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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제일분 - 1.1 如是我聞 ~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방편설법과 대비구(大比丘)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일분 - 1.1 如是我聞 ~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방편설법과 대비구(大比丘)

건방진방랑자 2022. 11. 16.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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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설법과 대비구(大比丘)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에서 앞의 ()’는 우리말의 ‘~에 해당되는 전치사이다. ‘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은 그 전치사의 목적이며, 맨 끝의 ()’가 본동사이다. ‘()’더불어 계시었다.’ ‘같이 생활하였다는 의미이다. ‘()’은 여기서는 우리말의 에 해당되는 복수격일 뿐이다. ‘()’는 산스크리트 원전의 문맥으로 비추어볼 때, ‘아주 훌륭한 인격을 갖춘’, ‘득도(得道)의 깊이가 있는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훌륭한 비구들 1,250)’이라는 말은 좀 깊은 통찰을 요구한다.

 

금강경의 설법의 내용은 불교적 진리의 최고봉의 간략한 통찰이다. 화엄경같은 장편의 서사시가 깊은 계곡과 봉우리의 모든 세세한 장면을 장엄하게 다 훑고 있다고 한다면, 금강경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건너뛰는 소략하고 담박한 시경(詩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경(詩境)은 설()한다 해도 아무나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다. 사실 반야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고도의 혜지(慧智)를 체득(體得)한 자들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반야심경을 염불하면서 우리 불교도들이 나날이 줄줄 암송하고 있는 구절들을 한번 상고해보라!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무의식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오온설(五蘊說)도 부정되며, 육근(六根)도 부정되며, 육경(六境)도 부정되며, 육식(六識)도 부정되며,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도 부정되며, 그 유전문(流轉門)도 부정되며, 그 환멸문(還滅門)도 부정되며, 뿐만 아니라 불교(佛敎)의 가장 근본 요체인 사성체(四聖諦)도 부정된다. 지혜(智慧) 반야설도 부정되며 일체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부정된다.

 

자아! 이렇게 되면 반야심경처럼 지독한 반불교적(反佛敎的) 이단설(異端說)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불교의 기본교리를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깡그리 쳐부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반야사상은 불교사상인가? 반불교사상인가?

 

학생들이 방만한 나의 저술을 여기저기 읽다, 여러 군데서 같은 논조가 정반대로 되어 있는 것들을 적어가지고 와서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나에게 지적하고 항의하곤 하는 사태를 나는 종종 경험한다. 이때 나는 미소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소위 방편설법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린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방편설법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방편이란, 그 설법이 이루어지는 대상과 상황에 맞추어 수단적으로변주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방면이란 융통성이나 변통의 의미가 되겠지만 그렇게 상식적인 의미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방편(方便)이란 upāya라고 부르는 것으로 접근한다.’ ‘도달한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여러가지 교화의 방법, 선교(善巧)의 수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眞實)’ ‘진여(眞如)’ ‘진리(眞理)’ ‘tathatā’에 대응하는 말로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yathā-bhūta)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를 긍정하는 부정하든 그것은 불교 이전의 어떤 진여(眞如)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종교는 교리가 아니라고 한 나의 서언(序言)을 한 번 다시 상기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반야사상은 지독하게 반불교적 사상(anti-Buddhistic thought)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기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을 불교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맹점은 바로 기독교 교리 자내에 반()기독교논리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단지 정통과 이단의 판별의 역사가 되어버릴 뿐이다. 크라이스트(Christ)나 안타이 크라이스트(anti-Christ), 기독이나 반() 기독이나, 결국 알고보면 동일한 방편(方便)이라는 것을 기독교의 위대한 신학자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근본 맹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도의 지혜는 아무에게나 설파될 수 없다. 초심자가 반야의 사상을 접하면 악취공(惡取空)에 빠져버리고 말 뿐이다. 함부로 선()을 말하는 우리나라 스님들의 말폐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선은 불교의 최종진리다. 어찌 초심의 어린아이들이 선을 완롱(玩弄)하는가?

 

우리말에 귀명창이란 말이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송만갑과 같은 위대한 판소리명창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이미 우리사회에 귀명창이 없기 때문이다. 판소리를 깊게 흔상(欣賞)할 수 있는 귀를 가진 대중이 형성되어 있질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소리명창은 귀명창이 있어야만 탄생되는 것이다. 아무리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명강의는, 그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대중이 확보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도 요즈음 대학에 가서 강의를 해보면, 피곤함만을 느끼고 별 보람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학생들의 질이 저하되어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수업태도가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고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올서원에서 강의를 하면 너무도 강의가 술술술술 풀어진다. 마음의 깊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우수한 학생들이 전국에서 선발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내 강의를 들으러 발심(發心)을 일으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 왔다는 데 있다. 그들은 내 말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중하는 진지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 말을 한 마디라도 더 안들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는 대학가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진지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도올서원을 육중하게 누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 큰 비구들 1,250명과 같이 있었다라고 한 표현은, 부처님이 최고의 지혜를 설법하실 수 있는 특수한 귀명창들의 자리가, 그 마당, 그 분위기가 마련되었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금강반야의 지혜가 설파된 장엄한 자리는 전문적인 불법의 소양을 갖춘, 그리고 출가하여 오랜 수도를 한 큰 비구스님들 1,250명을 청중으로 해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나의 해석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다른 견해가 성립할 수도 있다는데 금강경 강론의 오묘한 성격이 존()하는 것이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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