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명제: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가 있다.
(방편적 언어)
이 두 번째 명제는 실상 상식적인 경우, 제1명제 속에서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 상식적으로 신(神, God)을 말하는 경우, 신은 초월적인 존재자가 되어야만 하고, 초월적인 존재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곧 바로 믿음 즉 신앙(Faith)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자이고 그것이 초월적이라고 하는 생각은, 신은 우리의 상식적 감관에는 포착되지 아니하며 그의 언어ㆍ행동방식이 우리의 상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상식에 기초한 합리적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이성을 초월하는 비합리적 신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신앙과 이성의 이원론적 대립이라고 하는 서양 중세철학의 케케묵은 전형적 개념의 짝의 본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꼭 믿음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 이러한 이원적 대립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어버리고 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의 존재가 종교의 필요충분조건일 필요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신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켈란제로가 그린 털보아저씨의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면 과연 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 자체가 매우 우매한 질문이기 때문에 나는 구차스럽게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또 그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내가 인정한다고 할 때는 나는 그러한 질문에 방편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모든 대답을 예비하고 있지만, 너무 갑자기 결론을 내리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기 때문에, 나의 구업(口業)은 여기서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토끼뿔은 몇 그램이냐?”하고 누가 다짜고짜 물을 때, 토끼뿔의 중량에 대한 세세한 논의를 하면서 세월을 낭비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 존재의 가능태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 때문에 그 존재의 속성에 관하여 논의를 한다는 것은, 때로 재미가 있거나 유의미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아무런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결말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한 옛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다짜고짜 “요즘은 마누라 안 때리냐?”(Did you stop beating your wife?)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마침 내가 평소 마누라를 패던 사람이라면 이 질문은 대답이 가능할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내가 마누라를 팬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응”,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판단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전제(presupposition)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가 이러한 문화적 전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혀 다른 문화의 언어께임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할 필요를 근원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하나냐? 둘이냐?’ ‘신은 무엇이냐?’ 이와 같은 질문들은 ‘당신은 요즈음도 부인을 때리십니까?’ ‘술 끊으셨습니까?’와 동일한 류의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신은’이라는 주부(主部) 속에는 이미 ‘신의 존재성(存在性)’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질문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은’이라는 말은 이미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무의미한 토톨로지(tautology, 동어반복)가 되어버릴 뿐이다. ‘까만 새는 까만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소소한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지 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그 신이라는 주부(主部)가 주부로서 그냥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이라는 말을 하는 화자(話者)의 의미체계에 있어서 규정되고 있는 수많은 숨은 술부적(述部的) 전제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 한, 그 어떠한 논의도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이 ‘사랑’이었다면 이것은 곧 ‘사랑은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로 환원될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이 ‘전지전능한 아저씨’였다면, 그 질문은 ‘전지전능한 아저씨는 존재하는가?’가 될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이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이었다면, 그 질문은 곧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은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로 환원될 뿐이라는 것이다. 신이라는 주어의 술부적 속성이 기술(Description)될 때만이 그 맥락에서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 보통사람들은 이런 말을 알아듣는다 해도, 이런 엄밀한 철학적 규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냥 ‘하나님’, ‘하느님’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보통 종교를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무엇인지 규정할 필요도 없이 그냥 믿으라는 것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신은 어떤 전지전능한 유일한 절대자, 우주의 시공 속의 모든 존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장하는 절대자라는 어떤 막연한 ‘초월신=유일신’이라는 생각의 도식에 사로잡혀 있다. 절대자가 있으니 믿으라는 것이다. 절대자가 있다는 것(존재)과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는 도대체 어떠한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떠한 근거 위에서 그 필연성이 도출되는 것일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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