 담지자로서의 측면이 강한【차미란, 「위기지학 : 성리학의 인성교육론」, 『도덕교육연구』 제30권 1호, 2018, 18면.】 반면, ‘진아(盡我)’는 인용문에서 공자-德, 주공-才, 증삼-誠, 백이-節으로 대칭시키며 각자가 가진 것을 다 할 때 공자가 공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 것처럼 개별 존재의 가능성에 중심이 실려 있는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서귀의 ‘진아(盡我)’는 앞서 제시된 의리의 두 가지 양상[那忍과 當爲]을 포괄하는 동시에 의리 시행의 주체로서 ‘나’를 명시함으로써 그 주체성과 개별적 가능성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서귀의 문집에서 일관되게 확인되는 의리의 양상이 「양사룡전」의 핵심적인 의사와 긴밀하게 조응된다는 점이다. 앞서 본 대로 양사룡이 “지금 나는 천한 사람이라 많은 재물을 가지고서 어려운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나의 가난이 심해서 할 수 없다면서 혹여 사람을 이롭게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버지께 은혜만 입고 보답하지 않는 자식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한 것은 배은(背恩)은 차마 할 수 없다는 ‘나인(那忍)’의 자세와 연결되고, “그런데 내게는 남에게 은혜를 베풀 돈과 재물이 없고, 내게는 남에게 혜택을 줄 작위도 없으니 나는 다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마땅히 하리라.”라고 다짐한 것은 ‘당위소당(當爲所當)’의 정신과 연결된다. 또 아내와 함께 묵정밭 수십 이랑을 개간하여 오이를 정성껏 가꾸고 험한 고개를 넘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오 이를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의 갈증을 풀어준 것은 하늘에 보은하기 위해 자신 이 할 도리를 마땅히 행하는 ‘진아(盡我)’의 실천으로 읽을 수 있다.
더욱이 「양사룡전」이 하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론을 도입부에 두고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그 관계를 강조하고 상기시켰던 것을 감안하면, 양사룡은 오이 재배와 나눔을 통해 하늘과의 의리를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이런 점에서 양사룡은 서귀가 현실에서 발견한 ‘진아(盡我)’의 실천자라 할 수 있다.
진아한 인물들
「양사룡전」에 등장하는 양흔동, 홍춘반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진아(盡我)’한 인물들이다. 이처럼 「양사룡전」을 저술한 기저에는 서귀의 의리 정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양사룡전」은 그저 효의 가치를 계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아(盡我)’의 실천자들을 입전하여 ‘진아(盡我)’의 가치를 확산하고자 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서귀가 쓴 두 편의 전 가운데 하나인 「송경운전(宋慶雲傳)」에서도 확인된다.
늘 손님이 오면 경운은 비록 손에 잡은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서둘러 그만두 고 비파를 가져오면서 “소인은 천한 사람인데 귀하를 자주 뵐 수 있는 것은 그 공이 소인 수중에 있는 이것에 있어서 그런 것이니 소인이 어찌 감히 천천히 손을 댈 수 있으며 소인이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반드시 곡조를 갖추어 연주하여 마음에 흡족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비록 천민이 오더라도 언제나 이와 같이 수응했으니 이렇게 하기를 20여 년이 되도록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주 사람들의 환심을 얻을 수 있었다.
每客至, 慶雲雖手執事, 必顚倒釋, 以取琵琶曰: “小人賤品也, 而多見以貴下者, 其功在小人手中, 小人豈敢遲下手乎? 小人豈敢不盡心乎?” 必具曲度以鼓之, 知其飫於心而後已. 雖輿儓人至, 亦莫不以是酬酢, 如是者至二十餘年不懈, 以是得完山人懽心.(『西歸遺稿4 권7 「송경운전(宋慶雲傳)」)
송경운은 서울에서도 이름을 날린 비파 명연주자였는데 정묘호란 때 전주 로 피신한 뒤 그대로 전주 사람이 된 인물이다. 송경운은 전주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지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에게 비파를 들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송경운이 손님들을 위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이 비파 연주요, 송경운은 이 비파 연주를 통해 사람들과 호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경운의 행위가 지닌 의미는 「송경운전」 마지막 부분에 붙인 서귀의 평가에 잘 나타나 있다.
아 훌륭하도다! 경운의 마음이여! 그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었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이 큰일임을 알아 다소의 수고로움을 괘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은 재주가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 됨을 알았고, 그는 작은 재주를 가지고서 남에게 교만을 부리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음악을 일삼는 것으로써 남에게 미치는 바가 있음을 알았고, 그는 음악을 자신만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는 자신의 음악으로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는 이와 같이 한 뒤라야 자신을 낳아준 하늘에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경운의 마음을 큰 사업으로 옮겨 쓴다면 그 성취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벼슬에 있는 자들이 취한 바 있어 그것을 본받는다면 또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니 지벌이 낮아서 어렵다 할 것인가?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서 어렵다 할 것인가? 숭상하던 옛것으로써 오늘날에 적용하였으니 또한 세상을 따라 미루어 변화할 줄 아는 도에서 얻은 것 아닌가?
