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통성 있는 삶에 대하여
03년 1월 4일(토) 눈 온 후 한파
지금까지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고 살아왔다. 내 성격 탓에 그랬던 거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선함(착한사람 컴플렉스)이란 가치에 눌려 살아온 나의 무능함 때문이다. 과연 착하다 또는 선하다 하는 게 뭔지를 생각해본다.
예전부터 착하다는 건, 남에게 좋은 모습으로 남는 것, 그렇기에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 것, 덩달아 싫은 행동을 하나도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 유아적인 방식의 개념이지만 그걸 착함의 본질인 양 개념화한 체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개념을 늘 머릿속에 주입하고 실천해왔기에 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좀 어이없는 처사를 당하더라도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하나 손해봐서 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그런 선함의 개념을 가진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무차별적으로 기습해서 그런 선함을 바보스러움으로 바꾸는 것이다. ‘호구 잡힌다’는 표현이 딱 그것일 터다. 그러하기에 융통성이란 걸 여기서 새삼스레 강조하는 것이다.
난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고 군에 왔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 사회생활을 예행 연습하는 게 참 많다. 그중에 포함되는 것이 바로 이 선함의 기본 밑바탕이 ‘져주고자 하는 삶’이란 말이다. 그 선함이 선함 자체로 평가 받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져줌이 선행 정도로만 비춰질 수 있다면 그걸로 사회는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행동을 보이면 사람들은 ‘아! 사람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늘 그래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다음 번에도 그렇게 져주길 바라게 된다. 만약 그때 가서 노발대발하게 대면, ‘아! 저 인간의 본성은 저거구나!’하고 한참을 뒷담화를 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어이 없는 자가당착이며 모순투성인가! 사회에서 한 번씩 쳐준다는 건 결국 ‘난 바보’라고 선언과 같은 격인 것이다. 그렇기에 새삼 조심해야 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밑 보이는 행동하지 마라’ 이건 철칙이자 진리이다. 다른 이에게 흠 잡혔다는 건 아무리 자기의 정당성 및 자존심이 확보된다 할지라도 그 사람 앞에서 늘 조마조마해야 하는 고양이와 쥐꼴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기에 자기의 선함 어쩌고 자시고 하면서 늘 져주는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우뚝 서 있고 뒤에 가서 선을 베풀어주어도 될 것이다. 절대 남에게 밑보이지도 말고 절대 나의 일에 대해 한 수도 양보하지 마라. 그래야만 결국 너 자신에게 훗날에 더욱 충실하며 진실할 수 있으니까.
군중이다. 이건 위에서 말했던 것에 대한 긍정적 예이다. 난 지금 활동하는 데 아무 제약이 없다. 월요일과 토요일에 있는 차방문을 가야할 때도 전혀 문제없이 갈 수 있다. 일직사관 허락은 무조건 o.k이고 필섭이에게도 이미 전파가 되어 있기에 근무도 없다. 거기다가 군종부 활동이 있어 중대장에게 R이나 XX에 간다고 허락을 받을 때도 별 간섭이 없다. 물론 그네들의 성격탓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애초에 내가 군종부 활동에 대해 전전긍긍(戰戰兢兢)만 하고 추진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런 풍토가 조성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이 주일 하루 내내 교회에 있어도 되는 건 불가능했겠지.
그럼에도 오늘은 실패를 하고 말았다. 월요일에 첫 분대장으로서의 근무를 서게 되는데, 오늘 1P 2S장 광석이가 외박을 나가는 바람에 내일 나보고 근무를 서라는 것이다. 솔직히 어이가 없다. 자기네 소대에서 해결이 되지 않아 다른 소대에 부탁을 하는 것인데도 완전히 막무가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난 ‘괜찮지’하는 맘으로 조금의 저항 후 인정해 버렸다. 이게 결국 이 한 번이라면 솔직히 이번 한 번 이재원 중사와 주일 근무 서는 것이 나쁘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져줌이 계속되어 말릴 수도 있기에 조금 긴장할 뿐이다. 그대여! 융통성, 그 순간순간에 맞는 처세술(處世術)로 무장할지어다!
1월 중대 입구에서 민병규와 이광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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