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집과 산스크리트원본
금세기 일본의 대불교학자라 할 수 있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동경대학 인도철학과 중심으로 활약】는 역으로 의정(義淨) 외의 타5본(他五本)에 보살ㆍ마하살이 없으므로 범본의 ‘보살ㆍ마하살’ 부분이 후대의 첨가라고 못박았다. 나카무라의 이와 같은 생각은 『금강경』 전체 텍스트와 그 전체 의미를 고려하지 못하고 부분만을 천착한 데서 생겨난 명백한 단견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이기영은 이 단견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국불교연구원(韓國佛敎硏究院)에서 나온 이기영(李箕永) 번역(飜譯)ㆍ해설(解說)의 『반야심경』ㆍ『금강경』(1978 초판, 1997 개정판)은 일본 불교학계의 거장,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ㆍ키노 카즈요시(紀野一義) 역주(譯註)의 『반야심경(般若心經)』ㆍ『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일서를 거의 그 체제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실제적으로 나카무라 하지메의 일본어역의 우리말 번역에 해당되는 책이다. 「해제」조차도 나카무라의 해제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단지 산스크리트 원문이 나카무라본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이기영의 범문(梵文)은 콘체본인데 오식이 적지 않다.
이기영 선생께서 서문에 나카무라 하지메의 번역본으로서 본서를 출간하려 했다는 당초의 취지를 밝히고는 있지만, 사실 이 정도의 체제라면 나카무라 책의 개역본(改譯本) 정도의 성격임을 표지에 밝혔어야 했다. 그리고 서(序)에 ‘한문 원전 중의 착오도 바로 잡았다’고 했는데, 나카무라본은 『대정』본이며, 『대정』본은 해인사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나카무라본 한문원전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판본은 고려도감판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기영은 우리 고려도감판을 보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바로잡음’은 정확한 기준을 결하고 있는 것이다.
나 개인은 ‘보살ㆍ마하살’이 빠진 라집(羅什)의 역보다는 ‘보살ㆍ마하살’이 들어있는 산스크리트 원본의 모습이 보다 수미일관(首尾一貫)되고 『금강경』의 대승정신에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금강의 지혜는 비구의 전유물이 아닌, 남녀노소, 출가재가 모두 같이 듣고 깨달아야 할 진리인 것이다.
이상이 나 도올의 『금강경』 최초의 한 줄에 대한 강해이다. 이런 식으로 강해를 해나가자면 『금강경』 전체를 해석하는데 『8만대장경』의 분량의 원고가 모자를 것이다. 문제는 내가 라집(羅什) 한역본 한문원본의 해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물론 내가 이 『경(經)』을 모두 이런 식으로 다 강해해나갈 수는 없을 것이나 우리의 고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편협하고 고식적이고 맹목적인가 하는 일면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내가 모든 경전을 이렇게 번역했으면 좋으련만 나 혼자의 힘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후학들의 학문하는 자세에 관한 것이다. 최소한 경전을 해석하려면:
1) 경전의 역사적 배경과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오늘 나의 역사적 관심에 대해 일단 상세한 정보와 객관적 관점이 확보되어야 한다.
2) 그리고 경전의 판본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며, 그리고 그 쓰여진 문자에 대한 이해, 그 어휘와 문법에 대한 통시적이고도 공시적인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3) 그리고 ‘나의 이해’에 앞선 모든 기타해석의 가능성에 대하여 내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나의 이해를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과정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4) 나의 이해의 최종적 결과를 옮겨놓을 생각을 하지말고 그 이해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독자와 공유할 생각을 해야한다.
5) 번역은 ‘문의(文義)해석’이 아니라 곧 그 문의(文義)에 대한 ‘나의 이해의 구조’를 오늘 여기의 좌중들에게 밝히는 작업이라는 투철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6) 나의 깨달음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회향(廻向)시키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그 열정 속에서 우리는 모든 방편을 구사하는 데 있어 자유로와야 한다.
앞으로 한국의 불교학계에 나와 같은 초로(草盧)의 보잘것 없는 학인을 크게 뛰어넘는 대석학들이 대거 배출되기를 희망하면서 다음 줄로 나의 강해를 옮긴다.
내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발음은 우리말 원래의 발음체계를 살린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학계는 유기음을 무기음화 하고 유성음을 무성음화 시키거나, 또 받침이나 된소리를 없애버리는 방식의 두리뭉실한 발음체계를 아주 정통적인 불교식 발음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조선조의 방식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불교 용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성체’를 왜 ‘사성제’라고 해야만 하며, ‘구마라집’을 ‘구마라쥬’라고 해야만 하는가? 일본어는 기본적으로 ‘송기(aspiration)’가 없으며 받침(CVC의 종성)이나 된소리가 없는 매우 제한된 발음체계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발음은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운허 스님의 『불교사전』을 기준으로 하면서, 나 자신의 학술적 판단력에 따라 방편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풍요로운 우리말의 음가를 무시하고 극히 제한된 일본 음역의 표기를 모방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효과를 ‘효과’라고 어색하게 발음하고,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하는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우리 문명 구석구석에 끼어있는 왜색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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