噫善哉! 慶雲之心乎! 其能知人有望於[缺], 遂於人也; 其能知悅人爲大, 小勞不暇念也; 其能知我小技能以悅多人, 爲可幸也; 其能知挾小技以驕人, 爲不可也. 其能知業其樂以有及乎人也, 其能知不可以自私也, 其能知不可以訑訑也, 其能知如是而後可以不害於我之天也. 使移其心於大事業上, 其成就也可量歟? 使在位者有所取而則之, 則亦何有於治天下國家乎? 可以地卑乎? 可以名不著乎? 尙古以間今, 不亦得於與世推移之道者歟?(같은 글)
서귀가 내린 평가의 핵심은 하늘이 내려준 천부의 재능을 자기만의 독단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서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낳아준 하늘에 해를 끼치지 않는, 곧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렇게 보면 송경운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當爲所能] 을 가지고 ‘진아(盡我)’함으로써 하늘과의 의리를 지킨 사람이 되며 「송경운전」 또한 ‘진아(盡我)’의 실천자를 발견하고 입전한 작품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양사룡전」과 「송경운전」의 입전 인물이 모두 천민이라는 점도 주목을 요한다. 「양사룡전」과 「송경운전」에는 ‘천민도 이럴진대’와 같은 우월적이고 차등적인 인식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효자전의 논평부에 흔히 나타나듯 나라가 입전인물에 대해 은전을 베풀어야 한다는 등의 시혜적 인식을 드러내지 않는다【林孝子傳(『息山續集4 권6), 鄭孝子傳(『訥隱集4 권20), 琴孝子傳(『立齋遺稿4 권19), 孝子吳後種傳(『九思堂集4 권8) 등 다수의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나라의 정려나 포상을 요구하거나, 혹은 나라로부터 은전을 받은 사실을 계몽적 차원에서 서술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그들의 입을 빌어 특기(特記)하고, 그들에 대한 진심어린 교감과 논평을 전면화할 따름이 다. 천민에 대한 이러한 관점과 인식은 서귀 당대의 문인들에게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면모로서 서귀가 보인 인간 이해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본고는 「양사룡전」의 구성과 내용상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것을 저자의 의리론과 견주어 봄으로써 「양사룡전」의 입전의식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상 고찰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사룡전」은 일반적인 효자전과 비교했을 때 2,703자나 되는 긴 분량으로 서술되어 있다.
둘째, 「양사룡전」의 도입부에는 하늘과 인간 사이의 정당한 관계 정립에 대한 철학적 의론이 제시되어 있다. 이 철학적 의론은 일반적인 효자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작품 전체를 통관하면서 서사를 이끌고, 주제를 형성해간다. 곧 도입부의 의론은 저자가 자신의 사유를 입전인물을 통해 입증해가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셋째, 「양사룡전」은 전주사람으로부터 들은 내용[본사1]과 자신이 직접 만나 대화한 내용[본사2]을 중첩하여 구성하였는데, 이러한 구성은 전주사람들의 전언과 양사룡 자신의 전언을 대비시키면서 양사룡의 효행을 강조하고 주제를 심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서귀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 「양사룡전」의 주제를 단순한 ‘효행의 권면’을 넘어 보다 포괄적이고 본원적인 차원으로 심화시켰다.
넷째, 「양사룡전」은 다양한 삽화를 활용하여 주제를 확장시켰다. 양사 룡의 부친인 양흔동의 삽화는 ‘천리지고(天理之固)’와 ‘인도지상(人道之常)’이라는 관점에서 이전까지 다루었던 효행과 선행의 문제를 의리의 문제로 확장시켰고, 남만국 삽화는 양사룡과 이기발의 신분을 넘어선 교감과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홍춘반 삽화는 마땅한 도리를 실천하는 인물들이 점증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다섯째, 「양사룡전」의 핵심적인 의사는 저자의 의리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양사룡이 자기가 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늘에 대한 보은을 모른 체 해선 안 된다는 것은 서귀 의리론의 ‘나인(那忍)’과 연결되고, 스스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겠다는 다짐은 ‘당위소당(當爲所當)’의 정신과 연결되며, 오이를 정성껏 가꾸어 지친 행인들의 갈증을 풀어준 선행은 자신이 할 도리를 다하는 ‘진아(盡我)’와 연결된다.
여섯째, 이상의 고찰을 통해 볼 때, 「양사룡전」은 효행을 계몽적으로 권 면하는 일반적인 효자전의 주제와는 달리 하늘이 품부해준 바를 따라 마땅 히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하는 인간상의 확립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컨대, 서귀는 「양사룡전」을 통해 ‘진아(盡我)’의 실천자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확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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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rpose of writing the story of Yang Sa-ryong[「양사룡전(梁四龍傳)」] that consider in terms of do one’s duty[盡我]
Kim, Hyoung-sool
This paper aims to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of the structure and contents, and the purpose of writing the Yang Sa-ryong’s story[「양사룡전(梁四龍傳)」].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The Yang Sa-ryong’s story[「양사룡전(梁四龍傳)」] is written by Seogwi Lee gibal[西歸李起浡(1602~1662)] The Yang Sa-ryong’s story[「양사룡전(梁四龍傳)」] begins with a
philosophical argument for the establishment of a legitimate relationship between heaven and man. This beginning is hard to see in other works. And this introduction serves as a device for the author to prove his reasons through a preconceived character throughout the work. The Yang Sa-ryong’s story[「양사룡전(梁四龍傳)」] emphasizes Yang Sa-ryong's filial piety and deepen the various themes through the composition of overlapped narratives. The Yang Sa-ryong’s story[「양사룡전(梁四龍傳)」] extends the subject through various inserted stories. This composition is different from the typical filial tale. So, unlike the general story of the filial piety simply encourages filial piety, this story focuses on what the ideal human figure looks like. The topic of the story is closely related to the thoughts of the author's righteousness.
In conclusion, the author tried to establish a human figure who practices what he ought to do as the heaven gave it. In other words, the author tried to find a friend who did what he had to do through the story and tried to spread the justice he showed.
keywords: Seogwi(西歸), Lee gibal(李起浡), Yang Sa-ryong’s story[「양사룡전(梁四龍傳)」], filial piety, good deed, righteousness, cucumber, Righteousness relationship with the Ming Dynasty
접수일자: 2019. 3. 31. 심사기간: 2019. 4. 1.~2019. 5. 10. 게재결정: 2019. 5.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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